저는 친일파의 손자... 역사와 민족앞에 사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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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오른 윤수병의 친손자가 민족문제연구소의 회원으로 가입했습니다. 더불어 할아버지의 친일행위를 사죄하는 글을 올렸습니다. 이 글은 포털 사이트에 올라가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선조의 친일행위를 적극적으로 변명하고, 심지어 행적을 밝히는 일을 고소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이런 한국 사회에서, 자신의 할아버지의 부끄러운 일을 밝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다시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조금 긴 문장입니다만, 민족문제 연구소 홈페이지에 올라간 선생님의 글 전부를 올려봅니다. 

저는 친일파의 손자입니다. 역사와 민족 앞에 사죄드립니다.

나는 할아버지를 생전에 뵙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직후 1953년에 타계하셨고 그 후 몇 년이 지난 다음에 내가 태어났기 때문에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부모님을 통해 들었던 할아버지에 대한 단편적인 이야기는 어려서부터 영특하셨던 할아버지가 상투를 자르고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날 때 따라 가셨던 증조 할아버지가 펑펑 우셨다는 전설과 같은 이야기와 일본의 게이오 의숙에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대한제국의 농상공부의 관리로 출발하여 나중에 군수까지 하셨다는 정도가 전부였다. 난 할아버지가 늘 궁금했다.

 

2009년 11월 8일 백범 선생 묘소에서 열린 친일인명사전 발간 국민보고대회 ⓒ 민족문제연구소

그러다 작년에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을 만들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혹시 우리 할아버지도 일제 초기에 군수를 하셨다면 친일파 명부에 있지 않을까 하여 도서관에 달려가 찾아보았다. 내가 궁금해 하고 찾던 할아버지가 바로 거기에 계셨다. 2011년 9월 3일은 나의 뿌리인 할아버지를 찾은 날이다. 아버지도 작은 아버지도 알지 못하시던 할아버지의 50여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그 안에 들어 있었다. 할아버지의 이력이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복사해서 집으로 돌아와 인터넷에서 구한말 일본유학생들에 대한 자료를 조사했다. 할아버지는 구한말 대한제국에서 개혁과 개방정책을 담당할 인재를 키우고자 1895년 제1회 관비유학생 파견사업으로 선발된 양반자제 200명에 속하여 일본 동경의 게이오 의숙에서 예과, 본과를 마치고 귀국하여 1900년에 농상공부에서 공직을 시작하셨고 1910년 한일합병 이후에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군수로 봉직하시다가 1924년 휴직하셨다가 1926년 50세의 나이로 퇴직을 하셨다.


할아버지의 첫부인이신 안동 김씨 할머니는 45세 나이로 1918년 타계하시고, 아버지를 낳으신 할머니는 인동 장씨로 1919년, 17세의 나이에 43세 당시 군수였던 할아버지와 결혼하셨다. 할아버지가 은퇴하실 때 아버지의 나이가 6살, 작은 아버지의 나이가 3살이었으니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는 게 이해가 된다. 퇴직 후 할아버지는 집을 떠나서 유랑하셨으며 집안에 대하여 무심하게 사셨다고 한다. 집안 살림과 자녀 교육은 오롯이 젊은 할머니의 몫으로 남겨져 당시 여학교를 졸업하고 산파 자격증을 가지고 계셨던 할머니께서 병원에서 산파를 하시면서 생활을 하셨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신 것은 1940년 즈음으로 65세 정도쯤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다가 1953년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할아버지는 왜 그렇게 말년을 사셨을까?


해방 후에 반민특위를 통해서 친일파들을 청산하지 않은 것이 역사의 치명적 약점이었다고 생각하는 나! 많은 친일인사들이 해방된 새로운 정부의 공직에 일하면서 과거 친일행위에 대한 사죄와 반성도 하지 않고 그것은 과거의 이야기이고 자꾸 그런 것을 들춰내어 왜 갈등을 조장하느냐고 뻔뻔스럽게 말하는 그들을 보면서, 그것이 지금의 남남갈등의 뿌리라고 생각하는 나, 친일파와 그의 자손들은 치부한 재산으로 호의호식하고, 공부하고, 성공하고 해방 후 사업가, 정치가, 공직자로서 활동하였는데, 독립운동을 하셨던 당사자들이나 후손들은 춥고 배고프고, 공부도 못하고 어렵게 살고 있다는 기사를 볼 때마다 ‘이런 개같은 경우가 어디있느냐’고 분개했던 나였는데 오늘 내가 친일파의 후손인 것을 알게 된 것이다.

2009년 12월 8일 연구소 앞에서 열린 극우단체들의 친일인명사전 폐기 촉구 집회 ⓒ 민족문제연구소


난 오늘 나의 뿌리를 찾았다. 할아버지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타셨는지 일본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마음 속에 민족과 국가의 운명과 미래를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알 길이 없다. 을사국치일과 한일합병의 과정 속에서 관직에 계셨던 할아버지는 당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고 계셨을까? 많은 친일파가 그러하듯이 많은 재산을 모으시고 자녀 교육도 잘 시켜서 식민지치하에서 자식들이 성공하도록 만드시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할아버지에 대하여 궁금한 것이 너무도 많았다. 하지만 할아버지께서 자신에 대한 일기나 어떤 비망록도 남기시지 않으셔서 그분의 의중은 알지 못한다. 단지 앨범 속에 남아있는 빛바랜 몇 장의 사진만이 유일한 유산이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을 통해서나마 할아버지의 외적인 삶의 궤적을 찾게 되니 할아버지가 친일관료였다는 안타까운 사실보다 잃어버린 할아버지를 찾은 기쁨이 더 크다. 오늘 난 민족문제연구소의 회원이 되었다. 이 발걸음은 작지만 이 나라, 이 민족의 역사바로세우기를 하는데 벽돌 한 장을 올리는 심정으로 나의 집안의 역사와 진실을 사죄하는 마음으로 세상에 고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하시느라 수고하신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 국민과 역사 앞에 그리고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혹은 고생하신 많은 분들과 그들의 자녀분들에게 친일파셨던 할아버지를 대신해 한 친일파의 손자가 가슴깊이 사죄드린다!


        
친일인명사전의 기적, 역사관 건립으로 이어가겠습니다.
TEL 02-969-0226 / E-mail historyac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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