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다큐멘터리 주요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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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주요내용


1945년 8월, 해방은 도둑처럼 찾아왔다. 감격의 순간도 잠시, 미군정은 친일세력을 복귀시켰고, 이승만은 권력을 잡기 위해 이들과 결탁했다. 이어진 반민특위 해체와 김구 암살. 이로써 우리 역사는 거짓과 불의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금기가 된 친일문제와 정면으로 마주했던 임종국. 아버지의 죄과도 기록하는 엄정한 태도로 반평생 친일문제 연구에 몰두했던 임종국은 1989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1991년 2월, 그의 유지를 계승한 민족문제연구소가 출범했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친일세력의 것이었다.



1995년 8월, 연구소 회원들이 ‘친일청산’을 외치며 거리에 나섰다. 수백 명으로 불어난 연구소 회원들의 꿈은 친일인명사전 발간. 그러나 돈도 연구인력도 모자랐다. 그런 상황에서 맞은 IMF. 연구소는 존망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



1999년 회원들은 다시 편찬기금 조성에 나섰고, 그해 8월 대학교수 1만 명이 사전편찬 지지를 선언했다. 그 무렵, 박정희기념관 건립문제를 둘러싸고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연구소는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2001년 12월, 마침내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출범한다.



2003년, 수구세력은 친일진상규명법 제정을 막아서고, 사전편찬 기초조사 예산 전액을 삭감했다. 사전편찬이 좌초 위기에 놓였을 때 인터넷 모금운동이 시작되었고, 11일 만에 목표액 5억 원이 달성됐다. 상식과 정의의 역사에 대한 시민들의 절대적 지지가 확인된 순간이었다. 친일청산은 이제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과제가 됐다.



광복 60주년을 맞은 2005년 국치일, 편찬위원회는 마침내 사전수록예정자 1차명단 3,090명을 발표했다. 수구언론은 거센 비난을 쏟아냈고, 연구소를 빨갱이 집단으로 몰아붙이는 시위대가 연구소 앞을 점거했다. 이런 소란 속에서도 사전 편찬작업은 흔들림 없이 계속됐다.



2008년 4월 29일, 편찬위원회는 최종 수록대상자 명단을 발표했다. 이제 친일인명사전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되는 단계로 진입했다. 그러나 뉴라이트를 비롯한 보수세력은 대대적인 역사왜곡을 자행했다. 이들의 역사파괴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진실에 기초한 기록의 힘 뿐이었다. 2009년 10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족 등이 게재와 배포금지 소송을 제기했으나 결과는 친일인명사전의 승리. 인쇄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2009년 11월 8일, 친일인명사전 발간 국민보고대회. 돌연 행사장 대관이 취소됐다. 분노한 시민들은 백범 김구 선생의 묘소로 자리를 옮겨 독립정신과 역사정의를 되새기는 뜻깊은 헌정식을 가졌다. 친일파들에게 암살당한 백범 선생의 혼백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민들은 ‘친일파 청산’을 소리높여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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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 18년사-Collaborator Dictionary 18years from MinjokMovie on Vimeo.



오마이뉴스,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친일 인명사전 네티즌 모금 8주년 기념 이벤트 "그날의 '당신'을 찾습니다." 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날의 '당신'들께 영상실록 “상식과 정의를 향한 기록, 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을 보내드립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자료실 고양이 민족문제연구소 자료실
못난 조상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친일인명사전의 기적,역사관 건립으로 이어가겠습니다.
TEL 02-969-0226 / E-mail
historyac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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