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역사박물관/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에 해당되는 글 24건

  1. 2016.10.26 누구를 위한 개혁인가-침략을 위한 길 닦기
  2. 2016.09.29 친일파는 한국판 전범-『주간서울』(1949.4.4)
  3. 2016.08.30 ‘광복’과 함께 ‘국치’를 기억하자
  4. 2016.07.27 이토를 찬양한 ‘매국배족’의 무리들 (1)
  5. 2016.05.09 격랑 속의 조선-公園の各國兒童 공원의 각 나라 아이들
  6. 2016.03.31 조선의 독립국임을 선언하노라-기미 독립선언서
  7. 2016.02.25 새해 놀이판이 된 조선, 조선인-일출신문조선쌍육 (1)
  8. 2016.02.22 사진첩으로 보는 간도와 만주국 실경(1)
  9. 2016.02.22 애국부인회
  10. 2016.02.22 제국 홍보의 소품, 시정기념엽서 시리즈

누구를 위한 개혁인가-침략을 위한 길 닦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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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개혁인가-침략을 위한 길 닦기




1894년 동학농민군이 봉기하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조선정부가 청나라에 출병을 요청하자 일본은 거류민 보호명목으로 인천에 군대를 상륙시켰다. 이어 그해 7월 23일 경복궁에 난입해 ‘국왕생포작전’을 벌였다. 왕궁 점령 이틀 후 일본은 아산만의 청군함대를 기습 공격해 청일전쟁을 도발하였다. 그러면서 일본은 김홍집, 박영효를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을 구성하고 조선의 내정개혁에 적극 개입하였다.(제1차‧2차 갑오개혁) 그러나 1895년 5월 삼국간섭으로 인해 요동반도를 반환하면서 일본의 기세가 꺾이자 민씨 일족은 친러파인 이범진, 이완용 등을 기용해 일본에 대한 견제를 시도했다. 일본은 1895년 7월경 육군 중장 출신인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를 주한일본공사로 임명하고 친러 정책을 펴는 명성황후를 제거하고자 ‘여우사냥’ 작전을 획책하였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미우라는 흥선대원군을 앞세우고 일본 낭인들을 지휘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시체를 불태웠다. 그리고 고종을 위협해 유길준, 서광범 등을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을 수립, 을미개혁(제3차 갑오개혁)을 추진했다.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로 인한 국제적인 비난에 직면하자 미우라와 가담자들을 일본으로 데려가 히로시마 감옥에 가두고 재판했으나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모두 석방하였다.


우리 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조선정부대개혁도朝鮮政府大改革之圖」(69.2㎝×34.5㎝)는 1894년 일본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갑오개혁을 소재로 한 니시키에錦絵다. 니시키에란 근대 일본의 목판화로 무로마치시대 말기부터 에도시대 초기에 걸쳐 그려진 우키요에浮世繪라는 풍속화를 근간으로 한 것이며 이것이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풍부한 색채를 사용하는 컬러판 니시키에로 발전하였다. 초기에는 미인화를 주로 그렸으나 19세기에 들어와서는 풍경화나 일본과 중국의 역사상의 인물을 소재로 삼았고, 일본이 조선과 중국을 침략하면서부터 당시 전황을 알리거나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는 보도화報道畵가 많이 그려졌다. 이 그림은 오오토리大鳥圭介 주한일본공사가 배석한 가운데 조정 대신이 신료와 백성들에게 내정개혁안을 공포하는 장면을 화폭에 담았다. 그림 중앙 상단에 당시 정치상황을 설명한 글이 있는데 “민씨 일파의 폐정 때문에 동학농민전쟁이 발생하였으며, 이를 개혁하기 위해 대원군을 내세우고 무력으로 청군을 격퇴했다.”고 적혀 있다. 그림 속의 궁궐을 나서는 기모노 입은 여인은 개혁 조치로 인해 권좌에서 쫓겨나는 민씨 일파를 상징한다.


위 그림과 짝을 이루는 「조선전보실기朝鮮電報實記」(69.2×34.5, 1894.7)와 「조선왕성대원군참전도朝鮮王城大院君參殿圖」(69.2×34.5, 1894)도 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다. 전자는 오오토리 공사가 일본군을 지휘하여 조선군과 전투를 벌이며 경복궁으로 입성하는 그림이고, 후자는 대원군과 어린 의화군이 경복궁에 들어와 고종을 배알하는 그림으로 함께 있는 오오토리 공사와 왕궁 주위를 경계하며 도열해 있는 일본군의 모습은 당시의 강압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해준다.


1890년대에 그려진 조선‧중국 관련 니시키에는 한국과 중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일본 국민에게 전파하고 제국주의 침략사상을 확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일본 풍속화를 다년간 연구해온 재일사학자 강덕상 교수는 “다른 어떤 매체보다도 민중을 선동하기에 적합했던 게 우키요에 전쟁화였으며, 이를 통해 일본의 근대화가 당초부터 침략과 병행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지적한다.



▒ 글쓴이: 민족문제연구소 박광종 선임연구원

  



(이 글은 민족문제연구소 소식지 <민족사랑> 2016년 10월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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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는 한국판 전범-『주간서울』(194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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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는 한국판 전범

주간서울』(1949.4.4)



해방이 되자 제일의 민족적 과제가 친일파 숙정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미군정의 친일파 재등용은 이러한 민심을 철저히 외면하는 것이었다. 정부가 수립되자 친일파에 대한 단죄는 다시 전면화하게 된다. 1948년 9월 22일, 제헌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설치하였다. 이어 친일파 기소와 재판을 담당할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부를 구성하여 친일파 체포에 나섰다. 국민들은 반민특위의 활동을 적극 지지하며 반민특위에 친일파의 행적을 증언하거나 제보했다.


언론들의 취재 경쟁도 치열했는데 당시의 정황을 구체적으로 전해주는 자료 하나를 소개한다. 특별재판부 재판정으로 들어가는 친일파의 모습이 실린 1949년 4월 4일자 『주간서울』 1면이 바로 그것이다. 주간서울』은 1948년 1월 창간되어 6·25전쟁 직전인 1950년 5월까지 간행된 해방이후 최초의 종합시사주간지이다.


1949년 3월 28일부터 반민족행위자특별재판이 개정하자 주간서울』은 “한국판 『뉴른베르그』? 피고들 궤변과 방청석의 공기”라는 제목으로 이 재판의 의의와 분위기를 상세하게 보도했다. 먼저 친일파 처단의 목소리는 해방과 동시에 일어났지만 미군정의 소극적인 태도로 4년이라는 긴 시간을 그대로 흘려보낸 점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친일파 처단은 해방민족으로서의 절대 요청’으로 정부가 수립되자마자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상정(1948년 8월 17일)되고 정식 공포(1948년 9월 22일)되어 법적 근거가 마련된 사실에 안도감을 표현하고 있다.


이어 1949년 1월 8일 친일파 박흥식의 수감을 시작으로 반민특위의 실질적 행동이 개시되어 3월 28일부터 개정된 8명의 피의자에 대한 반민족행위자특별재판에 대해 ‘도로 찾은 민족정기가 겨우 소생의 실마리’를 잡게 되었다고 평가하며 특급 친일파인 피의자들의 사진을 전면에 실었다. 또 이 재판을 뉘른베르크와 도쿄 전범 재판에 빗대어 친일파를 ‘히틀러와 도죠의 핏줄을 받아 한솥밥을 먹어온 혈연들’인 ‘한국판 전범’들로 규정하고, 세계인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한 파시즘의 무리들이 남아 있는 한 세계를 다시 혼란과 전화戰火로 뒤덮을 것이기에 그들의 처벌로 ‘세계평화의 병病’을 미리 없애려는 예방의 차원에서 의의가 있으니 ‘한국판 전범을 숙청하지 않고 는 우리나라가 평화로울 수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고 주장하였다.


마지막으로 주간서울』은 재판정에 선 친일파들의 어처구니없는 변론을 비판하고 이들의 처단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결코 민족이 용납할 수 없다는 방청객들의 분위기를 전하며 반민특위의 활동을 기대하고 있다.


주간서울』에 비친 바와 같이 국민들의 반민특위에 대한 지지와 기대가 컸음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특위를 비난하고 활동에 제동을 걸었다. 친일세력을 주요한 정치적 기반으로 삼았던 이승만은 처음부터 친일파 처벌을 반대하였고 심지어 체포된 친일파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반민특위의 활동을 불법으로 몰아갔다. 친일파는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반민특위 요인의 암살을 계획하는 등 역공을 취하면서 반민특위의 활동을 집요하게 방해하였다. 마침내 친일경찰들이 반민특위를 습격하여 무력화시킴으로써 친일파 처벌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해방된 지 70년이 넘었지만 친일문제는 여전히 금기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뿌리 뽑지 못한 독버섯의 포자가 널리 퍼져 이제 공고한 세력을 구축하고 대한민국의 주류 행세를 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오래 전 “민족정기를 소생시키기 위해서 친일파 처단을 해야 함”을 주장한 주간서울』의 논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 글쓴이: 민족문제연구소 강동민 자료팀장

  



(이 글은 민족문제연구소 회보 <민족사랑 2016년 9월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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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과 함께 ‘국치’를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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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과 함께 ‘국치’를 기억하자

-『병합기념 조선사진첩』





1910년 8월 22일 일본군의 삼엄한 경비가 펼쳐진 가운데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을 비밀리에 조인했다. 병합조약은 일주일이 지난 8월 29일 순종의 칙유를 통해 내외에 공포되었고, 이로써 대한제국은 국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1910년 12월 4일 신반도사에서 발행한 『병합기념 조선사진첩』이다.

사진첩을 발간한 신반도사는 서언에서 “조선의 병합은 동양평화의 기초를 공고히 하고 반도의 행복을 증진하는 것으로 특히 원만하고 평화롭게 이 대사 병합의 해결을 본 것은 진실로 주목할 만한 일로… (병합의) 성사를 영구히 기념”하기 위해 간행한다고 밝혀 ‘조선병합’을 ‘경축’하는 의미로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취지로 발행된 병합기념 조선사진첩은 총 100쪽에 걸쳐 다양한 사진 자료를 담고 있는데, 강제병합의 주역들인 일본과 조선의 인물 사진 170여 장, 특별한 행사의 인물단체 사진 20여 장, 경성의 모습 44장, 지방의 명소와 고적 사진 86장, 조선의 풍속 사진 42장 등 약 400장의 사진을 싣고 있다.


‘조선’ 사진첩임에도 불구하고 첫머리에 실린 사진은 메이지(明治) ‘천황’ 부부의 초상과 그 후계자인 요시히토 ‘황태자’ 일가족이다. 황실에서 왕가로 전락한 조선왕실 일가는 다음 순서로 밀려났다. 또한, 조선총독부 최초 관보와 대한제국 최종 관보, 순종의 칙유와 데라우치 통감의 유고를 함께 실어 조선의 병합은 ‘원만하고 평화롭게’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사진첩에는 수많은 인물 사진이 삽입되어 있는데 병합 당시 일본 내각 대신들, 통감과 부통감, 대한제국 내각 대신과 중추원 의장, 병합조약 조인실과 통감부 수뇌, 조선주차군사령관 등 일본주요 관리와 이완용·박제순·민병석·고영희·조중응·김윤식 등 ‘병합’에 결정적인 이바지를 하였던 친일 인사들의 사진이 줄지어 나온다.


특이한 점은 조선과 관계된 일본의 주요 관리들 사진 아래에는 이름뿐만 아니라 ‘왕비사건 당시의 공사, 자작 미우라 고로’, ‘강화도사건 당시의 함장, 이노우에 요시카’, ‘제물포조약 당시의 전권대사, 쿠로다 키요타카’ 등과 같이 사건 당시의 직위도 적어 각 인물들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 눈에 띈다.


인물사진뿐만 아니라 요시히토 일본 ‘황태자’의 한국 방문 시 일본의 주요 인물과 한국의 각부 대신들이 함께 찍은 「일본황태자 도한기념사진」, 의병항쟁을 저지하고 일본의 시정개선을 과시하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가 추진한 행사인 ‘순행’을 촬영한 「순종 순행기록 사진」 등 주요 행사의 기록 사진도 실려 있다.


사진첩의 편집자인 스기 이치로헤이(杉市郞平)는 청일·러일전쟁에 참여한 군인 출신인데, 1905년 인천 헌병분대장으로 조선에 들어온 것을 계기로 소집해제 이후에는 아예 조선에 머물며 조선 일일신문사 사장과 잡지사인 신반도 사장을 하면서 병합기념 조선사진첩󰡕을 간행하였다. 또한 식민지 공포정치의 산실인 헌병경찰의 활동이 담긴 사진첩 병합기념 조선지경무기관󰡕의 편집자 역시 스기 이치로헤이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병합기념 조선사진첩의 사진 중에는 다른 사진첩에도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사진을 발견할 수 있는데 강제병합을 전후하여 발행된 한국병합기념첩일한병합기념 대일본제국조선사진첩한국사진첩 등에서 상당수 같은 사진이 쓰인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한국명사사적풍속사진첩처럼 표제만 다를 뿐 내용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이렇듯 일제의 조선 ‘보호국화’가 진행되면서 일본인에 의해 조선에 대한 체계적인 기록사진이 생산되었으며 ‘병합기념’을 목적으로 사진첩을 제작하여 ‘병합의 성사를 축하’했다.


‘1910년 8월 29일’. 일제는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온갖 기념자료를 만들어 보급하고 각종 행사를 주최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역사자료관을 찾는 학생들을 비롯하여 많은 관람객에게 ‘광복절’이 언제냐고 물어보면 ‘당연한 걸 왜?’라는 표정으로 ‘1945년 8월 15일’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우리가 나라를 빼앗긴 ‘국치일’이 언제냐고 물어보면 머뭇거리면서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 망명 독립지사와 동포들이 끼니를 거르면서 가슴에 새기고자 했던 치욕의 망국일-국치일은 이제 잊혀진 날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기억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또 다시 병합기념 ‘한국’사진첩이 발행되지 말란 법이 없다.




▒ 글쓴이: 민족문제연구소 강동민 자료팀장

  



(이 글은 민족문제연구소 회보 <민족사랑 2016년 8월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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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를 찬양한 ‘매국배족’의 무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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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를 찬양한 ‘매국배족’의 무리들




취운정翠雲亭. 종로구 가회동에서 삼청동으로 넘어가는 북촌길 고갯마루에 있던 정자다. 이곳은 갑신정변의 주요 인물인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등이 내외정세를 토론한 장소로 유명하다. 특히 갑신정변 관련 혐의로 유폐된 유길준이 1887년 이후 이곳에 머물면서 1892년 11월 민영익의 주선으로 유폐가 풀릴 때까지 『서유견문』을 저술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청일·러일전쟁이 끝난 후에는 많은 지사들이 우국의 심정을 토로하던 역사의 현장이다. 나철, 이기, 오기호 등은 1909년 2월 나라가 파괴되고 백성이 망하는 근본 원인을 사대주의에 기운 교육으로 민족의식이 가려진 데 있음을 통감하고 ‘단군교’ 포명서를 공포했다. 독립을 꿈꾸던 이들이 비밀리에 이곳에 모여 독립운동을 모의하였으며,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계획하던 곳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1909년 7월 13일 오전 10시, 취운정에서 이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모임이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전현직 통감과 각부 대신, 조선의 고위 관민들이 모인 시회詩會가 열린 것이다.


일본 메이지 정부는 7월 6일 각의에서 ‘한국병합방침’을 결정하였고, 7월 12일 대한제국은 사법과 감옥 사무를 일본정부에 위탁하는 약정서에 조인해 사법권마저 강탈당했다. 망국의 암운이 드리우고 있는 그때 7월 13일, 경성 한복판 취운정에서 조선의 고관, 유지들이 모여 한국 병합을 실질적으로 이끈 이토 히로부미를 찬양하는 시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조선 관료와 유지들은 앞다투어 이토를 추앙하고 여흥을 즐겼다. 이토 히로부미의 사위이자 정치가인 스에마츠 겐죠末松謙澄가 이 때 창화(唱和 : 시나 노래를 서로 주고받는 것)한 시들을 모아 ‘한일 양국의 선린우호 강화를 위하여’라는 미명아래 『취운아집翠雲雅集』이란 제목의 시집으로 엮었다.


이날 이토 히로부미에게 바쳐진 시 한 수. 정미7적 중 한 명으로 왜놈의 3대 충노忠奴로 꼽혔던 조중응의 시다.


春翁七十氣昻然 춘묘(春畝,이토 히로부미의 호)는 칠십 노인이면서도 기개가 높아

活佛身兼到上仙 살아있는 부처요 하늘에 오른 신선이라.

誰識平生勞苦意 평생 수고한 뜻을 누가 알리오

只憂西勢漸東邊 다만 근심하는 것은 서양의 세력이 동쪽으로 밀려옴이라.


時 隆熙三年 七月 於京城翠雲亭 賦別 伊藤公 一絶 書爲井上君雅囑

韓國從一品 農相 趙重應

융희 3년 7월, 경성의 취운정에서 이토공과 이별하며 절구 한수를 지었다. 이노우에군

께서 부탁하셔서 썼다.

한국 종1품 농상 조중응


취운정에 모인 자들은 나라를 팔고 민족을 팔고 자신의 영혼까지 내맡겨 평생의 부귀를 얻었다. 일제강점 직후에 매국적들은 예외 없이 ‘조선귀족’으로 작위를 받고 거액의 은사공채로 부를 축적했으며 작위를 세습한 후손들도 대를 이어가며 각종 특권을 누렸다.


조선 병탄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는 불과 3개월 후인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탄에 심판을 받았다.


▒ 글쓴이: 민족문제연구소 강동민 자료팀장

  



(이 글은 민족문제연구소 회보 <민족사랑 2016년 7월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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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랑 속의 조선-公園の各國兒童 공원의 각 나라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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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랑 속의 조선

公園の各國兒童 공원의 각 나라 아이들






「공원의 각 나라 아이들 公園の各國兒童」이라는 제목의 이 그림은 메이지 시기부터 만주사변까지 일제의 침략전쟁을 다룬 화첩 『전역화첩어국지예戰役畫帖 御國之譽』에실려있는 풍자화다. 도쿄의 성문사省文社에서 1936년(소화11년) 10월 30일 초판이 발행되었고 연구소 소장본은 1936년 11월 5일에 발행된 20판본이다. 이 화첩 서문에는 “메이지부터 쇼와시대까지 국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열강이 경이로워 했는데 이는 전쟁에서 황군의 대활약 때문”으로 “몸을 버리고 집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군국을 위한 나아간 귀중한 공적을 다시 음미하는 것”이 간행 목적이라 밝히고 있다. 따라서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침략 등 전쟁을 통한 일본제국의 ‘발전’을 주로 다루고 있다. 그림의 소재 또한 육군성과 해군성의 제공 자료를 활용하였으며 일본이 벌인 전쟁을 한눈에 이해하기 쉽게 구성하였다.


총 60폭의 그림으로 구성된 전역화첩어국지예에서 27번째그림으로등장하는 「공원의각 나라 아이들」은 청일전쟁 직후 일본과 서양 열강들의 세력다툼을 일본의 시각으로 풍자한 것이다.


청나라가 졸고 있는 사이에 큰 몸집의 러시아가 청나라 소유의 만두(만주滿洲를 만두로 표현)를 슬쩍 가져가자 소년으로 표현된 일본이 러시아의 손목을 잡으며 저항하고 있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서양 열강들의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이 와중에 아이로 표현된 조선은 일본의 다리에 매달려 무섭다고 외치고 있는데, 격랑 속의 동아시아 정세를 비유하면서 일본을 마치 ‘동양의 수호자’인 양 미화하였다.


1895년 4월, 일본은 한껏 들떠 있었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대륙 침략을 위한 발판이 마련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였겠는가.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일본이 랴오둥 반도의 지배권을 확보하자 대다수의 언론은 마침내 일본이 노쇠한 아시아의 대열에서 벗어나 서양 강대국과 대등하게 교류할 자격을 얻었다고 자평했다.


그러나 일본의 자축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한반도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우려한 러시아가 프랑스, 독일과 협력하여 랴오둥반도를 청에 반환하도록 일본에 압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삼국간섭’이다. 아직 러시아와 정면으로 맞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일본은 이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삼국간섭의 결과에 청일전쟁의 승리에 취해 있던 일본 국민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으며, 서구열강은 이를 기회로 경쟁적으로 청나라 분할에 나서게 되었다. 1898년 3월에는 독일군이 자오저우만膠州灣에 상륙하였고, 프랑스·영국 등도 앞다투어 군대를 파견하여 조차지租借地를 요구하였으며, 러시아는 만주의 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고 랴오둥반도를 조차하였다. 이 사건으로 러시아를 향한 일본의 적대감은 더욱 커졌으며 결국 러일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청일전쟁을 계기로 중국은 반식민지로 전락하였고 조선은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을 받으며 결국 식민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 한장의 그림으로 19세기말 풍전등화와도 같았던 조선의 운명을 가늠해 볼 수 있다.


「공원의 각 나라 아이들 公園の各國兒童」은 5월 개관하는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에도 전시될 예정이다.


▒ 글쓴이: 민족문제연구소 강동민 자료팀장

  



(이 글은 민족문제연구소 회보 <민족사랑 2016년 4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친일인명사전의 기적,역사관 건립으로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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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독립국임을 선언하노라-기미 독립선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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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독립국임을 선언하노라

- 기미 독립선언서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종로의 태화관에 독립선언서 서명자 33인 중 29인이 모였다. 그들은 조선총독부에 독립선언식을 거행한다고 통고한 다음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자발적으로 체포당했다. 탑골공원에 모여 민족대표 33인을 기다리던 학생과 시민들은 그들의 체포 소식을 듣고 스스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거리로 나가 독립만세를 외치며 태극기를 흔들었다.


이번호에 소개할 자료는 바로 기미년 3월 1일에 낭독했던 독립선언서다.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의 독립국임과…”로 시작되는 독립선언서는 왼쪽부터 세로쓰기로 내용을 서술하고 마지막에 ‘공약삼장(公約三章)’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을 나열하였다.



선언문은 최남선이 기초하였는데 민족자존의 정당한 권리와 인류 평등의 대의를 천명하였다. 그리고 평화적인 시위를 운동의 원칙으로 제기했다. 원래 한국의 독립을 일본 정부에 요구하는 독립 ‘건의서’ 혹은 ‘청원서’의 형태로 발의되었으나 ‘민족자결’의 의미를 담아 독립 ‘선언서’로 해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명칭이 변경되었다고 한다.


특히 선언서 마지막에 실린 ‘공약 3장’은 한용운이 작성했는데, 독립 선언의 의미와 방향 그리고 방법까지 일목요연하게 나열하여 독립선언서의 정수로 꼽힌다. 이 선언서를 토대로 전국 각지에서 독립선언서가 만들어졌으며 동경, 길림, 용정, 미국, 하와이, 연해주, 대만, 상해 등 해외에서도 수십여 종의 또 다른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그 가운데 현재 발견된 것은 20여 종 정도이다.


‘선언서’는 당시 보성사와 신문관에서 21,000여 매가 인쇄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수량이 적어 매우 귀중한 역사적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보성사가 인쇄한 선언서(일명 보성사판)는 첫줄에 ‘朝鮮(조선)’이 ‘鮮朝’로 잘못 인쇄되어 있고 활자체도 달라 ‘신문관판’과 구분이 가능하다. 연구소가 소장한 독립선언서도 보성사판이다. 이것은 현재 확인된 바로는 우리 연구소 외에 독립기념관, 서울역사박물관 등 기관과 독립운동가 오세창 가(家), 박종화 가에서 소장한 것까지 해서 약 7~8점만이 남아있다.


연구소는 지난 2010년 3·1절에 함경도 3·1운동 관련 일제 검찰자료와 함께 이 독립선언서를 공개했다.(민족사랑 2010년 2월호 참조) 연구소가 소장한 독립선언서는 함흥지방법원 검사로 근무하던 이시카와 노부시게(石川信重)가 함경도 일대의 3·1운동 관련자들을 기소하기 위한 준비자료 안에 접힌 채 끼어 있었다. 선언서 뒷면에 “巡査拾得ノ紙(순사가 습득한 종이)”라는 글씨가 쓰여있다. 3월말 4월 초 함경도 지역 3·1만세운동 현장에서 일제 순사가 발견하여 검사에게 제출한 것으로 보인다. 독립선언서가 2월 28일 아침부터 전국으로 배포되기 시작했는데 불과 보름 만에 전국적으로 신속하게 전파되었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사료이다.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들불같이 일어난 3·1운동은 세계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전민족적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그 상징인 독립선언서는 내용에서나 영향력에서나 우리 독립운동사의 뚜렷한 분기점이 되는 자료이다. 그 의미를 살려 작년 12월 28일 국가기록원은 독립기념관에 소장중인 3·1운동 관련 독립선언서류 48점을 국가지정기록물로 선정했다.


서울시도 2월 17일 보도자료를 통해 개인이 소장한 독립선언서(보성사판)의 등록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시는 2월 3일 문화재청에 등록 신청서를 제출한 상태다. 3·1독립선언서가 문화재로 등록되는 날이 머지않았다.


▒ 글쓴이: 민족문제연구소 강동민 자료팀장

  

(이 글은 민족문제연구소 회보 <민족사랑 2016년 3월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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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놀이판이 된 조선, 조선인-일출신문조선쌍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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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놀이판이 된 조선, 조선인
日出新聞朝鮮雙六 일출신문조선쌍육

 

 

일제가 조선을 강제병합한 후 처음 맞이한 새해 1911년 1월 1일, 교토히노데신문(京都日出新聞)은 부록으로 일출신문조선쌍육(日出新聞朝鮮雙六)을 발행했다.(쌍육은 원래 고대 이집트나 그리스·로마제국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데 이후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놀이방법은 말판이 되는 쌍육판과 말, 2개의 주사위를 가지고 일대일 또는 편을 나누어 승부를 가르는 놀이로, 지금의 보드게임과 유사하다.)

 

 

이 놀이는 장승으로 표현되는 ‘출발(ふりだし)’에서 시작하여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병합조칙’을 읽는 ‘오르기(上り)’에 도착하면 끝난다. 총 21장의 그림으로 구성되어있는데 뒷날 황실기예원(帝室技芸員, 제도 시행 이래 1944년까지 13차례 총 79명 임명)이 된 니시야마 스이쇼(西山翠 嶂), 기쿠치 케이게츠(菊池契月) 등 21명의 화가가 한 장면씩 나누어 그렸다.

 

좌측 상단의 신라의 ‘공선(貢船)’은 『일본서기』의 ‘신라가 왜에 조공선 80척을 보냈다’는 기사에서 연유한 그림이다.
고대로부터 한반도는 일본의 조공국이라는 뿌리깊은 식민사관을 보여준다. 한반도의 삼한, 즉 신라, 백제, 고구려는 번국(藩國)으로서 ‘천황’에 복속되어 조공을 바쳤다는 것이다. 허구에 지나지 않지만 이러한 내용은 일본 메이지 정부가 발행한 『사범학교일본역사』 「제15대 신공황후」라는 항목에도 그대로 실려 있다.


‘공선(貢船)’과 나란히 붙어있는 오른쪽 그림은 임진왜란에서 거둔 일본(倭)의 전과를 과시하기 위해 만든 ‘이총(耳塚)’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병사와 민간인을 가리지 말고 죽이고 여자는 물론 갓 태어난 아이까지 남기지 말고 죽여서 그 코를 베라’고 지시했고, 왜군들은 전리품으로 벤 코를 소금에 절여 교토로 보냈다. 이렇게 모은 수만명의 코를 풍국신사(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기리는 신사) 앞에 묻고 귀무덤이라 칭했다. 코무덤(鼻塚)이 아니라 귀무덤이라고 칭한 것은 ‘코베기’가 너무 잔인하여 그 잔인성을 희석시키기 위해서였다는 주장이 있다. 

 

왼쪽 그림에는 ‘긴 담뱃대(長煙管)’를 든 양반과 함께 우측에는 술에서 막 깨어난(初目醒 はつめざめ) 조선인의 모습이 보인다. 메이지 시대 전후로 신문의 삽화나 풍자만화, 니시키에(다색판화) 등을 통해 문명국이며 선진적인 일본과 야만적이며 뒤떨어진 조선을 대비하는 틀이 만들어졌다. 일본인은 제복과 제모, 그리고 근대적 장비를 갖춘 모습으로 등장하는 반면, 조선인들은 게으르고 나태하며 거의 헐벗은 모습이거나 유약한 모습이다. 특히 오른쪽 변발을 한 중국 복색의 등장인물에서는 중국과 조선의 민족성을 한꺼번에 비하하려는 저의가 드러나고 있다.

 

옆 그림 상단 중심에 보이는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병합조칙」을 읽는 「상행(上行)」에 말을 진행시키는 것이 놀이의 끝이다. ‘조선병합’은 그림 중앙에 나오는 ‘삼한정벌’의 신공황후(神功皇后), 오른쪽 관백수길(關白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 왼쪽 ‘춘묘공’(春畝公=이토 히로부미)으로 이어지는 당연한 귀결이라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대표적인 고대사 왜곡 가운데 하나인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켰을 때 ‘조선은 신공황후의 삼한정벌 이래 일본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지배할 권리가 있다’라는 조선출병의 명분으로 적극 활용되었다. 에도시대에 이어, 메이지 시대에도 이러한 인식은 지속되어 정한론의 역사적 배경으로 작용했고, 조선의 ‘병합’을 통해
일본의 조선지배가 완성된 것으로 선전했다. 이러한 고대 일본의 한반도 지배설은 식민사학의 중요한 이론적 토대를 이루었다.


한마디로 ‘일출신문조선쌍육’은 일본인에게 조선침략의 당위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세뇌하는 도구였다. 이후 일본에서는 대외팽창, 침략전쟁(조선강제병합, 만주침략,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전시생활 등)을 그림으로 묘사한 수많은 종류의 쌍육을 제작하여 일본 어린이들이 ‘놀이’를 통해 대외침략의 정당성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도록 ‘교육’하였다.


1911년 새해 첫날, 강제병합이 되자마자 한갓 유희의 대상으로 전락한 조선과 조선인을 생각하면 씁쓸함과 분노만이 남게 된다. 잊지 말자! 역사를 잊으면 다시 누군가의 손에서 놀아나는 놀이판이 될지도 모른다.

 

 

▒ 글쓴이: 민족문제연구소 강동민 자료팀장

  

(이 글은 민족문제연구소 회보 <민족사랑 2016년 2월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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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첩으로 보는 간도와 만주국 실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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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첩으로 보는 간도와 만주국 풍경
                      

 

일제는 일찍부터 간도지역을 대륙침략의 교두보로서 상정, 1909년 9월 청국과 간도협약을 체결하고 일본영사관 개설과 길림과 회령을 잇는 철도 부설권을 손에 넣는다. 이후 일제는 간도를 포함한 남만주지역에 경제 진출을 꾀하고 국제적으로 배타적 이권을 승인받기 위해 힘썼다. 1931년 9월 일제는 관동군의 주도하에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북부지역을 장악하고 1932년 3월 동삼성(요동성, 길림성, 흑룡강성) 일대를 관할하는 만주국을 세운다. 만주국은 청나라 계승을 명분으로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를 집정으로 앉히고 ‘왕도낙토王道樂土와 오족협화五族協和’를 건국이념으로 내세웠지만 관동군의 조종하에 움직이던 꼭두각시 정부에 지나지 않았다. 일제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을 일으키며 파국을 향해 치닫자 만주국 또한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이번에 소개하는 자료는 1910~1940년대 간도와 만주국 상황을 담은 사진첩과 거기에서 가려뽑은 사진들이다. 자료실에 소장된 사진첩을 시대순으로 나열하면 『남만주사진첩』(滿洲日日新聞社, 1917), 『봉천명승사진첩奉天名勝寫眞帖』(奉天 山陽堂書店, 1921), 『간도사진첩』(간도 尾崎寫眞舘, 1927년 추정), 『만주국승인기념사진첩』(大阪朝日新聞社, 1932.10.5), 『간도임시파견대기념사진첩』(1933), 『대만주국사진첩』(東京堂, 1936), 『강덕8년 3월 제4회 졸업기념(앨범)』(國立新京醫科大學, 1941.12)이다.

 

이 중 특기할 만한 사진첩은 먼저  『오사카아사히신문』 1932년 10월 5일자 특집호로 낸 『만주국승인기념사진첩』이다. 만주국이 수립된 것은 1932년 3월 1일이지만 그간 리튼보고서를 둘러싼 부정적인 국제여론과 일본 내부 사정으로 인해 만주국 승인이 미뤄지다가 그해 9월 15일 관동군 사령관이자 주만전권대사인 무토 노부요시武藤信義가 신경新京(지금의 장춘)을 방문해 만주국 국무총리 정효서鄭孝胥와 「일만의정서」를 조인하고 만주국을 승인한다. 아사히신문사가 전 과정을 밀착 취재하고 만주국의 이모저모를 함께 담아 특집호를 만든 것이다. 다음으로 『간도임시파견대기념사진첩』이다. 이 사진첩은 함경북도 나남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 제19사단에서 선발된 간도임시파견대(파견대장 池田信吉 대좌)가 연길현과 혼춘현 일대에 출몰한 항일유격대를 진압하기 위해 간도로 출동하여 1932년 4월부터 1933년 7월까지 활동한 상황을 수록한 사진첩이다. 3,500여 명의 항일유격대원 토벌은 물론 현지 주민들에 대한 대민봉사활동도 기록하는 등 파견대의 활약상을 선전하는 자료이나 만주국 수립 직후 간도지역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이상 7권의 사진첩은 철저히 일본제국의 시각으로 제작되었다. 일제가 만주에 건립한 위용 있는 근대적 건축물과 철도역, 교육 및 의료 기관을 촬영하는 한편 남루한 현지 주민들의 실태도 함께 수록하여 양자를 대비시켰다. 또한 러일전쟁 등 격전지에 세워진 전적비와 현충탑, 각종 군부대와 경무시설을 빠짐없이 기록하여 애국심과 상무정신 고취에 활용하였다.

 

 

 

 

 

 

▒ 글쓴이: 민족문제연구소 박광종 선임연구원

  

(이 글은 민족문제연구소 회보 <민족사랑 2015년 12월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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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부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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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부인회

 

 

1937년 중일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1938년에 들어 ‘국가총동원’과 ‘육군특별지원병령’ 등을 공포해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효과적으로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일제의 수탈과 동원정책은 여성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조선 민중의 생활 전반에 대한 통제력을 보다 원활하게 하기 위해 여러 여성단체들을 조직하였고, 조선여성들은 각종 관제 단체에 소속되어 ‘총후보국(銃後報國)’이란 명목으로 다양한 활동을 강요당했다.

 

애국부인회 조선본부는 1911년 2월 군사원호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단체이다. 1906년 설립된 일본애국부인회 한국위원본부가 이 단체의 전신으로, 일본애국부인회 한국위원본부의 설립목적은 “황실을 중심으로 전 일본 부인의 결속된 힘으로 군사후원을 하는 것”이었다. 설립 초기에는 일제 뿐 아니라 구 한국황실이나 왕족들의 금전적 후원도 있었다. 1910년 9월에는 애국부인회 조선위원본부로 개칭되었다가 1911년 2월 다시 애국부인회 조선본부로 고쳤다. 처음에는 일본 여성이 중심이었으나 조선인 여성들도 가입시켰다.

 

 

애국부인회 활동을 선전하는 봉함엽서. 방공연습, 전승기원, 병기헌납, 국기운동, 유가족위문, 농번기탁아소 등의 일을 독려하고 있다.

 

 

애국부인회의 활동은 군사후원활동(총후인식강화운동, 군인송영접대, 위문금품 갹출醵出 수집), 군인유가족 후원(애국료愛國寮 운영, 전병사자戰病死者 조위弔慰와 위문, 국경 경비 후원), 사회사업(유유아乳幼兒 보호, 임산부 보호, 영세민교화 보호), 사회교육산업(부인애국운동, 애국자녀단, 경신敬神시설 헌납), 수양시설 운영(애국부인회 조선본부회관 건축) 등으로 크게 구별되어 나뉜다. “미성년자녀에 대한 부인보국정신의 함양과 실천에 노력”하기 위해 애국자녀단을 만들기도 했다.

 

 

회원들은 지방행정단위인 부·읍에 설치된 분회를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각 분회는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농산·축산·가공제조 판매, 노무수입, 연극·영화·강습회·매점 등의 공연 수입과 대여 등도 했다. 각 지부의 경우에는 애국기 헌납을 위해서 모금운동을 펼치거나 총회를 개최하고 특별사원 및 유공자 수여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 글쓴이: 민족문제연구소 김혜영 연구원

 

 

(이 글은 민족문제연구소 회보 <민족사랑 2015년 11월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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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홍보의 소품, 시정기념엽서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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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홍보의 소품, 시정기념엽서 시리즈

 

 

조선총독부는 1910년 이래 매년 10월 1일이면 이른바 시정기념엽서(始政記念葉書, 1920년부터는 5주년 단위)를 발행했다. 조선총독부가 출범하여 식민지 조선에 대한 통치를 처음 펼친 날이 바로 10월 1일이었으므로 이를 기념하려는 목적이었다. 화려한 색채와 다양한 디자인이 어우러진 이 고급 엽서들은 조선의 문화 유산이나 자연풍광을 비롯해 조선 각 지방의 산업 발달 또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 등을 디자인 소재로 삼았다.


‘시정기념’이란 말에 걸맞게 이 엽서들은 식민지 지배의 정당화를 넘어 총독부의 선정(善政)에 의해 미개한 조선이 비약적으로 문명개화했다고 내외에 선전하는 홍보수단 노릇을 톡톡히 했다. 실제 매년 발행된 기념엽서는 대부분 조선 전 분야가 일제에 의해 비약적으로 발달한 것처럼 묘사하거나, 낙후된 과거 모습과 일제에 의해 ‘근대화된’ 모습의 사진을 나란히 배열하여 한눈에 비교하기 쉽게 디자인되었다. 일제의 대한제국 병탄을 한국인들이 기뻐하고 환영한 것처럼 디자인한 후안무치한 엽서들도 있다. 의도적인 상징 조작과 합성을 통해 그들은 조선인의 실상과 관련이 없는 허구의 ‘낙토(樂土) 식민지’를 이미지로 창출한 것이다.


통신우편수단으로 각광을 받던 이 엽서를 상용하면서 조선인들은 알게 모르게 일제의 지배이데올로기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시정기념엽서는 통신수단이라는 본연의 기능보다는 제국의 홍보수단이자 민족적 자각과 저항을 잠재우려는 ‘움직이는 마취제’로서 기능했다고 할 수 있다.

 

 

 

 

 

 

▒ 글쓴이: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교육홍보실장

 

 

(이 글은 민족문제연구소 회보 <민족사랑 2015년 10월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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