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에 해당되는 글 59건

  1. 2013.02.08 이웃 할아버지 같으셨던, 일제강점기 마지막 의사 고 조문기 선생을 추모하며 (1)
  2. 2013.01.14 自畵像_벼락이 떨어져도 나는 내 서재를 뜰 수가 없다 (3)
  3. 2013.01.02 백년전쟁에 관한 바깥소식과 안소식 (10)
  4. 2012.12.27 노근리평화상 상금 전액을 시민역사관 건립기금으로 쾌척_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2)
  5. 2012.12.05 박정희 혈서기사가 조작이라구요? - 종북놀음과 박정희 혈서 (1) (3)
  6. 2012.12.05 박정희 혈서기사가 조작이라구요? - 종북놀음과 박정희 혈서(2) (10)
  7. 2012.12.05 다카키 마사오, 민족문제연구소에 문의가 많아 간략히 정리해드리겠습니다. (27)
  8. 2012.09.03 꼭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_ 친일인명사전 앱 (10)
  9. 2012.08.23 민주 사회가 지탱되는 기본원리가 무너졌다
  10. 2012.07.30 유신40년 기획강좌, 끝나지 않은 유신

이웃 할아버지 같으셨던, 일제강점기 마지막 의사 고 조문기 선생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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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국지사 고 조문기 선생님

2008년 그해 설을 이틀 앞둔 2월 5일,

설 쇨 마음에 조금은 들떠있던 연구소 식구들에게 비보가 전해졌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님이신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님의 별세 소식이 그것이었습니다.

 

조문기 선생은 1991년 연구소 출범과 함께 "친일청산은 바로 오늘의 독립운동이다"라는 신념으로 투신하여 1999년 민족문제연구소 2대 이사장에 취임하셨고,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친일청산을 위해 온힘을 쏟으셨습니다. 

  

국가가 개최하는 3·1절이나 8·15 광복절 행사에 참석하기보다 진정한 조국독립을 위해 거리의 투쟁을 선택하셨던 선생의 마지막 소원은 '친일인명사전' 편찬이었지만, 끝내 보지 못하고 향년 82세의 나이로 별세하셨습니다.

 

 

▲ 조문기 선생의 노제가 선생의 의열투쟁 현장인 옛 경성부민관(현 서울시의회 본관)에서 거행되었다. ▲ 조문기 선생의 마지막 소원인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된 후에 선생의 묘역에서 헌정식을 가졌다.

 

조문기 선생님은 일제강점기인 1945년 7월 24일 마지막 의열투쟁으로 널리 알려진 “부민관 폭파 의거”의 주역이셨습니다. 해방 후에도 선생은 조국의 완전한 독립과 통일을 위한 투쟁을 중단하지 않으셨지만, 너무도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을 하시고도 몇 차례의 투옥과 고문, 옥고를 고스란히 치르셔야만 했습니다. 선생이 “죽으면 선배선열들에게 보고할 것이다. 죽는 날까지 독립투쟁을 하다 왔노라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던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끼는 요즘입니다.

 

▲ 부민관 폭파의거 주역들 좌로부터 강윤국, 조문기, 유만수 선생 ▲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재직 중 부민관 표석 앞의 조문기 선생

 

지난 2월 5일 독립투사 고 조문기 선생의 5주기 추모식이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역사정의실현과 조국통일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고인의 뜻을 기리며 짧은 글로 다 설명할 수 없지만, 오늘에 가슴깊이 되새기고 싶은 선생의 삶을 소개한 글을 아래에 싣습니다.

 

▲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 5주기 추모식 현장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이 2008년 3월 <민족21>에 기고한 글입니다.

 

 

“죽으면 선배선열들에게 보고할 것이다. 죽는 날까지 독립투쟁을 하다 왔노라고”

 

 

   당산(堂山) 조문기(趙文紀, 1926∼2008)!

일제강점기에는 항일투쟁으로, 해방 후에는 친일파 청산과 통일운동으로 일관한 불굴의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이 2008년 2월 5일 기어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선생은 떠났지만 82년 생애, 그 풍운의 세월은 고스란히 남았다.

 

 

“나는 너무 오래 살아 욕되다. 구차하게 오래 살고 싶지도 않다.”

늘 이렇게 되뇌던 그였다. 그러나 또 민족문제연구소가 추진하고 있는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고대하면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요즘은 더 살고 싶어진다. 친일인명사전이 나오는 것이라도 보고 죽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불과 6개월 남기고 끝내 그는 가버리고 말았다.

 

   외할아버지를 통해 항일의식을 깨치다

 

선생은 1926년 경기도 화성에서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선생의 선친은 아내와 자식들을 남겨두고 늘 외지를 돌아다녔다. 술이나 도박도 할 줄 모르고 당시 유행하던 미두나 광산에도 손을 대지 않던 아버지였다. 그러나 그가 집에 들렀다 가면 땅문서는 하나씩 없어졌고 살림도 찌들어갔다. 어린 선생은 아버지가 무엇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부엌 장독 안에 감춰져 있던 ‘비(秘)’라고 붉게 도장이 찍힌 ‘조선독립소요의 진상’을 우연히 발견하고 가슴이 뛰었을 뿐이다. 남부럽지 않던 살림도 거덜이 나고 집마저 내놓아야 했던 어머니는 어린 선생을 친정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수원 외갓집에서 선생은 외할아버지를 통해 자신의 조국이 일본에게 강탈당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다. 그리고 나라 없는 백성의 치욕과 서러움을 뼈저리게 겪게 된다. 1937년 중일전쟁이 한창일 무렵 보통학교 4학년이었던 선생은 전쟁터로 떠나가는 군인들을 위해 역으로 나가 양손에 일장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러야 했다. 어린 선생은 일장기를 들고 외갓집에 돌아오다 할아버지에게 크게 야단을 맞았다. 이날 밤 대한제국의 관료를 지낸 할아버지 이조영은 선생에게 비로소 망국의 비밀을 얘기했다. 그제야 손자는 자신이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더불어 일제에 대한 크나큰 분노를 느꼈다.

 

얼마 후 선생은 친구들과 향교 정문의 태극문양을 보러 간다. 일장기가 아닌 조선의 국기, 태극기를 알려주기 위해 향교 정문에 그려져 있는 태극문양을 보러 간 것이다. 이 일이 학교에 알려져 선생은 주재소로 끌려갔고 할아버지가 각서를 쓰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나라 잃은 설움과 분노와 치욕으로 그 자리에서 죽고만 싶었”던 어린 시절, 그는 새벽길을 밟아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날의 치욕을 천 배 만 배로 갚아 주리라”고 맹서한다.

 

   선비의 도의와 무인의 의기가 결합된 의열투쟁

 

1942년 15세였던 선생은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군수공장인 일본강관주식회사에서 훈련공으로 일하던 선생은 평생의 동지 유만수 선생을 만나 친형처럼 따른다. 징용령이 실시되고 일본강관주식회사에 그대로 일하게 된 선생은 1944년 5월 유만수 선생과 모의하여 2000여 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을 이끌고 일제의 민족차별에 항의하며 대규모 파업을 일으켰다. 경찰과 헌병이 포위한 가운데 벌어진 대규모 파업 후 선생과 유만수 선생은 현장을 탈출해 잠행을 거듭한다.

 

도쿄에서 비밀활동을 하던 서상한 아래서 비밀리에 책이나 문서를 나르는 일을 거들다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선생은 단식훈련원에서 수양을 통해 혁명가로서 강인한 의지와 담력을 키웠다. 그리고 다시 암흑의 조선에 돌아왔다. 보다 더 큰 투쟁을 국내에서 전개하고 이를 기초로 중국으로 망명할 결심이었다.

 

1945년 7월 24일 일제의 말기적 광란이 극에 달한 때, 박춘금을 비롯한 친일세력은 ‘대의당(大義黨)’을 결성, 동아시아 각 국의 친일파들을 불러들여 지금의 서울시의회 별관인 부민관에서 ‘아시아민족분격대회’를 열었다. 일제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을 찬양하고, 나아가 수천 명의 조선인 민족지도자를 살해할 계획 등을 추진하기 위해 열린 동아시아 친일사냥개들의 피의 제전이었다.

 

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선생은 애국청년당을 조직하고 이 대회를 무산시키고 악질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해 다이너마이트 폭약을 구해 시한폭탄을 만들었다. 대회 당일 선생과 유만수 선생은 엄중한 일본 헌병의 감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식장 안에 시한폭탄을 설치, 폭파해 대회를 무산시켰다. 일체의 항일운동이 지하로 들어가고 명망 있는 민족지도자 상당수가 친일로 돌아선 시기, 한 달 후면 보고야 말 해방조차 예견하지 못하는 절망의 ‘경성’에서 제국 일본의 무한 번영을 노래하는 혼 없는 사냥개들의 사육제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부민관 폭파의거이다. 부민관 폭파의거는 일제 말기 국내에서 일어난 최후의 의열(義烈)투쟁으로 기록되거니와, 친일파의 격분 대회를 조선 민족의 격분의 현장으로 바꾸어 놓은 쾌거였다.

 

여기서 우리는 부민관 폭파의거 당시 선생과 유만수 선생의 행동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민족에 대한 깊은 애정과 인명 존중의 생각이 ‘테러’ 배후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당시 선생과 유만수 선생은 청중석에 폭탄을 설치하려다, 식장에 가득 찬 조선인들을 보고 차마 청중석에 폭탄을 설치하지 못했다. 일본제국주의자를 죽여야지 조선인을 죽여서야 독립운동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억압받는 자의 해방, 누구나 한번 뿐인 삶의 가치를 민족의 차원에서 지키고자, 이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헌병이 지키고 선 무대 앞까지 가 폭탄을 설치했다. 그러므로 이들의 투쟁은 통상의 테러리즘이 아니라, 선비의 도의와 무인의 의기가 결합된 의열투쟁이라 부를 수 있다.

 

해방은 도적같이 찾아 왔다. 미소 군정이 실시되면서 한반도는 분단되었고, 좌우투쟁은 격화되었다. 미군정과 이승만, 그리고 한민당 세력은 친일파를 다시 권력으로 끌어들이고 민족운동을 탄압하며 단독정부의 길로 나아갔다. 선생과 그 동지들이 꿈꾸던 해방과는 너무나 달랐다. 선생은 분연히 새로운 투쟁을 준비했다. 남북협상을 지지하고 분단을 반대하는 통일운동의 길로 나선 것이다.

 

분단정부 수립 전야인 1948년 6월 2일 밤, 선생은 ‘인민청년군’ 동지들과 서울 삼각산 6개 봉우리에 봉화를 올렸다. 이어 시내 여러 곳에서 ‘통일정부 수립하자’ ‘단일정부 수립반대’ ‘미군은 물러가라’ 라는 구호가 적힌 현수막을 일제히 내걸기 위해 하산했다. 하지만 조직원의 배신으로 체포되었고, “죽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모진 고문을 당했다. 고문의 주인공들은 일제강점기 악명 높았던 친일경찰 출신이었다. 해방된 조국에서 여전히 독립운동가는 ‘쫓기는 자’였고 친일파는 ‘쫓는 자’였다. 이것이 그가 맞이한 ‘해방’의 서곡이었다.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6·25전쟁이 나기 직전 선생은 석방되었다. 이후엔 선배 독립투사와 마찬가지로, 해방 후에도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일제 때보다 더 숨 막히는 공포와 위기 속에서, 신분을 숨기고 ‘남일성’이라는 예명으로 10년간 유랑극단 배우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나 이승만정권은 이마저 허용하지 않았다. ‘이승만대통령 암살, 정부전복음모 조작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선생은 또다시 끔직한 고문을 당했다.

 

끝내 무혐의로 석방되었지만 고문의 후유증은 평생 가시지 않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민족의 병이 깊어지듯 후유증도 악화되었다. 팔순잔치 때,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은 선생에게 지팡이를 선물로 드렸다. 임종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한 지팡이 속에 숨은 선생님의 간난고초를 어찌 다 헤아리겠는가.

 

   친일파 청산과 민족통일은 제2의 독립운동

 

선생은 말년에 쓴 자서전 《슬픈 조국의 노래》의 글머리에서 ‘나의 삶의 대부분은 민족의 역사와 끈이 닿아 있다’고 술회했다. 그렇다. 그가 부산에서 유만수 선생의 중매로 장염심 여사와 결혼한 것도 결코 개인사가 아니었다. 여사 또한 단정반대 투쟁을 하면서 당당히 역사의 길을 걷다 고초를 겪은, 마땅히 역사의 한 장에 기록되어야 할 알려지지 않은 투사였다. 두 사람의 결합은 분단을 극복하고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지향하는 민족애의 결합이었다.

 

그러기에 분단시대 그의 가족사 또한 절대 빈곤과 경찰의 감시 그리고 냉대로 점철된 시련의 연속이었다. 외동딸마저 자신들의 손으로 거둘 수 없어 여기 저기 친척 집에 맡겨야 했다. 제집 아닌 곳에서 자는 딸을 말없이 지켜보다 ‘자신 모습만큼이나 초라한 판자촌 무허가 하숙방’으로 달려가 “온 몸의 피를 말리고 점점이 살을 도려내며” 통곡과 몸부림으로 지새운 1970년 4월 18일 밤을 선생은 평생 잊지 못했다. 독립운동가에게 가난과 박해가 대물림되고 친일세력에게는 부와 영광이 이어지는 어처구니없는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선생의 그날 밤은 대한민국의 암울한 밤이기도 했다.

 

부민관 의거 동지들 또한 마찬가지 고통을 겪었다. 유만수 선생은 중랑천 다리 밑 판잣집에서 심각한 폐병을 앓았고, 강윤국 선생 또한 이십 년 이상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부민관 의거의 세 주인공 모두 떼거지가 되고 자식들은 고아가 될 운명, 그것이 독립운동의 결과였다. 누군가 이 사정을 알고 독립유공자 신청을 하라고 권유하자 왜놈 아래서 일본군 장교를 한 사람이 주는 포상은 받을 수 없다며 단호히 거부했다. 동지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선생은 두 동지의 생명과 그 가족의 최소한의 삶을 확보하기 위해 두 동지를 설득해 1977년 독립유공자로 등록했다. 그러나 자신은 끝내 포상을 신청하지 않았다. 그러다 1982년 타의에 의해 선생의 공적서가 신고되어, 그 해 8·15경축식장에서 부득이 포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를 두고 선생은 “민족과 선열 앞에 죄인이 되고 만 것”이라고 부끄러워 했다.

 

선생은 이 땅에서 독립운동가로 행세하는 이들은 세 가지 죄가 있다고 늘 말해 왔다. 남북이 분단되어 총부리를 겨누는 휴전상태인데, 끝까지 통일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우지 못했으니 그것이 첫 번째 죄요, 해방이 되었는데도 되려 친일세력이 권력을 잡았으니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 죄이며, 그런데도 독립운동가로 대접을 받고 있으니 이것이 세 번째 죄라고 통탄했다. 이래서야 죽어서 어찌 선배 선열들에게 얼굴을 들겠느냐고 한탄했다.

 

이후 선생은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제2의 독립운동’으로 정하고 실천했다. 1980년대에는 광복회 관련 활동을 했으나 광복회의 실상을 알고는 실망하여 1990년 후반 이후 그는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으로서 친일파 청산과 과거사 청산운동에 마지막 혼을 불태웠다.

 

그는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을 맡기 전부터 친일인명사전 편찬과 일제잔재 청산에 나선 민족문제연구소 식구들을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칠십 넘은 노구를 이끌고 수원에서 청량리까지 왔다. 그리고 상근자들에게 점심을 사주었다. 선생이 치른 점심값은 독립유공자 연금으로 받는 돈이었다. 그 돈을 차마 자신을 위해 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민족문제연구소의 활동은 제2의 독립운동이고 상근자들은 제2의 독립군이자 동지라며 자랑스러워했다. 그 즐거움을 위해 선생은 보통 두 시간이면 오는 거리를 지하철을 몇 번이나 내려 쉬며 십 년 이상 오갔던 것이다.

 

   “나의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선생은 “나는 3·1절과 광복절이 되면 도망 다니는 사람”이라고 말하곤 했다. 정부가 기념식 참석을 간곡하게 요청해도 그는 끝내 거부했다. 아직도 친일파가 판치는 세상에서 3·1절과 광복절은 기념일이 아니며, 자신에겐 독립투쟁의 하루 일뿐이라고 역설했다.

 

그러기에 선생은 3·1절이나 광복절이 오면 집회가 벌어지는 거리로 나섰다.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집회에 참가해서는 “우리가 제대로 투쟁해서 독립을 앞당겼더라면 이런 비극과 고통은 생기지 않았을 텐데…”라며 그들의 손을 꼭 잡았다.

 

선생은 죽을 때까지 역사교과서 속의 화석화된 애국지사가 아니라, 항상 현실 속에 발 딛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처절하게 고뇌하고 열정을 다해 실천하는 활동가로 일관했다. 항일과 반독재, 친일청산으로 이어지는 그의 투쟁은, 일신의 안녕은 물론 가족의 안위까지 위태롭게 했지만, 평생을 변함없이 진정한 자주독립국가와 조국통일을 위해 헌신한 이 시대 독립운동가의 표상이자 참 어른의 전범이었다. 그의 생전의 지론과 행동이 이를 당당하게 입증하고 있다.

 

“나에게 친일인명사전은 제2의 독립운동이며 민족사의 당면과제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머물지 않을 것이다. 친일인명사전은 일제 잔재 청산만이 아니라, 조국통일을 위한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곧 미래를, 후손을 위한 운동이다. 그러기에 나는 죽을 때까지 독립운동을 멈출 수 없다. 그러다 죽으면, 나는 선배선열들에게 보고할 것이다. 죽는 날까지 독립투쟁을 하다 왔노라고.”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2월 10일 고인에게 <국민훈장모란장>을 추서했다.

 

 

 


      다둥이카드소지자 민족문제연구소 편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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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畵像_벼락이 떨어져도 나는 내 서재를 뜰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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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지식채널ⓔ가 지난 2012년 11월 친일연구의 선구 임종국선생의 기일을 맞아 선생이 우리에게 남긴 것들을 되돌아보게 했습니다.

 

 

 

 

친일문제 연구에 평생을 바치셨던 임종국 선생이 1989년 11월 60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돌아가신 후,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결코 손에서 놓지 않았던 선생의 친일연구 업적과 유지를 이어가기 위해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는 설립되었습니다.

 

그리고 2005년 연구소는 친일청산과 역사정의실현이라는 선생의 뜻을 더욱 널리 확산시키고 이를 실천하는 후학을 격려하고자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를 만들고 <임종국상>을 제정해 2012년 11월까지 총 6회의 시상식을 가졌습니다.

 

1965년 굴욕적인 한일협정이 체결되자 우리 근현대사 왜곡의 근본 원인이 과거사 청산의 부재에 있음을 직시하고, 사실상 금기시되었던 친일문제 연구에 착수해 이듬해인 1966년 <친일문학론>을 발표해 지식인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던졌던 선생처럼, 연구소는 온갖 음해와 방해 속에서도 18년을 한결같이 오로지 사실과 진실만을 좇아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할 수 있었습니다.

 

온갖 거짓 역사가 부끄럼도 없이 판을 치는 2013년 오늘,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다시 가슴깊이 새기게 됩니다.

 

 

 

 

EBS 지식채널ⓔ <자화상>에 활용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영상다큐를 더 보고 싶으시다면 아래를 클릭해 보세요.

 

  친일연구의 선구자, 임종국

  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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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에 관한 바깥소식과 안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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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새해 첫날 <백년전쟁> 관람객이 200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이에 앞서 연구소와 관련한 기분 좋은 소식들 몇 가지도 언론에 기사화되었습니다.

 

▣ 2012년 12월 31일

  - 연합뉴스 : "역사 바로 알자"…대선 전후 민족문제硏 회원 급증

  - 뉴시스 : 박근혜 당선 전후 민족문제硏 회원 급증

  - 위키트리 : 민족문제연구소 후원 회원 '급증'

 

▣ 2013년 1월 1일

  - 한겨레 : 남영동·26년 잇는 다큐 ‘백년전쟁’ 한달만에…

 

 

한겨레 기사가 비교적 상세히 다루고 있어 아래에 소개합니다.

 

남영동·26년 잇는 다큐 ‘백년전쟁’ 한달만에…
근현대사 다큐 ‘백년전쟁’ 보셨나요? 소리없이 인기몰이
인터넷공개 한달새 193만명 관람
민족문제연, 이승만·박정희 다뤄
누리꾼들 “역사 바로세우기 실감”
한겨레
지난 11월26일 서울 종로구 낙원동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다큐멘터리 <백년전쟁> 시사회에 앞서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이 관람객들에게 인사말을 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근현대사 다큐 ‘백년전쟁’ 보셨나요? 소리없이 인기몰이
인터넷공개 한달새 193만명 관람
민족문제연, 이승만·박정희 다뤄
누리꾼들 “역사 바로세우기 실감”

이승만·박정희 두 전직 대통령의 공과를 비판적으로 조명한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이 소리없이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대선을 전후해 근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는 1일 “영상 공개 한달 만에 193만명(지난달 31일 기준)이 <백년전쟁>을 관람했다”고 밝혔다. ‘근현대사 진실찾기 프로젝트’의 하나로 민족문제연구소가 2011년부터 제작 중인 6부작 다큐 <백년전쟁>은 본편 4부와 번외편 2부로 기획됐다. 연구소는 지난해 11월26일 첫 시사회를 열어 이승만 전 대통령의 일제 강점기 행적을 다룬 본편 1부 ‘두 얼굴의 이승만’(52분)과 박정희 전 대통령 시기 경제성장의 이면을 다룬 번외편 1부 ‘프레이저 보고서-누가 한국 경제를 성장시켰는가’(40분)를 처음 공개했다.

이후 개봉관 없이 유튜브나 ‘역사정의실천 시민역사관 누리집’(http://ibuild.tistory.com) 등을 통해 영상을 무료 공개하고 있는데, 누리꾼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호응을 얻고 있다. ‘성**’라는 이름의 누리꾼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어 기쁘면서 분노가 일었다. 역사 바로 세우기의 중요성을 다시금 뼛속까지 느끼게 됐다”고 시민역사관 누리집에 감상평을 남겼다. 누리꾼 ‘aws**’도 “부모님, 누님과 같이 보았습니다. (다큐에 담긴 내용을) 처음 알았다고 하시네요”라고 적었다.

다큐 〈백년전쟁〉 포스터.
 영상을 공개한 뒤 힘을 보태는 손길도 이어지고 있다. 배우 권해효씨는 원래 여성 피디가 맡았던 ‘두 얼굴의 이승만’편 내레이션을 자청해 영상의 완성도를 높였다. “청각장애인을 위한 자막을 만들어달라”는 호소글이 누리집에 올라오자 충북 진천의 한 시민은 직접 자막을 만들어 영상 제작을 도왔다.

 다큐멘터리가 인기를 끌면서 민족문제연구소의 신규 회원도 큰 폭으로 늘었다. 지난 12월 한달 동안 새로 가입한 후원회원만 1570여명이다. 이 가운데 대선 이튿날인 20일 이후 가입한 회원이 720명에 이른다. 1991년 문을 연 이 연구소의 기존 회원이 7500명인 점을 감안하면 폭발적 반응이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은 “대선 이후 신규 가입한 회원들의 가입신청서를 보면 ‘선거 결과를 보고 역사 인식의 중요성을 절감했다’는 의견이 많았다. 논란의 역사를 누구나 이해하기 편한 방식으로 접근해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백년전쟁> 열풍을 풀이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앞으로 해방정국과 이승만 하야를 다룬 2부, 박정희 집권 시기를 다룬 3부, 전두환 정권 시기를 다룬 4부, 번외편인 프레이저 보고서 2부 등을 차례로 제작해 공개할 예정이다. 연구소 쪽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엄밀한 검증이 필요해 영상 공개 시기를 아직 결정하진 못했다”고 밝혔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백년전쟁>을 보신 분이라면 다 아실 테지만, <백년전쟁>은 철저하게 역사적 사실과 객관적 자료에 근거해 제작되었습니다. 인터넷 공개 한 달여 만에 200만 명이 관람하게 한 힘 또한 거기에서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백년전쟁> 제작팀은 총 제작기간 중 역사적 사실관계에 대한 검증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현재 공개한 <백년전쟁> 1부와 <백년전쟁 스페셜에디션> 1부가 제작되는 데에도 무려 1년여의 기간이 걸렸습니다. 게다가 제작팀인 연구소 영상팀은 총 4명의 인원이 그 1년여를 밤낮없이 제작에 몰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사실 영상팀 사무실은 다른 연구소 상근자들이 발을 들여 놓기도 꺼릴 정도의 상태를 항상 유지하고 있습니다.(상세한 묘사는 하지 않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

 

연구소는 많은 분들이 <백년전쟁> 2부와 <프레이저보고서> 2부 공개가 하루 빨리 이뤄지길 기다리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현재 제작상황을 말씀드리자면, 줄거리작업은 거의 다 진행된 상태이며 사료검토와 작품성 담보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중입니다. 앞으로 제작이 완료되고 공개되기 까지는 상당 기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렇지만 기다리고 응원해주실 거라 믿으며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또 한편으로 이런 제작팀의 열악한 상황을 직접 돕겠다는 분들이 많아 제작팀에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이미 현 제작팀에 자원봉사로 시작했다가 상근하게 된 분도 있고, 연구소에 재능후원으로 ‘동영상 촬영․제작 및 편집’ 분야를 신청해주시는 분들도 많이 늘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재능후원게시판 바로보기

 

 

이렇게 많은 성원과 응원 보내주셔서 진심으로 고맙고 감사합니다.

연구소는 여러분들의 맘 깊은 곳에 와 닿는 말씀들 가슴 깊이 새기고, 2013년 새해를 맞이하겠습니다.

 

1991년 연구소 창립 이후 오늘보다 더한 부침이 수없이 많았지만, 한결같이 믿고 응원해주시는 연구소 수천 회원님들과 음으로 양으로 지지해주시는 많은 국민들이 있어 연구소는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20여 년을 지나온 발자취처럼 연구소는 여러분들을 믿고 뚝심있게 올 한해가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역사정의를 실현하는 원년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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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평화상 상금 전액을 시민역사관 건립기금으로 쾌척_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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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국제평화재단과 노근리평화상위원회는 제5회 노근리평화상 인권상 수상자로 민족문제연구소가 사무국을 맡고 있는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를 선정, 12월 21일 시상식을 가졌습니다.

 

이날 시상식에서 노근리국제평화재단은 "보추협이 일제의 강제동원 진상과 피해자 권리 찾기를 위해 열정적으로 활동했다"며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2004년)과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희생자지원법'(2007년) 입법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습니다.

 

노근리평화상은 한국전쟁 당시 충북 영동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저질러진 피난민 학살사건을 기리기 위해 제정되었습니다. 주최 측인 노근리국제평화재단은 2008년부터 매해 세계평화와 인권신장에 기여한 개인이나 단체를 선정해 인권, 언론, 문학 3개 부문에 노근리평화상을 주고 있고, 올해는 보추협 외에 뉴스타파를 통해 공정언론보도를 솔선수범하고 있는 박중석 기자, 이근행 PD 등도 함께 시상했습니다.

 

21일 노근리평화상을 수상한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는 일제강제동원피해에 대한 진상규명과 함께 피해자 소송을 지원해 왔을 뿐만 아니라 야스쿠니신사참배 반대와 한국인합사철폐운동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있습니다.

 

보추협 대표이신 이희자 선생님은 일제강점기에 강제동원되었된 아버지께서 중국 전장에서 사망한 후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어 있다는 사실을 1997년에 밝혀 낸 이후 지금껏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합사취하, 유골반환, 손해배상청구’를 요구하는 야스쿠니신사 한국인합사철폐운동을 진행하고 계십니다.

 

한편 이희자 보추협 대표는 노근리평화상 상금 일천만원 전액을 민족문제연구소가 추진하고 있는 <역사정의실천 시민역사관> 건립기금으로 쾌척하셨습니다. 시민역사관은 친일․독재의 과거사 속 진실을 기록할 뿐만 아니라 역사왜곡에 맞섰던 수많은 이들의 과거사청산의 역사 또한 기록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을 은폐하고 진실을 호도하는 그 어떤 것에도 맞서 “인권․평화․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을 멈추지 않겠습니다.

 

올해로 68세인 이희자 대표는 “아버지 자식으로 부끄럽지 않은 딸이 되는 게 제 인생에 남은 과제고 소원입니다. 그것은 바로 제 아버지 이름을 야스쿠니 신사에서 빼는 것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자랑스러운 따님이신 이희자 대표님을 비롯한 수많은 역사 속 피해자분들과 민족문제연구소는 늘 함께 할 것이며, 시민역사관은 이분들의 분투 또한 반드시 기록할 것입니다.

 

 

 

▶ 관련기사

 

  - 한국일보 : 제5회 노근리평화상 인권상에 보추협 선정

 

[ 한국일보 2012.12.21 기사 ]
제5회 노근리평화상 인권상에 보추협 선정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권리찾기 위한 활동 평가"
  • 이희자(왼쪽) 공동대표가 21일 정구복 충북영동군수로부터 노근리평화상 인권상을 받은 뒤 나란히 서 있다.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제공
노근리국제평화재단과 노근리평화상위원회는 제5회 노근리평화상 인권상 수상자로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를 선정, 21일 시상식을 가졌다.

이날 오후 충북 영동 노근리평화공원 교육관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노근리국제평화재단은 "보추협이 일제의 강제동원 진상과 피해자 권리 찾기를 위해 열정적으로 활동했다"며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2004년)과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희생자지원법'(2007년) 입법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상을 받은 이희자 보추협 공동대표는 "사무실 유지조차 힘든 때에 이렇게 큰 상으로 격려 받아 힘이 난다"며 "5월 대법원으로부터 이끌어낸 판결이 실제 보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보추협은 5월 24일 20여년의 싸움 끝에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책임이 일본기업에 있다는 판결을 대법원으로부터 이끌어 냈다.

충북 영동에서 발생한 피란민 학살사건인 '노근리 사건'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평화재단은 2008년부터 세계평화와 인권신장에 기여한 개인이나 단체를 선정해 인권, 언론, 문학 3개 부문에 평화상을 주고 있다.

 

 

  - 연합뉴스 : '태평양전쟁 피해자 보상추진協' 노근리 평화상 수상

  - 뉴시스 : 태평양전쟁 보추협 '제5회 노근리평화상' 수상

  - 아주경제 : 제5회 노근리평화상,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 등 선정

  - 충청투데이 : 태평양전쟁 피해자 보상추진협의회 '노근리 평화상'

  - 대전일보 : 태평양전쟁 피해자 보상協 제5회 노근리 평화상 수상

 

 

 

 


      다둥이카드소지자 │ 민족문제연구소 편찬실
- 세상도, 사람도 늘 변화 · 발전함을 믿는다.
친일인명사전의 기적,역사관 건립으로 이어가겠습니다.
TEL 02-969-0226 / E-mail 
historyac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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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혈서기사가 조작이라구요? - 종북놀음과 박정희 혈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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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조세열 사무총장

 

찌라시 수준의 인쇄공해물, 종북백과사전 


지난 19일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극우논객 조갑제 씨가 펴낸 종북백과사전을 거론하며 야권의 주요 지도자들을 싸잡아 종북 정치인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이틀 뒤에는 민주통합당의 박지원 원내대표가 친일인명사전을 인용하면서 “친일?종북의 원조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고 정면으로 반박해 종북논란이 바야흐로 2라운드로 접어들고 있다. 종북백과사전 대 친일인명사전이란 몹시 마땅찮은 구도를 앞에 두고, 우선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참여했던 한사람으로서 이러다 두 책이 혹시 같은 부류로 취급받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앞섰다.




▲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 지난 19일,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극우논객 조갑제 씨가 펴낸 종북백과사전을 거론하며 야권의 주요 지도자들을 싸잡아 종북 정치인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 오마이뉴스



2009년 11월 8일 친일인명사전이 전국민적 관심 속에 발간되자, 같은 달 26일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라는 정체불명의 급조 극우단체가 친북반국가인명사전을 만들겠다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은 김대중 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이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소동을 피우는 강경극우세력들에 의해 난장판이 되고 말았지만, 그 기민한 대응과 패러디의 기발함에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날 발표한 명단에 우리 사회의 존경받는 어른들이 다수 포함되었는데, 그 때 거기에 빠진 어떤 분들은 “내가 이렇게도 한 일이 없었는가”하고 자탄해마지 않았다는 우스개 아닌 우스개도 더러 들려왔다. 명단이 발표된 뒤 전혀 소식이 없어 한갓 해프닝으로 여기고 있었더니만, 살짝 이름을 바꾼 종북백과사전이란 살벌한 느낌의 책이 나온 것을 이번에 이한구 대표의 친절한 소개가 있고서야 알게 되었다.


짐작은 했지만 책을 직접 보니 한마디로 찌라시 수준의 인쇄공해물에 불과해 2만원이란 책값도 아깝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다소 내용이 궁금하더라도 절대 사볼 필요가 없는 허접 쓰레기라는 점을 거듭 밝혀둔다. 이 책의 참고자료들은 대부분 재심에서 무죄취지로 결론이 난 사건에 대한 안기부 국정원 검찰의 공안기록이거나 자신들이 발간한 책 아니면 인터넷 기사들이다. 이 따위 책에다 함부로 백과사전이란 명칭을 붙이다니 언어를 농단해도 분수가 있어야 한다. 한 때 치밀한 채증과 예리한 분석으로 정평이 있던 조갑제 씨가 판단력마저 종북 색출에 저당잡힌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종북이라면 어감상 친북보다 죄상이 한결 무거워 보이는데, 조 씨는 종북백과사전에 전직 국무총리 둘과 대선주자들을 포함 야당 국회의원 33명을 무더기로 집어넣는 쿠데타적 사변을 일으켰다. 1952년 이승만 정권 때 국회의원 40여 명이 통근버스에 탄 채 크레인으로 헌병대에 끌려간 부산정치파동 이후 국회의원들이 단체로 이런 봉변을 당한 일은 군사정권 때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내용이 진실이라면 나라의 명운이 가히 적화통일 직전의 백척간두에 서있다고 할 만하다. 검찰은 직무유기라는 비난을 듣기 전에 미적거리지 말고 조 씨를 소환하여 사실관계를 알아봐야 한다. 조사결과 관련자들이 혹 국가보안법에 저촉되었다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정하게 처벌해야 하며, 반대의 경우에는 유언비어유포죄나 어떠한 형태로든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아 그런데 박정희 정권이 긴급조치 때 만든 유언비어유포죄는 없어졌나 보네요. 뭐 다른 죄목 없나요.)


어느 나라에서나 극우인물들의 언행이 선동적이고 과격하다 하지만 상궤를 벗어나는 것도 정도가 있을 것이다. 특히 집권여당의 원내대표가 쪽박부터 깨는 이런 식의 행태를 보인다면 도대체 의회정치의 기본인 대화와 타협이 무슨 수로 가능하겠는가.



종북 공격이 잇따르고 있는 까닭



▲ 유신 40년 "식민의 유산, 유신의 그늘" 유신 40년이 되는 이 해, 유신의 망령이 우리의 머리 위를 배회하고 있다.민족문제연구소는 박정희체제와 박정희주의의 완전한 극복을 위해 '박정희 유신"의 모든 것을 담은 전시회를 진행 중이다. ⓒ 민족문제연구소



이렇게 상식을 벗어난 종북 공격이 잇따르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바로 ‘본원’이 박근혜 의원이기 때문이다. 말 수 적은 그가 단호하게 ‘자유’와 ‘국가관’ 검증을 언급했을 때 화살은 시위를 떠난 것이라 봐야한다. 이미 사당화한 새누리당 내외의 ‘종박세력’은 그 뜻을 충실히 받드는 외에 달리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많은 국민들이 유신시대를 떠올리면서 공포스런 데쟈부를 경험하고 있다.


유신 40년이 되는 이 해, 냉전시대로 끝없이 후진하는 대한민국의 정치현실을 지켜보면서 박정희체제와 박정희주의의 완전한 극복 없이는 민주주의란 헛말임을 실감하게 된다. 21세기 대명천지에 시대착오적인 매카시즘 논란이 어찌된 노릇인가. 종북 놀음의 재미가 쏠쏠하겠지만 반드시 대선에 유리할지도 의문이며, 후과에 대한 책임도 결코 적지는 않을 것임을 단언한다.


유신의 망령이 우리의 머리 위를 배회하고 있는 이 시점에, 친일인명사전은 편찬자들의 의도와 전혀 무관하게 역사전쟁이 아닌 이념전쟁의 전면에 놓이게 되었다. ‘박정희 친일?종북 원조론’은 사실 박정희 전대통령 추종세력에겐 역린을 건드린 것과 진배없는 불경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박정희주의자들은 특이하게도 종북 부분보다 친일에 더 격분하고 과민반응을 보여 왔다. 남로당원 경력은 동료들을 밀고한 것으로 대속하였다고 생각하는지 또는 가혹한 사상탄압으로 상쇄되었다고 보는 것인지는 그 속을 알 수 없다.


어쨌든 친일문제는 다퉈볼 여지가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래서 불똥은 이제 친일인명사전으로 옮겨붙었다. 각종 매체와 SNS를 통해 유포되고 있던 근거 없는 반론들이 자가발전을 통해 재구성되고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한결같은 목표는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는 데 있다.


먼저 그들이 보아도 치명적인 친일의 증거이면서 치욕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지원혈서는 무조건 조작이라고 떼를 쓴다. 다음으로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주체가 빨갱이라고 몰아붙인다. 그리고 모든 과정이 정치적 의도 아래 이루어졌다고 덮어씌운다. 모두 합리적인 반론이라기보다 막무가내식 들이대기에 가까운 주장이긴 하지만, 여론을 호도할 우려가 있어 부득이 한 마디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 중에서도 혈서조작설은 친일인명사전의 권위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고 있다. 특히 인터넷에는 조작설로 도배가 되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그레샴의 법칙이 그대로 작동되고 있다. 진실은 덮이고 억지 주장만 난무하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자료실 고양이 │ 민족문제연구소 자료실
못난 조상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친일인명사전의 기적,역사관 건립으로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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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혈서기사가 조작이라구요? - 종북놀음과 박정희 혈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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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조세열 사무총장


박정희 혈서기사 발굴의 일등공로자, 조갑제




▲ 일본국회도서관 소장 만주신문 마이크로 필름 ⓒ 민족문제연구소


▲ 일본국회도서관의 마이크로필름 판독기에 나온 만주신문의 혈서지원 기사 ⓒ 민족문제연구소


그들이 그렇게도 조작이라고 믿고 싶은 박정희 혈서가 실린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 원본은 현재 일본 국회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일반인은 마이크로필름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출력도 가능하다(『滿洲新聞』 康德 六年(昭和 十四年) 三月 三十一日, 日本 國會圖書館 所藏 마이크로필름). 이조차 일본이 박정희를 음해하기 위해 조작된 자료를 보관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정신분석학적 처방 외에 달리 방도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박정희 혈서 발굴의 일등 공로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조갑제 씨다. 그는 자신의 저작인 『박정희』(1992, 까치)에서 박정희가 군관학교에 지원하기 위해 혈서를 쓴 사실을 처음 언급하여 발굴추적의 물꼬를 텄다. 그러나 박정희 연구자들의 끈질긴 조사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증거자료는 찾을 수가 없었다. 민족문제연구소도 친일인명사전 집필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2009년 10월에 가서야 가까스로 관련 자료를 입수할 수 있었다. 증언만 있었을 뿐 확실한 증거가 발굴되지 않아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지 못할 뻔했던 엄청난 내용들이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 우리들은 예나 지금이나 “마지막 순간에 순국선열들의 보살핌이 있었음이 틀림없다”고 여기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당초 발굴한 혈서기사에 관한 보도자료를 따로 내지 않기로 의견을 모았었다. 혈서 자체도 충격이거니와 ‘조국(일본)을 위해 일사봉공(一死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하겠다’는 등 편지 내용이 워낙 엽기적이라 톱뉴스가 되고도 넘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정치쟁점화를 피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연구소가 방침을 바꿔 자료 공개를 결정하게 된 데는 박 전대통령의 아들 박지만 씨의 도발이 크게 작용했다. 그는 2009년 10월 28일 일차적으로 게재금지가처분신청을 낸 뒤, 11월 8일로 예정되어 있던 발간보고회 직전인 11월 4일 기습적으로 법원에 배포금지를 추가 신청했다. 사실상 친일인명사전을 금서로 만들려는 악의적인 시도였다. 거기에다 박정희 지지자들의 위협도 날이 갈수록 심해져 갔다. 연구소는 결정적인 증거자료 공개만이 유일한 대응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11월 5일 즉각 보도자료를 배포하게 된 것이다.



박정희가 일본군으로 복무한 적이 없다고요?


이밖에 박정희가 만주군 장교이지 일본군으로 복무한 적이 없다는 주장도 친일인명사전이 허위사실에 기초하고 있다는 모함 중 하나이다. 이에 대해서도 연구소는 확고한 반증을 가지고 있음을 밝혀둔다.(『舊時陸軍軍人(軍屬)屆』, 昭和 二十年 三月 一日.)



▲ 박정희가 일본군 예비역 소위임을 입증하는 공문서 ⓒ 민족문제연구소



만주국은 일제의 괴뢰국이며 만주군은 일본 관동군의 통제를 받았고 일본군 현역 장교가 직접 지휘하는 경우도 많았다. 뿐만 아니라 박정희는 일본 육사를 졸업한 엄연한 일본군 예비역 소위이며, 관동군에서 복무한 시기도 있었다.


또 박정희가 대적한 팔로군은 중공군이므로 공비토벌이지 항일세력 탄압이 아니라는 유치한 발상도 연구소를 공격하는 단골 메뉴로 등장하고 있다. 팔로군도 항일부대이며 중국 소련에 대한 적대행위는 당시로서는 연합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상식 수준의 이해도 하지 못하는 억설이라 치부하겠다. 특히 다수의 조선 청년들이 항일을 위해 팔로군에 복무하고 있었던 사정을 감안하면 이런 궤변은 더더욱 삼가야 마땅하다.


중위를 단순하게 하급장교 정도로 간주하는 ‘대범함’도 당시의 사정에 비추어 볼 때 지나치게 관대한 시각이다. 당시의 위관급 장교는 지금과 달리 군이 절대적 우위에 있던 파시즘 국가의 고등관으로서 군수나 경찰서장도 쩔쩔맬 정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출세욕에 불탄 박정희가 연령 제한에 걸리고도 혈서까지 써가며 거듭 군관을 지원했던 이유의 하나이다. 참고로 일제 35년간을 통틀어 자발적으로 일본제국의 장교된 자는 일본육사와 만주군관학교 출신을 포함 170여명에 지나지 않는다. 식민지 출신으로서는 드물게 간택받은 존재들이었던 셈이다.


무엇보다도 대일선전포고를 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 박정희는 바로 적국의 장교다. 비록 착수 전에 해방이 되긴 했지만 만약 광복군의 국내진공작전이 개시되었다면, 박정희는 그토록 꺼려했던 장준하처럼 사선을 넘어 광복군에 입대한 상당수의 일본군 출신 애국자들과 전장에서 만나는 운명이 되었을지도 알 수 없다.


박정희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대우와 존경을 받고 안정적인 직업이었던 교직을 버리고 군관의 길을 선택하였다. 강요에 의한 입대도 아니었으며 생계나 생존이 위협받는 불가피한 상황도 아니었다. 목적이 출세였든 영웅심의 발로였든 간에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부일협력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사실과 정황이 이를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이다.


논쟁에도 규칙이 있고 예의가 있다. 


▲ 친일인명사전 친일인명사전은 각 분야 교수 학자 180여명이 참여하여 3,000여종에 이르는 방대한 증거자료에 의거 객관적으로 집필한, 한국근현대 최대최고의 인물사전으로 평가받고 있는 역사적 학문적 성과물이다 ⓒ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의 구성원과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한 이들을 빨갱이로 모는 야비한 공격은 일찍부터 있어왔다. 자신들의 견해와 다르면 4대강 반대도 파업도 무상급식도 모두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고삐 풀린 극우세력의 방약무인함을 보면서 동시에 냉전의 끝자락을 붙잡고 유지해 온 그들의 기득권도 이제 소멸의 때가 왔음을 예감하게 된다. 도대체 합리성이라곤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집단들이기 때문이다.


친일인명사전은 각 분야 교수 학자 180여명이 참여하여 3,000여종에 이르는 방대한 증거자료에 의거 객관적으로 집필한, 한국근현대 최대최고의 인물사전으로 평가받고 있는 역사적 학문적 성과물이다. 지난 4월 13일 만주국 사무관을 지낸 박정희의 동서 홍순일의 후손이 제기한 서적복제배포금지소송이 대법원에서 기각됨으로써 3년간에 걸친 기나긴 소송도 끝이 났다. 사법부는 박정희를 포함한 5건의 관련 소송에서 모두 연구소 승소로 판결했다. 일관되게 친일인명사전의 공공성 객관성 엄밀성을 인정한 것이다.


친일인명사전은 민족 내부의 자성이 담긴 과거사에 대한 최소한의 학문적 정화과정의 결과물이다. 왜 친일인명사전을 정치의 이름으로 오염시키려 하는가.


민족문제연구소는 1991년 발족 때부터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목적사업으로 추진해 왔다. 당시 박근혜 의원은 정계에 입문하기도 전이었다.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20여 년간 시쳇말로 영양가 없는 작업을 해왔다는 언설이 가당하기나 한가. 도대체 무슨 정치적 목적이 있단 말인가. 이는 친일인명사전 편찬과정에서 나타난 압도적인 국민적 지지와 관계자들의 헌신을 모독하는 횡포일 뿐이다.


이미 객관적인 증거도 제시되었고 최종 판결까지 내려졌다. 논쟁에도 나름의 규칙이 있고 예의가 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내세울 것이 있으면 내세우자. 역사 앞에 성역은 없고 인물에 대한 비판에 금기가 있을 수 없다. 언제까지 박정희신화에 얽매여 그를 맹목적인 숭배의 대상으로 삼을 셈인가. 박정희를 극복하고 나아가지 못하는 한 한국사회에 미래는 없다. 장담하거니와 보수세력 그대들도 여기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주신문 기사 번역문


▲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 7면 전문 ⓒ 민족문제연구소

만주신문 기사 번역문


혈서(血書) 군관지원 - 반도의 젊은 훈도(訓導)로부터


29일 치안부(治安部)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訓導)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고 피로 쓴 반지(半紙)가 봉입(封入)된 등기로 송부되어 관계자(係員)를 깊이 감격시켰다. 동봉된 편지에는


(전략)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일반적인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송구하지만 무리가 있더라도 아무쪼록 국군(만주국군-편집자 주)에 채용시켜 주실 수 없겠습니까. (중략)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중략)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 : 편집자 주)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후략)


라고 펜으로 쓴 달필로 보이는 동군(同君)의 군관지원 편지는 이것으로 두 번째이지만 군관이 되기에는 군적에 있는 자로 한정되어 있고 군관학교에 들어가기에는 자격 연령 16세 이상 19세이기 때문에 23세로는 나이가 너무 많아 동군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중히 사절하게 되었다.


(『만주신문』 1939.3.31.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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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키 마사오, 민족문제연구소에 문의가 많아 간략히 정리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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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4일) 저녁 대선토론에서 나온 ‘충성혈서를 써서 일본군 장교가 된 다카키 마사오. 한국 이름 박정희. 친일과 독재의 후예’라는 이정희 후보의 발언 때문인지 오늘 연구소로 문의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간 연구소가 조사하고 축적한 내용들을 간략히 정리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 발간 친일인명사전, 2권 106~107쪽 박정희 항목 부분

 

 

친일인명사전앱 '박정희' 검색화면

 

 

친일인명사전에는 4,389명 친일인사 중 1인으로 박정희의 출생부터 사망까지의 주요행적과 일제강점기의 상세한 친일행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올해 총 3권 1질의 방대한 사전분량을 스마트폰 안에 쏙 넣을 수 있게 ‘친일인명사전앱’을 출시해 큰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2009년 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을 내놓기 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씨는 법원에 자신의 아버지와 관한 사전 게재금지가처분신청을 제출했습니다. 하지만 사전 발간예정일을 이틀 앞둔 11월 6일 법원에서 이 신청은 기각되었고, 8일 사전 발간보고대회는 예정대로 치를 수 있었습니다.

 

 

『만주신문』1939년 3월 31일

 

이런 과정을 거쳐 친일인명사전이 공개되었음에도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는 분들이 있었고, 특히나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만주군 혈서 지원과 관련해서는 연구소의 조작이라는 말까지 돌았습니다. 역사 연구자들의 철저한 검증과 법원의 판단이 있었음에도 말이지요.

 

다시 한 번 확인하시지요.

 

 

 

 

이상의 사실은 미하원 외교위원회에 제출된 한미관계조사보고서인 ‘프레이저 보고서’에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프레이저 보고서가 담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잘 알려지지 않은 실상은 연구소제작 역사다큐 “백년전쟁”의 스페셜에디션 <프레이저보고서 - 누가 한국경제를 성장시켰는가>를 보시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역사다큐 "백년전쟁" 스페셜에디션

<프레이저보고서 - 누가 한국경제를 성장시켰는가> 관람하러 가

 

 

또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일제강점기 교사 또는 일본제국 군인으로 체득한 식민의 유산은 5.16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서서히 외화되어 마침내 이 땅 민주주의에 조종을 울리며 끔찍한 암흑의 역사, 유신시대를 만들어 냈습니다. 

 

연구소는 올해 10월유신 선포 40년을 맞아 유신독재의 본질을 조명하는 특별전시 “식민의 유산, 유신의 추억”전을 개최했습니다. 의미심장하게도 서대문형무소 옥사에서 개막전을 진행한 이후로 창원, 부산, 광주, 대구 등 대도시에서 순회전시를 개최했을 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소규모 야외 전시를 무려 5개월 여 동안 진행해 오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식민의 유산, 유신의 추억> 특별전 전면소개. 위 내용은 전시도록에 더 상세히 실렸습니다.

 

 

 

 

어떻습니까, 이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에 대한 정리가 좀 되시는지요?

 

이상의 주요내용들은 유신40년 특별전시도록 [식민의 유산, 유신의 추억]에 각종 이미지들과 함께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도록에 관한 문의는 민족문제연구소 전화 02-969-0226 으로 해주십시오.

 

 

<식민의 유산, 유신의 추억> 특별전 전시도록 표지

 

 

<식민의 유산, 유신의 추억> 전시도록 6~7쪽, '친일인명사전으로 본 박정희' 중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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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_ 친일인명사전 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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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가 와해된 지 60년, 민족문제연구소 출범 18년 만인 2009년 11월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은 국민이 만들어 주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전 발간은 연구소의 18년을 한결같이 지켜주고 함께 해주신 7,000여 회원이, 2004년 국회(한나라당)의 사전편찬 기초조사예산 전액 삭감에 분노해 단 11일 만에 삭감액 5억 전부를 모아주신 3만 여 국민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 때 연구소는 그 감동을 고스란히 안고, 친일인명사전을 반드시 발간해 국민에게 돌려드리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이제 그 때의 대국민 약속을 지키고 전국민적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102년 국치일 8월 29일에 친일인명사전 앱을 출시했습니다. 

 

연구소는 그간 친일인명사전의 대중적 보급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해왔습니다. 특히 정가 30만원인 고가의 사전이기에 여러 사람이 폭넓게 접할 수 있는 공공도서관이나 학교 보급에 특히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며 사전 구입을 꺼려하는 경우가 태반이었습니다.




그래서 만들어야 했습니다. 친일인명사전 앱은 친일인사 4,389명이 수록된 전3권 총 3,00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사전을 고스란히 담았습니다. 고가라서 개인이 구매하기 어려웠고 공공도서관 등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기 때문에, “내 손안”에서 찾아보기 쉽게 함으로써 사전을 보다 간편하게 보고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내 손안의 친일인명사전!” 이제 스마트폰만 있으면 거리나 지하철, 그 어디서나 친일인명 검색이 가능하고, 인명 외에도 분야별·지역별·출생연대별 등 다양한 영역별 검색이 가능해 훨씬 편리하게 활용도 가능한 것이 큰 장점입니다.

 

연구소는 당초 무료이용을 검토했으나 개발비용과 종이책 보급 등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하여 부득이 앱 가격을 1만원으로 책정했습니다. 그리고 수수료와 세금 등 경비를 제외한 수익금 전액(건당 약 5천원)은 현재 추진하고 있는 시민역사관 건립 기금으로 적립할 예정이다.

 

시민역사관은, 일제 식민지배가 근대화의 기초라느니 5.16군사쿠데타가 근대화혁명이라느니 하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는 과거 친일독재세력의 역사바꿔치기로부터 시민의 힘으로 지켜온 진실한 역사를 오롯이 담을 것입니다. 오로지 객관적인 사료에 근거해 엄정하게 기록한 친일인명사전의 발간에도 불구하고, 더더욱 역사왜곡에 골몰하는 이들로부터 더욱 강고하게 역사정의를 지켜내 미래세대에 전달할 시민역사관 또한 반드시 세워내겠습니다.


 


- 현재 내려받기는 안드로이드폰(구글)에서만 가능하며, 애플용은 승인과정에서 예기치 않은 문제가 발생해 9월말 출시됩니다.

- 포털(다음, 네이버) 검색창에서 "친일인명사전 앱"을 검색하셔도 쉽게 구매사이트에 접근하실 수 있습니다.


 

 안드로이드용 친일인명사전 앱 다운로드 바로가기

      https://play.google.com/store/apps/details?id=com.minjok.pjdic

      (안드로이드는 아이폰·아이패드를 제외하고 국내에 출시된 스마트폰·스마트기기 대부분이 해당됩니다.)


 

  좀 더 자세한 안내를 원하신다면 아래 바로가기를 클릭해 보세요~ 

     구매안내  /  사용설명서  /  문의 및 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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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 사회가 지탱되는 기본원리가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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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김민철

이명박 정권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마치 수학 공식처럼 정권 말기면 드러나는 비리가 이 정권이라고 예외 없이 적용되고 있다. 그 비리의 결정판은 역시 세간에서 ‘상왕’으로 불리던 대통령의 형 이상득 씨의 구속이다. 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망나니마냥 수행하던 검찰이 이제 그 칼끝을 돌려 현 권력 심장부를 깊숙하게 찌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권력 무상의 씁쓸함을 느끼기에 앞서 완장들의 본질을 보는 같아 인간에 대한 환멸까지 느낄 지경이다.

이명박 정권의 대차대조표는 곧 나올 것이다. 이념적인 선호에 따라 그 평가가 매우 다르게 나올 수밖에 없겠지만, 그 점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낙제점을 면하기에는 어려울 것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세력이 정권을 잡음으로써 그동안 한국 사회가 성취했던 자유와 민주주의의 수준이 다소 퇴보할 것이라고는 모두들 예상했다. 그러나 그 퇴보는 상상을 훨씬 뛰어넘어 어디서부터 어떻게 진단하고 대처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전방위적이었다. 몇 가지의 목록만 열거해 보자.

정부의 신뢰도를 잃게 만든 광우병 파동, 사회의 갈등을 힘으로만 밀어붙여 해결하려다 빚어낸 용산 참사와 이후의 무대책, 아무런 전망도 제시하지 못한 채 한반도의 긴장만 악화시킨 반북정책의 지속과 그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천안함 사건, 환경재앙에 가까운 4대강 사업의 강행, 역대 정권 중 ‘가장 깨끗한 정권’이라고 자부한 대통령의 친인척과 측근들의 잇따른 비리와 구속, 특정 집단에 이익을 주기 위해 밀어붙인 종합편성채널(종편) 사태, 자유로운 비판을 봉쇄하기 위해 국가권력을 남용한 미네르바 사건, 언론을 장악하기 위해 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 언론사 사장을 몰아낸 사건, 한국의 경제구조를 미국의 요구에 맞게 만들기 위한 한미FTA 체결 강행, 독재정권 하에서나 있었던 국가권력을 불법적으로 동원한 민간인 사찰, 그간의 사회적 합의를 토대로 마련한 교과개정의 전면 부정과 역사교과서의 수정 강요(이른바 금성교과서 사건), 편법으로 체결하려다 해프닝으로 끝난 한일군사정보협정 체결 시도 등등.

목록을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쁠 지경이다. 큰 사건이 터지면, 그것을 수습하기도 전에 다른 더 큰 사건이 터져 앞의 문제가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리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문제를 해결할 능력은커녕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인식할 능력이 있는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상황은 심각하다. 왜 이런 현상들이 지속되고 있을까. 합리성의 결여와 비민주성 등 다양한 해석과 진단이 가능하겠지만, 두 가지 공통적인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정책의 공공성이 너무 심하게 훼손되었다는 점이다. 공적 이익보다는 특정 집단의 사적 이익이 정책을 주도했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이다. 공적 이익이라는 것도 실상은 사적 이익들간의 집단적 조정을 통해 나오는 것이겠지만, 그 조정이 너무 편향적이고 일방적이어서 롤스의 지적처럼 내용과 절차 모두에서 정의롭지 못한 정책이 양산된 것이다.

한국의 지배세력은 경제성장이라는 미명 아래 오랫동안 많은 특권을 누려왔다. 그 특권이 너무 오래되고 일상화되어 특권이 아니라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여겨 왔다. 다만 그 특권이 정치적 민주화로 인해 부분적으로 견제 받고 침해 받자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잃어버린 10년’을 외치며 정권 탈환에 절치부심했던 심리적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그 이전과 차이가 있다면, 정치권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졌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아니 독재정권 하에서는 꿈도 꾸지 못했던 정치권력까지 장악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즉 민주화 이후 독재권력으로부터 통제당하던 상황이 사라지면서 재벌을 비롯한 특권세력의 발언권이 커져, 이제는 경제권력이 정치권력을 조정하는 형국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해석도 설득력을 갖고 있다. 어찌 보면 민주화의 수혜를 가장 많이 받은 집단이 특권세력이라는 역설도 성립한다.

문제의 심각성은 이 특권을 되찾는 과정에서 사회적 합의에 기초하여 만들어놓은 규칙을 너무 쉽게 바꾼 것에 있다. 두 번째의 공통된 현상이면서 매우 위험한 현상이기도 하다. 자신들이 권력을 잡았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경기장의 규칙을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만듦으로써 사회의 운영원리를 심각하게 훼손시키는 결과를 양산한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역사 교과서의 내용을 뜯어고친 사건이다.

이른바 뉴라이트들이 기존 역사교과서를 좌편향적이며 자학사관이라 비판하자, 이명박정권은 수년에 걸쳐 교과서를 뜯어고치는 일을 강행했다. 어떤 의미에서 교과서는 한 사회가 갖고 있는 공통적인 도덕감각과 표준적인 지적 수준, 가치를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정권에 따라 이리저리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인식이야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겠지만 민주 사회에서 국민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유아적 발상이거나 독재적 발상이 아니면 가능하지 않은 일을 태연하게 저지른 것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사교과서가 바뀐다고 상상해 보라. 얼마나 끔찍한가. 교과서 사건의 심각성은 역사인식의 차이가 아니라 사회를 바라보는 태도에 있다. 사회가 운영되는 기본 원리를 흔들어놓은 것이다.

최근에 벌어진 수자원공사의 고소 사건도 같은 맥락에서 위험하다. 4대강 사업을 비판한 박창근 관동대 교수를 수자원공사가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경찰에 고소한 일은 경기의 룰을 무시하는 폭력과 다름없다. 국가권력의 정치적 행위를 비판하는 일에 사법적 잣대를 들이대어 비판자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것인데, 매우 위험한 발상이거나 바보이거나 둘 중 하나에 해당한다. 만약, 이번 고소 사태가 성립한다면, 국가권력이 잘못된 정치적 판단을 가지고 실행한 행위로 빚어진 결과에 대해 당사자에게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반대논리도 성립된다.

이렇게 되면 모든 국가 행위가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는 소송 사태가 벌어지게 되고, 행정부는 준비서면 쓰느라 마비상태에 이를 것이다. 다행히도 현실 세계는 정치적 행위와 사법적 행위라는 서로 다른 운영원리가 작동하기 때문에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수자원공사가 이를 무시하고 소송을 진행했다. 완장들의 충성 경쟁으로만 치부하기에 앞서 자신들이 무슨 죄를 저지르고 있는지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무지함이 더 걱정이다.

사회의 운영원리 자체를 훼손하거나 자신들 마음대로 운영하겠는 식의 생각이 배경에 깔려있지 않으면 상식적으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을 벌여놓은 것이다. 그것도 백주 대낮에. 만일 이게 아니라면 순전한 엄포용이다. 마치 미네르바 사건처럼 정권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합법을 가장한 폭력을 행사한 것이다.

어느 쪽이든 민주 사회가 지탱되는 기본원리가 무너졌다. (국내 유일 과거사 청산 관련 전문잡지 "역사와 책임" 3호 권두언에서)

민족문제연구소 발간도서 자세히 보기 ▶ "히스토리 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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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40년 기획강좌, 끝나지 않은 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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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유신체제가 들어선지 40년 입니다. 40년이 지나가고 있지만 아직도 사회 곳곳에는 박정희와 유신의 모습들이 남아있습니다. 새누리당의 가장 유력한 대선후보자가 박근혜의원이니 두말할 나위 없지요. 


이 문제들은 단순히 '박정희의 딸'이 대선후보에 나왔다는 문제만이 아닙니다. 요사이 언론에는 '역사논쟁은 그만두고 민생을 이야기 하자' 발언이라던가, '5.16'에 관련된 발언들이 연일 보도 되고 있습니다.


이 발언들을 둘러싼 논쟁들을 나라의 권력을 잡을 집단의 역사인식과 가치관이라는데 문제가 있겠지요. 40년이 지난 유신, 그리고 유신을 둘러싼 논의들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식민지 시대 청산하지 못한 과거가 유신시대에 어떻게 되살아 났고, 지금 어떻게 다시 이야기 되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기획강좌를 개최합니다. 


많은 참석 바랍니다.


끝나지 않은 유신 매주 화, 목 7시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강의실


1강 08/23(목) 식민의 유산과 10월 유신 :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2강 08/28(화) 종신집권으로 가는 길, 유신 : 김재홍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3강 08/30(목) 한강의 기적, 그 주인공을 묻는다 :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4강 09/04(화) 유신독재에 맞선 사람들 : 서중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5강 09/06(목) 금지곡으로 본 유신시대 : 이영미 문화평론가


6강 09/11(화) 끝없는 예외상태, 일상을 감시하다 : 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7강 09/13(목) 끝나지 않는 유신, 1972 그 후 40년 :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인원 : 50명 선착순 마감,

수강료 : 3만원

문의 및 접수 : 전화 02-969-0226 이메일 historia@paran.com

입금계좌 우리은행 132-126568-13-201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



*특별전시 식민의 유산 유신의 추억 8//~9/15 형무소 역사관 12옥사

*금지곡콘서트 8/25, 9/8 5시 형무소 12옥사 및 마당

*특별전시개막과 함께하는 금지곡 콘서트 8/8 5시~7시 형무소 12옥사 및 마당

*특별전시해설과 함께하는 서대문형무소 답사 8/25 9/8 4시 형무소 역사관,12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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