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에 해당되는 글 18건

  1. 2012.12.05 박정희 혈서기사가 조작이라구요? - 종북놀음과 박정희 혈서 (1) (3)
  2. 2012.12.05 다카키 마사오, 민족문제연구소에 문의가 많아 간략히 정리해드리겠습니다. (27)
  3. 2012.07.30 유신40년 기획강좌, 끝나지 않은 유신
  4. 2012.07.16 사상의 은사 故 리영희 선생, 독일과 일본의 전후 과거사 청산 그리고 박정희에 대해 말하다 (1)
  5. 2012.07.12 박정희 유신시대가 향수? 그 때가 그리운 분들을 위해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보겠습니다. [트윗으로 보는 "유신의 쌩얼" 중간 정리] (2)
  6. 2012.07.04 [연재]"식민의 유산 유신의 그늘" (5) 조국근대화의 빛과 그림자
  7. 2012.07.03 [연재]"식민의 유산 유신의 그늘" (4) 새마을운동의 숨겨진 기원 (1)
  8. 2012.06.19 [연재]"식민의 유산 유신의 그늘" (3) : 새마을운동, 정말 새마을이 되었나? (1)
  9. 2012.06.19 [연재]"식민의 유산 유신의 그늘" (1) : 유신의 망령 (1)
  10. 2012.04.10 "역사전쟁"과 19대 국회의 과제 (2)

박정희 혈서기사가 조작이라구요? - 종북놀음과 박정희 혈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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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조세열 사무총장

 

찌라시 수준의 인쇄공해물, 종북백과사전 


지난 19일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극우논객 조갑제 씨가 펴낸 종북백과사전을 거론하며 야권의 주요 지도자들을 싸잡아 종북 정치인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이틀 뒤에는 민주통합당의 박지원 원내대표가 친일인명사전을 인용하면서 “친일?종북의 원조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고 정면으로 반박해 종북논란이 바야흐로 2라운드로 접어들고 있다. 종북백과사전 대 친일인명사전이란 몹시 마땅찮은 구도를 앞에 두고, 우선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참여했던 한사람으로서 이러다 두 책이 혹시 같은 부류로 취급받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앞섰다.




▲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 지난 19일,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극우논객 조갑제 씨가 펴낸 종북백과사전을 거론하며 야권의 주요 지도자들을 싸잡아 종북 정치인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 오마이뉴스



2009년 11월 8일 친일인명사전이 전국민적 관심 속에 발간되자, 같은 달 26일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라는 정체불명의 급조 극우단체가 친북반국가인명사전을 만들겠다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은 김대중 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이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소동을 피우는 강경극우세력들에 의해 난장판이 되고 말았지만, 그 기민한 대응과 패러디의 기발함에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날 발표한 명단에 우리 사회의 존경받는 어른들이 다수 포함되었는데, 그 때 거기에 빠진 어떤 분들은 “내가 이렇게도 한 일이 없었는가”하고 자탄해마지 않았다는 우스개 아닌 우스개도 더러 들려왔다. 명단이 발표된 뒤 전혀 소식이 없어 한갓 해프닝으로 여기고 있었더니만, 살짝 이름을 바꾼 종북백과사전이란 살벌한 느낌의 책이 나온 것을 이번에 이한구 대표의 친절한 소개가 있고서야 알게 되었다.


짐작은 했지만 책을 직접 보니 한마디로 찌라시 수준의 인쇄공해물에 불과해 2만원이란 책값도 아깝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다소 내용이 궁금하더라도 절대 사볼 필요가 없는 허접 쓰레기라는 점을 거듭 밝혀둔다. 이 책의 참고자료들은 대부분 재심에서 무죄취지로 결론이 난 사건에 대한 안기부 국정원 검찰의 공안기록이거나 자신들이 발간한 책 아니면 인터넷 기사들이다. 이 따위 책에다 함부로 백과사전이란 명칭을 붙이다니 언어를 농단해도 분수가 있어야 한다. 한 때 치밀한 채증과 예리한 분석으로 정평이 있던 조갑제 씨가 판단력마저 종북 색출에 저당잡힌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종북이라면 어감상 친북보다 죄상이 한결 무거워 보이는데, 조 씨는 종북백과사전에 전직 국무총리 둘과 대선주자들을 포함 야당 국회의원 33명을 무더기로 집어넣는 쿠데타적 사변을 일으켰다. 1952년 이승만 정권 때 국회의원 40여 명이 통근버스에 탄 채 크레인으로 헌병대에 끌려간 부산정치파동 이후 국회의원들이 단체로 이런 봉변을 당한 일은 군사정권 때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내용이 진실이라면 나라의 명운이 가히 적화통일 직전의 백척간두에 서있다고 할 만하다. 검찰은 직무유기라는 비난을 듣기 전에 미적거리지 말고 조 씨를 소환하여 사실관계를 알아봐야 한다. 조사결과 관련자들이 혹 국가보안법에 저촉되었다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정하게 처벌해야 하며, 반대의 경우에는 유언비어유포죄나 어떠한 형태로든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아 그런데 박정희 정권이 긴급조치 때 만든 유언비어유포죄는 없어졌나 보네요. 뭐 다른 죄목 없나요.)


어느 나라에서나 극우인물들의 언행이 선동적이고 과격하다 하지만 상궤를 벗어나는 것도 정도가 있을 것이다. 특히 집권여당의 원내대표가 쪽박부터 깨는 이런 식의 행태를 보인다면 도대체 의회정치의 기본인 대화와 타협이 무슨 수로 가능하겠는가.



종북 공격이 잇따르고 있는 까닭



▲ 유신 40년 "식민의 유산, 유신의 그늘" 유신 40년이 되는 이 해, 유신의 망령이 우리의 머리 위를 배회하고 있다.민족문제연구소는 박정희체제와 박정희주의의 완전한 극복을 위해 '박정희 유신"의 모든 것을 담은 전시회를 진행 중이다. ⓒ 민족문제연구소



이렇게 상식을 벗어난 종북 공격이 잇따르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바로 ‘본원’이 박근혜 의원이기 때문이다. 말 수 적은 그가 단호하게 ‘자유’와 ‘국가관’ 검증을 언급했을 때 화살은 시위를 떠난 것이라 봐야한다. 이미 사당화한 새누리당 내외의 ‘종박세력’은 그 뜻을 충실히 받드는 외에 달리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많은 국민들이 유신시대를 떠올리면서 공포스런 데쟈부를 경험하고 있다.


유신 40년이 되는 이 해, 냉전시대로 끝없이 후진하는 대한민국의 정치현실을 지켜보면서 박정희체제와 박정희주의의 완전한 극복 없이는 민주주의란 헛말임을 실감하게 된다. 21세기 대명천지에 시대착오적인 매카시즘 논란이 어찌된 노릇인가. 종북 놀음의 재미가 쏠쏠하겠지만 반드시 대선에 유리할지도 의문이며, 후과에 대한 책임도 결코 적지는 않을 것임을 단언한다.


유신의 망령이 우리의 머리 위를 배회하고 있는 이 시점에, 친일인명사전은 편찬자들의 의도와 전혀 무관하게 역사전쟁이 아닌 이념전쟁의 전면에 놓이게 되었다. ‘박정희 친일?종북 원조론’은 사실 박정희 전대통령 추종세력에겐 역린을 건드린 것과 진배없는 불경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박정희주의자들은 특이하게도 종북 부분보다 친일에 더 격분하고 과민반응을 보여 왔다. 남로당원 경력은 동료들을 밀고한 것으로 대속하였다고 생각하는지 또는 가혹한 사상탄압으로 상쇄되었다고 보는 것인지는 그 속을 알 수 없다.


어쨌든 친일문제는 다퉈볼 여지가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래서 불똥은 이제 친일인명사전으로 옮겨붙었다. 각종 매체와 SNS를 통해 유포되고 있던 근거 없는 반론들이 자가발전을 통해 재구성되고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한결같은 목표는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는 데 있다.


먼저 그들이 보아도 치명적인 친일의 증거이면서 치욕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지원혈서는 무조건 조작이라고 떼를 쓴다. 다음으로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주체가 빨갱이라고 몰아붙인다. 그리고 모든 과정이 정치적 의도 아래 이루어졌다고 덮어씌운다. 모두 합리적인 반론이라기보다 막무가내식 들이대기에 가까운 주장이긴 하지만, 여론을 호도할 우려가 있어 부득이 한 마디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 중에서도 혈서조작설은 친일인명사전의 권위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고 있다. 특히 인터넷에는 조작설로 도배가 되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그레샴의 법칙이 그대로 작동되고 있다. 진실은 덮이고 억지 주장만 난무하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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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키 마사오, 민족문제연구소에 문의가 많아 간략히 정리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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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4일) 저녁 대선토론에서 나온 ‘충성혈서를 써서 일본군 장교가 된 다카키 마사오. 한국 이름 박정희. 친일과 독재의 후예’라는 이정희 후보의 발언 때문인지 오늘 연구소로 문의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간 연구소가 조사하고 축적한 내용들을 간략히 정리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 발간 친일인명사전, 2권 106~107쪽 박정희 항목 부분

 

 

친일인명사전앱 '박정희' 검색화면

 

 

친일인명사전에는 4,389명 친일인사 중 1인으로 박정희의 출생부터 사망까지의 주요행적과 일제강점기의 상세한 친일행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올해 총 3권 1질의 방대한 사전분량을 스마트폰 안에 쏙 넣을 수 있게 ‘친일인명사전앱’을 출시해 큰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2009년 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을 내놓기 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씨는 법원에 자신의 아버지와 관한 사전 게재금지가처분신청을 제출했습니다. 하지만 사전 발간예정일을 이틀 앞둔 11월 6일 법원에서 이 신청은 기각되었고, 8일 사전 발간보고대회는 예정대로 치를 수 있었습니다.

 

 

『만주신문』1939년 3월 31일

 

이런 과정을 거쳐 친일인명사전이 공개되었음에도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는 분들이 있었고, 특히나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만주군 혈서 지원과 관련해서는 연구소의 조작이라는 말까지 돌았습니다. 역사 연구자들의 철저한 검증과 법원의 판단이 있었음에도 말이지요.

 

다시 한 번 확인하시지요.

 

 

 

 

이상의 사실은 미하원 외교위원회에 제출된 한미관계조사보고서인 ‘프레이저 보고서’에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프레이저 보고서가 담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잘 알려지지 않은 실상은 연구소제작 역사다큐 “백년전쟁”의 스페셜에디션 <프레이저보고서 - 누가 한국경제를 성장시켰는가>를 보시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역사다큐 "백년전쟁" 스페셜에디션

<프레이저보고서 - 누가 한국경제를 성장시켰는가> 관람하러 가

 

 

또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일제강점기 교사 또는 일본제국 군인으로 체득한 식민의 유산은 5.16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서서히 외화되어 마침내 이 땅 민주주의에 조종을 울리며 끔찍한 암흑의 역사, 유신시대를 만들어 냈습니다. 

 

연구소는 올해 10월유신 선포 40년을 맞아 유신독재의 본질을 조명하는 특별전시 “식민의 유산, 유신의 추억”전을 개최했습니다. 의미심장하게도 서대문형무소 옥사에서 개막전을 진행한 이후로 창원, 부산, 광주, 대구 등 대도시에서 순회전시를 개최했을 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소규모 야외 전시를 무려 5개월 여 동안 진행해 오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식민의 유산, 유신의 추억> 특별전 전면소개. 위 내용은 전시도록에 더 상세히 실렸습니다.

 

 

 

 

어떻습니까, 이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에 대한 정리가 좀 되시는지요?

 

이상의 주요내용들은 유신40년 특별전시도록 [식민의 유산, 유신의 추억]에 각종 이미지들과 함께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도록에 관한 문의는 민족문제연구소 전화 02-969-0226 으로 해주십시오.

 

 

<식민의 유산, 유신의 추억> 특별전 전시도록 표지

 

 

<식민의 유산, 유신의 추억> 전시도록 6~7쪽, '친일인명사전으로 본 박정희' 중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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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40년 기획강좌, 끝나지 않은 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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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유신체제가 들어선지 40년 입니다. 40년이 지나가고 있지만 아직도 사회 곳곳에는 박정희와 유신의 모습들이 남아있습니다. 새누리당의 가장 유력한 대선후보자가 박근혜의원이니 두말할 나위 없지요. 


이 문제들은 단순히 '박정희의 딸'이 대선후보에 나왔다는 문제만이 아닙니다. 요사이 언론에는 '역사논쟁은 그만두고 민생을 이야기 하자' 발언이라던가, '5.16'에 관련된 발언들이 연일 보도 되고 있습니다.


이 발언들을 둘러싼 논쟁들을 나라의 권력을 잡을 집단의 역사인식과 가치관이라는데 문제가 있겠지요. 40년이 지난 유신, 그리고 유신을 둘러싼 논의들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식민지 시대 청산하지 못한 과거가 유신시대에 어떻게 되살아 났고, 지금 어떻게 다시 이야기 되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기획강좌를 개최합니다. 


많은 참석 바랍니다.


끝나지 않은 유신 매주 화, 목 7시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강의실


1강 08/23(목) 식민의 유산과 10월 유신 :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2강 08/28(화) 종신집권으로 가는 길, 유신 : 김재홍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3강 08/30(목) 한강의 기적, 그 주인공을 묻는다 :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4강 09/04(화) 유신독재에 맞선 사람들 : 서중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5강 09/06(목) 금지곡으로 본 유신시대 : 이영미 문화평론가


6강 09/11(화) 끝없는 예외상태, 일상을 감시하다 : 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7강 09/13(목) 끝나지 않는 유신, 1972 그 후 40년 :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인원 : 50명 선착순 마감,

수강료 : 3만원

문의 및 접수 : 전화 02-969-0226 이메일 historia@paran.com

입금계좌 우리은행 132-126568-13-201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



*특별전시 식민의 유산 유신의 추억 8//~9/15 형무소 역사관 12옥사

*금지곡콘서트 8/25, 9/8 5시 형무소 12옥사 및 마당

*특별전시개막과 함께하는 금지곡 콘서트 8/8 5시~7시 형무소 12옥사 및 마당

*특별전시해설과 함께하는 서대문형무소 답사 8/25 9/8 4시 형무소 역사관,12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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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은사 故 리영희 선생, 독일과 일본의 전후 과거사 청산 그리고 박정희에 대해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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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5.18국립묘원에는 얼마 전 작고하신 '사상의 은사, 故 리영희 선생'의 묘소가 있습니다. 비문에는 "이성의 붓으로 진실을 밝힌 겨레의 스승,여기에 잠들다"라고 적혀있습니다. 올해 광주 참배 때, 연구소 회원들과 함께 리영희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고 함께 그분의 뜻을 기리는 시간을 가져보기도 하였습니다. 여전히 선생이 우리와 더불어 지내주시길 바라는 욕심은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생전의 선생은 연구소에  많은 격려를 보내주셨고 특히 연구소 임헌영 소장과 각별한 지우(友)의 관계를 맺기도 했습니다. 글을 쓰고 있는 저 역시 리영희 선생의 글에 많은 내적 감화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특히 리영희 선생의 자전적 회고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연구소 소장님이 함께 한 "대화"(한길사 2006, 부제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라는 책은 제가 '강력 추천'하는 것이 아닌 '강제 추천'을 하는 도서 목록 중 하나입니다.^^

 

오늘은 리영희 선생의 저작 중 과거사 문제와 관련한 글을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 전후 독일과 일본의 상반된 태도에 대해 언급하신 일부를 소개해 드립니다. 아래의 글은 선생의 저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와 1992년 연구소 개소 1주년(당시 반민족문제연구소)을 맞아 주최한 "식민지배 청산문제의 민족사적 이해"에서 선생이 작성한 토론문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것임을 밝힙니다.

"1985년 5월 8일 독일패망 40년 기념일에 폰바이체커 독일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연설로 세계적인 이목을 받습니다. 독일 폰바이체커 대통령은 이날 대통령 기념사를 통해 과거 독일이 저질렀던 만행, 치부를 민족의 이름으로 반성하고 학상당한 500만에 대해 사과의 뜻을 전했습니다. 여기에는 유태인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 노동운동 지도자, 리버럴리스트, 심지어 점령지의 무명인들과 짚시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현재를 사는 우리는 우리의 선조가 한 짓을 모른 체 할 수 없다. 과거의 선택에 따라 오늘이 있에 우리들은 마땅히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과거의 범죄적 역사를 잊어 버리거나 보호하려는 민족은 영구히 장래를 잃어버리는 민족이다"

이날 연설이 세계 지식인들을 숙연하게 만든 것은 이 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결코 전장에서 희생된 독일 병사들을 '우리가 오늘 여기에 있기 위하여' 죽어간 존재로 미화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더더욱 그는 '자국을 위해 죽어간 자'를 가장 먼저 애도해야 할 대상을 삼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같은 패전 40년을 기념하는 다른 나라에서는 과거와의 단절은 고사하고 연속성을 찾는 위험한 발언이 이어졌습니다. 바로 일본입니다. 당시 일본의 나카소네 수상은 유명한 전후청산론을  선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국가국민은 오욕을 버리고 영광을 향해 전진해야 합니다. 이제 전쟁이 끝난지 40년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모든 과거는 청산되었습니다."

그의 발언을 정리하자면, 일본으로서는 전쟁에 대해서 지금까지 양심에 거리낄 것도 없고 행동에 제약받을 것도 없으며 대의명분이나 도덕적으로도 가책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두 민족의 존재양식과 도덕적 심정의 너무도 극단적인 차이에서 우리는 전후처리의 이중구조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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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폰바이체커 전 독일대통령의 "현재를 사는 우리는 우리의 선조가 한 짓을 모른 체 할 수 없다. 과거의 선택에 따라 오늘이 있에 우리들은 마땅히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과거의 범죄적 역사를 잊어 버리거나 보호하려는 민족은 영구히 장래를 잃어버리는 민족이다"라는 발언, 여전히 마음에 와닿습니다.

위의 발언은 독일에 비교하여 일본의 무책임한 태도를 비판할 때 자주 쓰이는 문구인데요....우리 현대사를 돌아보면 과연 일본 만의 문제만은 아닌 듯습니다. '과거사'하면 주로 일본의 만행을 떠올리기 마련인데요, 이승만에서 전두환으로 이어진 엄혹한 우리 현대사 속에도 청산해야 할 역사가 한 두 가지가 아니니깐요.

 과거사에 대해 무책임하고 반성하지 않는 일본, 그리고 그런 일본을 닮은 '우리안의 일본'을 생각하면 참으로 섬뜩한 마음까지 듭니다. 특히 최근 '5.16이 구국의 혁명'' 임을 규정화 하려는 새누리당의 '박근혜 전도사'들의 행태를 보면 더욱 그러합니다.

일찌기 리영희 선생은 '원조 뼛속까지 친일, 친미'였던 박정희 정권의 실상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선생은 연구소가 주최한 심포지움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정신대 문제나 과거의 문제에 대해서 피해를 받은 사람들이 투쟁할 상대는 일본이기에 앞서서 바로 이와같은 권리를 팔아먹은 박정희, 그리고 친일파와 역대정권 그리고 그것을 실제로 집행한 그 개인에 대해서 일차적인 공격이 가해져야 한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개인이나 언론의 공식적인 발언은 찾아 볼 수 없고, 일본에 대한 감정적인 발언만으로 일관하고 있다"

박정희 시대는 친일청산을 구조적으로 차단하는 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성의 기미가 없는 일본에 날개를 달아준 '반민족'의 시대였습니다. 친일경력도 반민족적 문제이거니와 '한일회담'을 강행한 그의 조처는 우리민족사에 남긴 너무도 뼈아픈 조처였습니다. 나아가 박정희는 '일제가 남긴 폭력성'을 더욱 구조화시켜 나라 전체를 병영화시켰고 나아가 '거대한 감옥'을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보수수구세력과 유력한 대권주자인 박근혜씨는 이 시대의 모든 치부는 외면한 채  '조국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이를 미화하면서 '박정희'를 '조국 근대화의 아버지' 라고 합니다. 각종 동상이 만들어지고 전문 대학원도 생겼으며 기념관도 생겼습니다. 이제는 5.16혁명기념관도 조만간 개관할 기세입니다. 사실 이러한 우려는 우려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작년 '새마을 운동'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는 불행한 사태는 어쩌면 서막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후 관련 단체의 활동이 매우 활발해 졌습니다. 물론 꼼꼼하신 각하와 박근혜씨가 있기에 이들 단체에 대한 세금지원은 필수이구요.  제가 사는 지역에도 이들의 활동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려스러운 것은 군사반란자들마저 이러한 상황에 편승하여 활개하고 있는 입니다. 이들은 '개인적인 양심'에는 거리낄게 없을지도 모르겠으나 공동체를 위한 양심에는 긴 털이 나있는 것은 비교적 분명해 보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군화발이면 모든게 해결되었던, 권력욕이 강한  특정 지역사람들이 모여 일을 도모하면 성공하던, 반공이다 빨갱이를 부르짖으면 모든것이 허용되었던, 친일친미만이 민족의 살길이라 외치면 대접받았던 시절을 다시 만들고자 하는건 아닐까요? 

이승만 독재, 박정희 친일독재, 군부반란자에 대한 처벌...등등 우리는 청산할 게 너무 많지만 어느 하나 제대로 해결된 것이 없어 보입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우리가 정권을 바꾸지 못한다면.....생각만 해도 아찔한 지경입니다.

"학생들에게 사회의 정의가 실현되는 모습을 보여주세요! 응원할게요!"

'김한별'이라는 중고생이 연구소 홈페이지에 남긴 응원글인데요..김한별 학생 역시  우리 사회가 정의가 실현되지 못하고 불의가 지배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는 것 같아 참으로 미안하고 민망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어린 학생들을 위해서라도 앞으로 할 일이 참 많구나 하는 생각에 불끈 주먹을 쥐어봅니다.

끝으로 리영희 선생의 한시를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 하려 합니다.  2003년 3월 가카의 절친(?) 부시는 결국 이라크를 침공합니다. 한국전쟁의 참상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베트남 전쟁의 부도덕성을 치밀하게 밝힌 '반전평화주의자' 였던 선생은 마비가 시작된 손으로 다음과 같은 시를 작성하였는데요...비록 글씨는 삐뚤하지만 그 올곧은 정신만큼은 감히 헤아리기가 어렵겠지요?  그 전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부족한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래의 "추천"을 꾹 눌러주신다면 더욱 감사!!!

 否氏狂亂不知其終  (부시의 광란이 끝을 알 수 없으니)

 人類自存直面危亂  (인류자존이 위란에 직면했도다)

 錦繡疆土長變火海  (금수강토가 장차 불바다로 변할지니)

 韓民當呼反戰平和 (한민족은 마땅히 반전평화 외칠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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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유신시대가 향수? 그 때가 그리운 분들을 위해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보겠습니다. [트윗으로 보는 "유신의 쌩얼" 중간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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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5.16을 "구국의 혁명"이라 칭했던 박근혜씨의 발언을 옹호하려는 새누리당 의원들이 발언이 연일 언론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무덤에서 처절하게 과오를 반성해야 할 유신의 망령이 화려하게 부활할 기세입니다. 이에 편승하여 권력을 취하고자하는 수 많은 "유신 전도사"들이이미 박근혜씨 주변과 전면에 포진되어 있는 형국입니다.

독재를 미화하려는 그들은, 이제 친일까지 미화하기 위해 온갖 꼼수를 부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 대표적인 역사테러가 바로 "국사교과서"입니다.친일파 서술이나 민주화 운동에 대한 서술은 대폭 축소된 반면 경제성장에 대한 찬양이 극대화 되었습니다. 근현대사 교육 시간 자체가 축소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종박'세력들의 "멘붕적 역사관"이 그대로 학생들에게 주입되지는 않을지 두렵고도 참담한 마음입니다.

 

군사쿠데타는 기존의 모든 가치관과 미덕을 부인하는 입니다. 거기에는 도덕과 윤리, 정의의 문제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총을 갖고 칼을 갖고 탱크를 가진 힘센 놈이 이긴다는 것입니다.

민족을 배반한 친일행위에도, 정의를 외치던 인사들과 무고한 시민들을 잡아다 탄압하고 고문했던 폭악한 반인륜적 행위에도, 노동자의 권리는 고사하고 인간의 권리 조차 누릴 수 없었던 열악한 노동탄압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자들은 이 시대가 그립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박정희 향수속에는 강도적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 페어플레이가 없이 자신들의 사적 이익이 온 사회를 지배 했던 비민주적인 이기심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다시금, 박정희의 업적을 찬양하고 숭앙하는 자들에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그 시절을 향수로 기억하고 싶은지 말입니다.

정치적 의사는 고사하고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그 시절, 막걸리 한잔 마시다 빨갱이로 몰려 고역을 당해야 했던 그 시절, 노래는 금지되고 헤어스타일, 치마길이까지 모두 통제 당했던 그 시절, 강요된 경제성장론으로 살인적인 노동에 저항하지 못하고 폐병이 들어 비참이 쫒겨나야만 했던 그 시절, 우리의 아들'딸이 다니던 학교에서조차 병영훈련을 받으며 땀흘려야 했던 그 시절.

박정희 유신시대...과연 향수라고 여기고 싶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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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트로]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그리고 1961년 5월 18일 민족일보 사건이 일어난다. 군사정변세력은 반공이데올로기에 기초해 군사독재체제를 수립했다. 언론에 대한 사전검열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진보언론이었던 민족일보는 간부들이 체포되며 폐간되었다. 민족일보사장이었던 조용수는 결국 사형까지 당했다. 유신정권의 폭압성을 보여주는 서막에 불과했다.

[트윗으로 보는 유신의 쌩얼1] 64년 3월,한일국교정상회담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이 경제협력자금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많은 시민들이 거리에 나왔다.이에 박정희정권은 계엄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했다


[트윗으로 보는 유신의 쌩얼 2] 65년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증가하기 시작한 일본인 관광객을 중심으로 시작된 '기생관광'은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정책에 따라 본격적으로 확산되기시작했다.이를 널리 장려하던 유신정권에게 이 여성들은 일종의 천연자원이었다


[트윗으로보는 유신의 쌩얼3] 1967년 동백림(동베를린) 사건! 박정희 정권은 3선개헌을 위해 부정선거로 개헌의석을 차지했고,이를 덮기 위해 동백림 사건을 조작.독일유학생과 교민 중 간첩으로 지명된 사람들은 한국으로 납치되어 구속되어 고문을 받았다


[트윗으로보는유신의쌩얼4] 69년 3선개헌 반대투쟁! 박정희정권은 정권연장을 위해 67년6월8일 부정선거를 자행하며 개헌의석을 확보했고,69년 3선개헌안을 날치기 처리했다.정권은 탄압의 강도를 높이며 개헌을 강행, 결국10월17일 3선개헌은 최종 통과되었다.


[트윗으로보는유신의쌩얼5] 1970년11월13일, 청년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책을 불태우고분신했다.조국근대화란 미명하에 놓여진 유신시절 노동자의 참혹한 현실이었다. 전태일의 죽음은 노동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관심과 한국사회 민주화의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트윗으로보는 유신의쌩얼 6] 1973년8월8일,10월유신 선포시 일본에 있던 김대중은 이에 저항했고, 정권은 김대중을 납치 바다에 빠뜨려 죽이려다 실패하고 서울로 압송했다. 이 사건으로 유신은 국제적 비난과 해외동포들의 유신반대운동에 부딪혔다

[트윗으로 보는 유신의쌩얼7] 1973년10월02일,유신독재 아래 모두가 숨죽일때 서울대에서 유신 이후 최초의 시위가 발생하여 전국으로 확대되자 초강경 정책으로 일관하던 박정권은 유화책으로 처벌을 백지화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의 시위는 그치지 않았다.

[트윗으로 보는 유신의쌩얼 8] 73년10월19일, 유신반대학생들을 지지한 서울대 법대 최종길교수에게 당국이 유럽간첩단사건의 협의를 발표하자 최교수는 결백을 증명하고자 자진 조사를 받았다.그는 3일후 변사체로 발견, 당국은 투신자살했다고 발표했다.

[트윗으로 보는 유신의쌩얼 9] 74년01월08일 긴급조치1,2호발표! 긴급조치는 유신헌법에 따라 대통령 권한의 특별조치이다.긴급조치는 대통령의 판단에 따라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시킬 수 있었으며 74~79년까지 총 9차례나 공포되었다

[트윗으로보는유신의쌩얼10] 74년01월26일 문인간첩단 사건.73년 10월부터 대학생과 재야인사들의 유신반대운동이 일자 문학계에서도 74년 1월 문인 61명의 개헌지지성명을 발표. 보안사령부는 이들을 고문해 조작하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조사했다

[트윗으로보는유신의쌩얼11] 74년4월3일,민청학련사건! 유신반대운동을한 대학생들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정부는 이들을 북한의 사주를 받아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며 긴급조치 제4호를 발표하여 1024명을 조사했고 203명을 구속했다

[트윗으로보는유신의쌩얼12] 74년4월25일,민청학련사건의 배후로 인혁당 관계자들을 지목 사건 조작. 사형 8명,무기징역 7명,징역20년 4명, 징역15년 4명 등을 선고했다. 8명은 대법 판결 18시간 만에 사형집행,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었다.

[트윗으로보는 유신의쌩얼13] 긴급조치로 언론이 제대로 보도를 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은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고 외부간섭배제,기자불법연행거부 등을 결의했다.정권의 압력으로 무더기 광고해약사태로 백지광고가 개제되었다

[트윗으로보는 유신의쌩얼14] 75년2월에 실시된 유신헌법의 신임투표에서는 유권자의 79.8%가 참가하여 73.1%의 찬성을 얻었다.유신헌법에대한 어떤 비판과 이의제기도 처벌되었던 당시 상황은 관권선거의 전형적 사례로 정권은 이후 더욱 강경해졌다

[트윗으로보는 유신의쌩얼15] 74년12월14일,유신정권에 의해서 조작되어 무고한 시민8명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던 '인혁당사건'에 고문조작설을 제기하며 전모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던 시노트 신부와 오글 목사가 박정희독재정권으로부터 강제추방되었다

[트윗으로보는 유신의쌩얼 16] 75년04월11일, 서울대 농대생 김상진이 유신체제와 긴급조치에 저항,학내의 자유성토대회에서 양심선언문을 읽고 할복자살했다.장례 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하였고 이는 민주진영의 지식인,특히 여러시인들의 감성을 일깨웠다.

[트윗으로보는유신의쌩얼17] 동일방직노동자들은 72년 한국최초의 여성지부장을 선출하며 권리를 주장했다.회사와 경찰은 노조를 탄압하며 대의원 대회를 무산시켰다. 76년 7월 여성노동자들은 옷마저 벗어가며 항의했지만 경찰은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연행해갔다

[트윗으로보는유신의쌩얼18] 1975년 08월 17일 장준하는 김대중과 재야세력을 규합하여 유신체제 반대운동을 벌이기로 합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준하는 제2차 100만인 개헌서명운동을 불과 3일을 남겨 두고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앞으로 민족문제연구소 공식 트위터를 통해 다시 연재될 "트윗으로 보는 유신의 쌩얼"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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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식민의 유산 유신의 그늘" (5) 조국근대화의 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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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와 "군사혁명 1주년 산업박람회"  





정당성이 취약할수록 선전은 더 요란하게 마련입니다. ⓒ한겨레


정당성이 취약할수록 선전은 더 요란하기 마련입니다. 어제오늘 이야기 만은 아닙니다. 일제시대도 그랬지요. 


 일제는 조선을 강점한지 5년만인 1915년 9월 11일 시정 5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라는 대규모 박람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했습니다. 요즘 한참 진행중이 여수 엑스포처럼 산업박람회지요. 


조선물산공진회


조선의 산업을 진작시킴과 동시에 식민지 경영의 성과를 과시하기 위한 정치적인 의미가 있었지요. '근대화'된 경성의 모습을 과시하면서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경성의 중심이고 조선의 정궁이었던 경복궁에서 말이지요. 이는 단순히 '경복궁에서 했다.' 의 의미가 아닙니다. 개최하면서 일제는 대원군이 복원한 경복궁의 전각들을 철거해 버립니다.그리고 그 터에 공진회를 위한 가건물들을 지었습니다. 50여일의 공진화가 끝난 후 나머지 가건물그대로 헐렸습니다. 



경복궁이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그리고 총독부 신청사 공사가 시작되었지요.(그 전에 총독부건물은 남산에 있었습니다.) 이미 경복궁 자리에 총독부 건물을 세우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겁니다. 여담입니다만 지금도 경복궁에 보이는 잔디가 다 예전에 건물들이 있던 자리입니다. 한국전통에서 잔디는 무덤에나 쓰이던 풀이었지요. 그리고 그 후 총독부는 몇 년 마다 박람회를 열어서 조선통치의 실적으로 자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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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쿠데타 1년, 경복궁에서 비슷한 행사가 열립니다.


그런데, 해방이후 경복궁에서 또 비슷한 행사가 열립니다. 이름하여 " 군사혁명 1주년 기념 산업박람회" 였지요. 1962년 4월 20일부터 47일간 열린 산업박람회는 경제개발이 본격화 되기도 전에 그 성과를 대대적으로 선전한 행사였습니다. 

군사혁명 1주년 기념 산업박람회장은 다름아닌 경복궁에서 개최되었습니다.




그래서, 박람회는 경제개발보다 소위 "혁명", 군사쿠데타의 정당성을 선정하는데 집중했습니다. 박람회의 건물 이름이 

"혁명기념관", "반공관", "5개년경제계획관", "재건국민관" 이라는 것을 봐도 확실히 보이는 것이지요. 


산업박람회장 사진, 저기 멀리 구 조선총독부 건물이 보이고 근정전, 경회루가 보입니다.




구호와 슬로건 뒤에 가려진 부패 공화국


1962년부터 경제자립과 경제성장을 목표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었습니다


. 기아와 빈곤, 보릿고개로 상징되던 최빈국 한국은 박정희 집권기에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며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많은 구호와 슬로건들이 나왔습니다. 구호의 종류는 각 분야마다 엄청나게 많치만 몇가지만 경제개발과 관련된 구호 몇 가지만 뽑아봐도 그 시대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부산 민주공원에 전시했던 패널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싸우며 건설하자 / 중단없는 전진의 해  / 올해는 총화 유신의 해 / 아껴서서 자립생활 저축해서 경제건설 / 총화유신 민족중흥 / 수출건설에서 조국근대화는 증산 / 증산이다 건설이다 65년은 일하는해 / 10월유신 100억불 수출 1000불 소득 / 수출은 국력의 총화 / 재건에 때가 없다 지금부터 시작하자 / 수출상품은 국력총화의 예술품 / 노사협조 다짐해서 자립경제 이룩하자 / 올해는 건설의 해 / 중단하는 자는 승리하지 못한다.  / 뭉쳐서 이룩하자 자립경제 자주국방 / 근면한 국민성은 번영을 기록한다



그러나 성장의 과실이 재벌에게 돌아가는 구조는 이미 박정희 정권초기부터 만들어졌고,  정경유착으로 인한 각종 비리와 부패의 뿌리역시 깊어졌습니다. 민주당의 부패를 비판하던 군사정부역시 부패하기 시작했습니다. 본격적인 시작은 정치참여를 앞두고 정치자금을 마련하는 가운데 벌어졌습니다.  새나라 자동차사건, 빠찡꼬사건, 증권파동, 워커힐사건 등 이른바 4대의혹 사건 이었지요. 군사정권이 쿠데타 당시 내세웠던 부정부패 일소는 점점 퇴색되어 자신들이 또다른 부정부패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간에는 구악뺨치는 신악 이라는 말이 돌았다고 합니다. 


증권파동

중앙정보부가 개입을한 주가조작 사건. 가격만 형성시켜놓고 실질적 매매는 이루어 지지않는 '불성'이라는 거래방법이 쓰였다고 한다. 


워커힐 사건

군사정권은 61년 성동구 광장동 부지를 수요하고 워커힐을 지었다. 일본으로 떠나는 주한미군의 달러를 잡기위해서였다. 하지만 중앙정보부가 공사자금 가운데 상당부분을 횡령하여 공화당 정치자금으로 사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새나라 자동차 사건

19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자동차 공업 보호법을 재정하여 향후 5년간 자동차 부품수입을 무관세로 했고, 새나라조립공장을 건설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완성된 일본산 소형 자동차를 관세없이 수입하여 업자에게 팔았고, 이 이익은 공화당 창당자금으로 사용되었다. 


빠찡꼬 사건

중앙정보부가 자유당, 민주당 때 금지되었던 빠찡꼬 기계를 500대나 수입하게 하고 영업허가를 내주는 대신에 돈을 챙신 사건이다. 



삼분이란 시멘트, 밀가루, 설탕 을 말합니다.


게다가 군정말기인 1963년에는 이른바 3분 폭리사건이 터집니다. 여기서 3분(3粉) 이란 시멘트, 밀가루, 설탕을 말합니다. 1963년은 태풍과 폭우로 쌀값이 폭등했고 밀가루에 대한 수요도 늘었습니다. 설탕도 수요가 급증했고, 시멘트는 품귀현상까지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 사건들에는 공동된 소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기업들이 정부로부터 지원받은 미국의 원조달러로 설탕, 밀가루 등을 수입하고 국내시장을 장악해 폭리를 취하고 정부는 기업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는 방식이었습니다.  설탕과 밀가루등의 가격이 갑자기 2,3배로 폭등해서 국민에게 엄청난 피해를 준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1970년대 내내 부동산투기 열풍이 불었습니다. 1970년대 후반 아파트 등 주택투기가 불붙었습니다. 복부인이란 말도 이때 생긴 신조어죠. 아파트 분양때 마다 투기행렬이 장사진을 이루었습니다. 1978년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분양과정에서 발생한 사회유력층의 불법, 부정행위는 대표적인 투기사건입니다. 


'조국근대화'는 부패와 비리로 시작한 것이지요. 




조국근대화의 두얼굴, 경부고속도로와 전태일


강준만교수의 한국 현대사산책을 보면 70년대는 전태일과 경부고속도로라는 상징으로 표현할수 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조금만 옮겨보죠





한강의 기적, 그 기적의 이면에 숨은 잔인한 인권유린... 

전태일은 가고 없다. 사람들은 전태일을 잊어버렸다. 남은건 경부고속도로다


경부고속도로의 중단없이 쭉 뻗은 길은 발전과 번영의 표상이었다. 모든게 '고속'이었다. 군사작전이었다. 오직 전짐남니 있을 뿐이었다. (중략)그러나 동시에 경부고속도로가 하나였던 것을 가로지르면서 만들어낸 경계는 새로운 갈등과 차별을 잉태시켰다. 농촌과 지방인구는 그 길에 흡수되어 서울과 도시에 내전져졌고 권력과 부의 집중과 전횡을 낳는 시스템이 고속도로처럼 빠른 속도로 구축되기 시작했다. (중략) 과연 무엇을 위한 조국근대화인가 하는 의문을 음미할 시간조차 없었으며 그게 용납되지도 않았다. 


갑작스럽게 도시에 던져진 사람들은 노동자와 빈민이 되어 '조국근대화'를 위해 싼 노동력을 제공해야만 했다. 싸도 너무 쌌다. 인격적인 모독까지 가해졌다. 저항은 절대 금기였다. 전태일의 분신자살이 그걸 웅변해 주었고, 이후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이 70년대 내내 계속된 그런 '억압과 착취'의 시스템을 상징적으로 폭로했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3 - 1970년대편, 인물과 사상사






상암동 박정희 기념관에 전시되어있는 여공들의 모습



박정희 기념관에는 미싱질을 하는 여공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박정희가 이끈 조국근대화를 이룬 것은 근로자들이라는 의미겠지요. 하지만, 당시 여공들은 어떤 취급을 당하면서 일했을까요? 동일방직사건을 보면 대강 답을 알 수 있습니다. 


권리의식이 높던 동일방직 노동자들은 1972년 한국 최초의 여성지부장을 선출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했습니다. 회사와 경찰은 계속 노조를 탄압하며 대의원 대회를 무산시켰지요. 1976년 7월 대의원 대회 때, 여성노동자들은 아무리 비열해도도 옷을 벗으면 손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옷을 벗고 경찰에 항의했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무자비하게 이들을 구타하고 연행해갔습니다.


동일방직노동자들의 비극은 이것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1978년에는 동일방직 오물투척사건이 일어났습니다. 1978년 2월 회사측의 협박을 받으면서도 동일방직노조가 대의원 선출 투표를 감행하려하자 회사 측 남성노동자들이 똥을 날라다가 여성조합원에게 퍼부었던 것입니다. 

경찰들은 구경만 하였고, 도움을 요청하는 여성노조원들에게는 냉소와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이 사건이 소위 ‘동일방직 똥물세례 사건’이다. 회사 측은 노동자 126명을 해고하였고 해고자 명단을 각 사업장에 돌려 재취업을 봉쇄하였습니다. 



소위 동일방직 똥물사건 사진입니다.



조국근대화의 역군이었고, 산업전사(戰士)로 불린 노동자들은 비참한 작업 조건 속에서 말 그대로 전사(戰死)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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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식민의 유산 유신의 그늘" (4) 새마을운동의 숨겨진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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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 발상지 논란



새마을운동 발상지 논란의 주역 청도와 포항, 잠시 검색만 해봐도 각각 발상지로 기사가 나옵니다.

경북에 살거나 새마을 운동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아실 이야기이지만, 현재 새마을운동은 발상지 논란이 있습니다. 경북 청도군 청도읍 신도리와 경북 포항시 기계면 문성리가 서로 원조라고 다투고 있는 것이지요. 두지역이 각자 발상지라고 주장하고 공금을 들여서 기념관, 연구까지 하는것도 모자라 2009년에는 법정공방까지 벌였습니다. 포항시의원 몇명과 포항 새마을회에서 경상북도와 청도군을 상대로 청도 신도1리가 새마을운동의 발상지라는 것을 써서는 안된다고 사용금지가처분 신청을 낸 거죠. 


2009년 법원은 발상지 개념을 두고 서로 다른 주관적인 기준, 판단에 따른 다툼에 불과하다며 가처분 신청을 각하했다고 합니다. 법원이 각하했지만 그 와중에 경남 동래군 기장면 만화리(현 부산 기장군 만화동)의 동서부락이 발상지라는 주장이 새로 제기되었습니다. 점입가경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네요. 


최근에도 검색을 해 보면 아직도 청도와 포항은 각자 자신들이 발상지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는 것이지요. 문제는 이 '발상지' 논란에 국고가 투입되어서 기념관을 짓고 연구용역을 주어서 근거를 찾고 했다는 것이지요. 


각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재미있습니다. 대학교에 의뢰해서 증빙자료도 첨부해 놓고 있군요. 궁금하신 분들은 한번 보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청도군 청도읍 신도리 http://www.새마을운동 발상지.kr


VS


포항시 기계면 문성리 : http://saemaul.ipohang.org/



청도도, 포항도, 그리고 부산 기장도1970년대 초 박정희 전 대통령의 발언, 발상을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지자체의 입장에서는 그게 중요할 겁니다. 하지만 새마을 운동자체로만 생각하면 이야기는 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게 그전에 아무런 움직임, 경험이 없이 갑자기 생겨난 것일까요?


새마을 운동의 기원은 바로 일제시대부터 5.16군사정변시기까지 몇 가지를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농촌진흥운동과 국민총력운동, 재건국민운동 이지요. 



새마을 운동의 숨겨진 기원 - 농촌진흥운동, 국민총력운동



농촌진흥운동은 새마을운동의 숨겨진 기원이지요



농촌진흥운동은 1932년부터 1940년까지 진행된 조선총독부 주도의 관제 농민운동이었습니다. 총독부는 '농가경제 갱생', '자력갱생'을 표방을 했었지만, 실제로는 경제 갱생보다는 그 구호아래 농민들을 호율적으로 통제할 목적이 있었습니다.


 농촌진흥운동은 새마을운동과 여러가지 부분에서 유사한 점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경험이라는 면에서 봐도 마찾가지였지요. 최고지도자였던 박정희 뿐만 아니라 관료부터 마을의 사람들까지 모두 농촌진흥운동을 경험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박정희의 새마을운동과 우가키 가즈시게의 농촌진흥운동은 닮은 점이 많습니다.




농촌진흥운동의 동원방식과 프로그램들은 새마을운동의 모습들과 비슷한 부분이 많습니다. 몇 가지를 들어볼까요?


우선 배경과 그 대응이 비슷합니다. 농촌진흥운동이 조선의 경제공황, 민족해방투쟁이라는 위기를 막기위한 미봉책이었듯이 새마을 운동역시 심각한 경제발전의 불균형으로 인해 농촌이 피폐해지는 상황에서 추진되었습니다. 농촌의 피폐는 농촌만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지요. 농촌이 못살게되면 농민들을 농촌을 떠나 도시로 옵니다. 이 사람들이 도시빈민층을 형성하게 되고 노동문제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지요.


다음으로는 정치, 사회구조로 생긴 농촌의 위기를 농민의 내부 문제로 해결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새마을운동의 슬로건은 잘 알려져 있듯이 '근면, 자조, 협동' 이었습니다. 그런데 농촌진흥운동도 비슷한 슬로건이 있어요. '자력본원(自力本願)' 과 '자력공려(自力共勵)' 입니다.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갱생한다는 것이지요, 자력공려의 공려는 협동운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새마을 운동에서 보이던 자조와 협동과 같은 내용이지요. 결국 농촌진흥운동에서 농민들의 문제는 농민들의 무지, 게으름, 낭비때문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사회구조의 문제를 농민 개인의 문제로 돌려버렸던 것이지요. 새마을 운동도 여기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당시 농촌진흥운동의 방식이 조선총독부의 관료기구를 이용해서 총독부 - 도지사 - 도 - 군 - 동 - 리 체계로 명령이 내려갔고, 주요 사업중 하나가 각 부락에 중견인물을 육성하는 것이었니다. 농촌지배의 파트너였습니다. 새마을 운동에도 비슷한 것이 있지요? 바로 '새마을지도자'입니다.


마지막으로 국가가 주도한 관제 농민운동이라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농촌진흥운동이건 새마을 운동이건 농민들은 이 운동들의 핵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율성은 많이 떨어졌습니다. 농민들의 운동을 국가가 계획하고 지도했다는 점에서, 행정기관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관제'라는 말은 두 운동을 계속 따라다닐 겁니다. 


국민총력운동시기 일본은 조선에 강력한 전시동원체제를 구축합니다.



이러한 위로부터의 관제운동은 농촌진흥운동으로만 끝났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심해졌습니다.  1937년 중국을 침략한 일제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결성합니다. 모든 주민을 애국반으로 편성해서 통제했지요. 


1941년 중일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될 즈음 조선총독부는 국민정신총동원운동과 농촌진흥운동을 통합해서 국민총력운동을 만듭니다. 이 국민총력운동 아래 일본은 조선에 강력한 전시동원체제를 구축하게 됩니다. 




새마을운동의 예행연습 - 재건국민운동



5.16 군사정권이 주도한 재건국민운동, 새마을 운동의 예행연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의 농촌진흥운동, 국민총력운동이 일제시기의 운동이었다면 재건국민운동은 5.16군사정변 직후 벌어진 운동입니다. 


5.16 군사정권은 1961년 국민정신을 개조하고 국가를 재건한다는 명목으로 국가재건범국민운동을 시작했다. 내무부가 주관을 했었고 1964년 재건국민운동본부가 해체될 때까지 시행되었지요. 


서울시와 각 도에 지부가 생겨나고 읍, 면, 동과 리 단위에 이르기까지 촉진회가 조직되었습니다. 재건국민운동본부는  반공과 내핍, 근면정신 고취, 생산 및 건설의식 증진, 도덕적 양양, 정서순화, 국민체위(體位)향상 등을 과제로 내걸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재건국민운동은 전국에 재건청년회 4만5천여개, 재건부녀회 3만 3천여개가 되었고, 62년도에 들어가면 50만여명의 요원과 360만명에 이르는 청년, 부녀회원을 확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건국민운동의 방식은 꽤 강압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재건국민운동은 박정희의 평소 지론인 '인간개조운동'을 포함했습니다. 각급 학교학생들을 '혁명공약'을 달달 외워야 했고 "혁명공약을 이루자"라는 노래를 불러대야 했습니다. 학급 학교에 장교들을 파견해서 지휘, 감독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 재건체조와 신생활복, 국민가요 등을 제정해 의무적으로 시행케 했다. 이러한 방식은 당시에도 일제말 국민총력운동본부가 제정한 라디오체조(보건체조)나 국민복, 또는 국민가요를 부활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고 합니다. 


결국 재건국민운동은 큰 성과를 보지 못하고 끝나버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경험을 당연히 새마을운동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재건국민운동본부에서 발간했던 "재건통신"



부산에 전시한 새마을 운동 관련 부분. ⓒ 민족문제연구소



새마을운동을 두고는 여러가지 평가가 엇갈립니다. 대단히 성공적으로 이야기 되고 있는 새마을 운동. 그러나 좋다고 말할 수 없는 지금 농촌의 풍경이 그 결과를 이야기 해 주는 것이 아닐까 다시한번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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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식민의 유산 유신의 그늘" (3) : 새마을운동, 정말 새마을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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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의날, 새마을식당, 새마을운동

 

언제부턴가 다시 새마을운동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새마을 깃발도 다시 우리 곁에 돌아오는 느낌입니다

 

4월쯤에 거리를 지나면서 새마을운동 깃발이 거리 여기저기 휘날리고 있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왜 갑자기 새마을깃발이지? 싶었는데 알고보니 제 2회 새마을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거리마다 단 것이더군요. 공식적으로 끝나지 않았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새마을운동이 다시 눈앞에 다가오는 느낌이었습니다. 

새마을의날은 언론에 거의 보도되지 않은 채 2011년 2월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었고, 국무회의에서 결정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매년 4월22일 새마을의 날은 국가기념일이 되었지요.

 

 

우리 주변에는 60~70년대 컨셉의 식당이 꽤 있습니다. 새마을식당은 그중 하나입니다. [출처 : 새마을식당 홈페이지]

 

 

 

또하나 우리 주변에서 유행하는 새마을이 있습니다. 새마을식당이지요. 비단 특정업체 '새마을식당' 뿐만이 아니라 몇년 전 부터 60~70년대 식의 식당들이 복고풍이라는 이름을 달고 많이 생겼습니다. 왠지 촌스러운 인테리어에 옛날 영화 포스터, 양은냄비, 막걸리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네요. 


새마을 식당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왜 이런 컨셉을 잡았는지 설명이 있습니다. 

 

“1960~70년대식의 인테리어와 식사시간에 흘러나오는 새마을 노래는 먹는이로 하여금 그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켜 어린 시절과 고향생각에 푹 빠지게 만들어버립니다”

 

“정감있는 컨셉”, “향수가득한 어린시절” “고객들의 향수 자극”

 

 추억, 또는 향수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겠네요. 그 중 사업가가 잡은 소재가 새마을 운동이었던 것입니다. 어느순간에 우리주위에 다시 보이고 있고, 어르신들의 머릿속에 아련한 추억으로 자리잡은 새마을운동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박정희가 주도한 새마을운동

 

부산에 전시중인 "식민의 유산 유신의 그늘" 전시 중 새마을운동 부분입니다.


새마을 운동은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시작된 운동입니다. 1970년 4월 한해대책 전국지방장관회의에서 '새마을가꾸기 운동'을 제창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 운동은 1971년 '새마을운동'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정권이 직접 나서서 전국적으로 퍼져갔습니다. "새마을의 노래"를 직접 작사작곡할 정도로 박정희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습니다. 1973년부터 새마을운동은 전국민적운동으로 확산되었고, 1975년에는 공장새마을운동, 도시새마을운동으로 발전했다고 합니다.


언제나 새마을운동하면 근면, 자조, 협동이 들어갔습니다. 농민들에게 이것이 부족하다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새마을운동은 일종의 민족성 개조운동이기도 했습니다. 새마을운동은 "자포자기에 빠진 농민들에게 '하면된다'는 신념을 준 위대한 정신개혁운동이며 풀뿌리 민주주의의 근간이자 국민정신함양운동이었다" 라고 선전되고 있습니다. 박정희대통령의 가장 위대한 치적이라는 새마을운동, 과연 새마을운동은 농민을 잘 살게 만들었을까요?

 

한국사 최대, 최장의 국가대중운동이라는 새마을 운동은 극단적인 찬양과 비판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국근대화의 세계적인 성공사례의 반면에는 상명하복의 권위주의, 일사불란한 획일주의, 외형적 실적주의, 집단주의라는 폐해를 남겼다는 비판이 있지요. 

 


새마을운동의 성과와 한계, 정말 농촌은 잘 살게 되었을까

 

새마을 운동이 외형상 농촌의 환경을 크게 바꾼 것은 사실입니다. 새마을운동은 당시 남아도는 시멘트를 각 부락에 배당하면서 이루어 진 것이니까요. 많은 흙길들이 시멘트 도로로 바뀌고 초가지붕이 시멘트 기와로 바뀌면서 지금의 농촌모습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지요. 다양한 소득증대사업이 전개되면서 농민들은 '잘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갖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소득도 늘었다고 합니다. 1970년대 10년동안 농가소득은 10배가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농가부채가 쌓이기 시작한건 이때부터였지요. 농민들의 이농은 가속화 되었습니다. 


새마을운동의 평가는 어떻게 되어야 할까요? 그건 지금 농촌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국민대 김영미선생님의 책 '그들의 새마을운동'중에 일부분을 올려봅니다.



김영미선생님의 "그들의 새마을운동"입니다.


 

▲김영미, 그들의 새마을운동, 푸른역사, 2009

-잘살기 운동이라면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나 존재했다. 해당 시대 해당 지역의 각 주체들은 최선을 다해서 잘 살기 위해 노력해왔다. 새마을운동을 통해서 비로소 농민들이 잘 살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한다면 그동안 농민들은 게으름뱅이에 잘 살려는 의지가 없었으며 농촌 사회에는 부지런한 농군은 하나도 없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것은 농민에 대한 우리들의 선조에 대한, 악의적인 모함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새마을운동으로 농촌 근대화는 빠른 속도로 앞당겼다. 그러나 새마을 운동을 경과하면서 농민들이 진정으로 잘 살게 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잘 살게되었다는 지표는 대단히 가시적인 것들이다. 마을환경의 근대화는 대단히 효과적이었다. 이 가시적인 성과가 새마을 운동을 성공적인 근대화운동이었다고 평가하는 주요 지표로 꼽히고 있다.그러나 소득증대를 통한 농가경제의 수지 개선은 환경개선처럼 노력만 하면 되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새마을 운동을 경과하면서 농가 부채는 급증했다.

 

-새마을 운동은 과연 성공적인 농촌 근대화의 모델을 창출했는가. 새마을 운동으로 한국의 농민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력을 갖춘 주체가 되었는가. 과연 박정희 정부가 그렇게 강조한 스스로의 힘으로 서는 자조하는 농민이 되었는가? 새마을운동이 근대화를 앞당겼다는 평가와 함께 우리가 물어야 하는 질문은 바로 근대화의 질에 대한 것이다.


-새마을 운동은 청년들이 농촌에서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하는 데 실패했다. 청년들이 사라진 농촌, 부채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자생력을 상실한 농촌, 자본주의 체제에서 경쟁력을 갖추는 데 실패한 농촌이 만들어진 것도 바로 새마을 운동이 고조되던 1970년대였다.

 

 

이렇게 말도많고 탈도많은 새마을운동, 그런데 새마을 운동은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천재적인 발상으로 시작한 운동은 아니었습니다. 새마을운동과 매~우 닮은 운동들이 이전에도 있었지요.  다음포스팅에서는 새마을운동의 숨겨진 기원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새마을운동에 좀 더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몇 가지 링크와 참고할 만한 책을 걸어둡니다. 

 - 김영미, 『그들의 새마을운동』, 푸른역사

 - 성공회대학교 민주주의연구소 새마을운동아카이브

 - 국가기록원 새마을운동 기록과 현장 

 - 새마을운동 중앙연수원 

 - 새마을운동 발상지 청도 

 - 오마이뉴스 120421 새마을 운동 창립일이 국가기념일이라니



1부 

(1)새마을운동, 정말 새마을이 되었나

(2)새마을 운동의 숨겨진 기원

2부 

(1)조국근대화 빛과 그림자 / 

(2)시국선전뉴스와 대한뉴스

3부 

(1)학교, 그 잔혹한 풍경

4부 

(1)총력안보와 전국민 병사만들기

(2)금지곡의 사회사

5부 

(1)명치유신, 소화유신, 그리고 10월유신

6부 

(1)감옥에 갇힌 진실

(2)증언으로 보는 부마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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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식민의 유산 유신의 그늘" (1) : 유신의 망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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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은 6월항쟁이 25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리고 박정희 시대를 상징하는 10월 유신이 40년이 되는 해 이기도 합니다. 지금 10대는 말할 것 없고 20대, 30대까지 사람들에게 유신이란 시대는 어떤 시대인지 실감하기 힘든 시기입니다.


 하지만 그 시대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박정희가 죽은 지 33년이 지났지만 아직 우리 사회는 박정희의 '추억'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새마을 운동은 다시금 국가기념일이 되었고, 각종 설문조사에서 존경받는 대통령에는 박정희가 빠지는 날이 없습니다. 그리고 2012년 현재 가장 영향력 있는 대통령 후보는 다름아닌 박정희의 딸입니다. 


40년이 지난 지금, 유신, 박정희시대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한쪽에서는 박정희기념관을 지어서 박정희의 업적과 공로만을 치켜 세우고 있습니다. 공과를 같이 봐야 한다는 말이 무색할만큼 '공'쪽에만 무게를 두고 있지요.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여전히 유신시대의 망령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오늘날을 되돌아 보기 위해  '식민의 유산, 유신의그늘'전을 개최하고있습니다. 


직접 가서 보시면 좋겠지만 다른 지방이나,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서 못가시는 분들을 위해, 하나하나씩 풀어가려고 합니다. 


1부 새마을운동, 정말 새마을이 되었나

2부 조국근대화 빛과 그림자 / 전시영상, 시국선전뉴스와 대한뉴스

3부 학교, 그 잔혹한 풍경

4부 총력안보와 전국민 병사만들기

5부 명치유신, 소화유신, 그리고 10월유신

6부 감옥에 같힌 진실

[기획1]시국선전뉴스와 대한뉴스

[기획2]금지곡의 사회사

[기획3]증언으로 보는 부마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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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의 유산, 유신의 그늘전

기간 : 2012년 6월10일~6월30일

장소 : 부산 민주공원 기획전시실

주최 : 6월민주항쟁25주년 부산행사위원회

주관 : (사)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민족문제연구소




[참고링크]

부산민주공원 홈페이지 : http://www.demopark.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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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전쟁"과 19대 국회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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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전쟁"과 19대 국회의 과제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 조세열


세월이 흘러가도 용서못할  대죄, 역사훼손


이명박 정부가 지난 4년간 저지른 잘못을 어떻게 다 일일이 거론할 수 있겠는가. 남북관계, 환경, 인권, 심지어 내세우던 경제까지 엉망이 아닌 분야를 찾기 힘들지만, 세월이 흘러가도 용서받지 못할 대죄 중의 하나가 역사훼손이 아닐까한다.

역대 독재정권 하에서도 정치권력의 역사변조가 지금과 같이 노골적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정통성이 없었던 만큼 속내야 어떻든 겉으로는 독립운동과 사월혁명의 정신을 존중하는 시늉이라도 했다. 그런데 지금의 집권세력은 정권 인수 단계에서부터 이데올로기 공세를 펴면서 거리낌 없이 역사 뒤집기에 나섰다.

이 정부 들어 과거사위원회 통폐합 추진으로부터 시작된 퇴행적 역사파괴는 건국절 제정 시도, 공영방송의 친일,독재 미화 다큐멘터리 방영, 이승만 박정희 백선엽 김백일 동상 건립, 박정희기념도서관 개관, 역사교과서 개악 등 민,관을 불문하고 전방위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 총결산이라 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식민지 시기와 산업화에 대한 편향적 자학적 관점의 극복’을 목표로 연말 개관을 앞두고 있다.


▲지난해 11월 14일, 교과부의 역사교과서 개악에 반발하여 연구소 등 422개 단체가 참여한 "역사정의실천연대" 발족식 모습



역사변조의 확대재생산


이러한 일련의 치밀한 역사변조는, 일본 극우세력의 한국판이라 할 수 있는 뉴라이트 세력이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고 조중동 등 수구언론과 어용관변 단체가 그 논리를 확산시키며, 정부가 이를 정책적으로 뒷받침하는 형태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이들이 비상식적인 역사전쟁을 도발한 배경에는 정권재창출이라는 현실적 목적 외에 나름의 이념적 위기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친일문제나 국가폭력 등 우리 근현대사의 숨겨진 진실이 규명되면서 그간 한국사회의 주류로 행세해왔던 보수세력의 반민족적 반민주적 속성이 여지없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냉전체제하에서 효험을 봤던 색깔론도 더 이상 먹혀들지 않는 현실 속에서 수세적인 국면을 타개할 근본적인 대책이 절박했던 사정도 작용했다.

그들의 주장은 식민지근대화론, 자유국가건설론, 개발독재 경제성장기여론 등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일본 우익의 논리를 그대로 차용하여 한국근현대사를 자학사관에서 벗어나 긍정의 시각으로 해석하자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그리하여 일제강점기는 근대화의 토대가 마련된 시기로, 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로, 박정희는 민족중흥의 지도자로 자리매김한다. 반면 대한민국 헌법에 명문화된 우리 사회의 굳건한 가치기준인 독립정신과 민주주의는 여지없이 능욕당하는 수난을 겪게 됐다. 독립운동을 과대포장된 테러리즘으로 민중민주항쟁은 좌파의 폭동으로 비하하는 망발을 서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지난 4월 6일 일제징용피해자 유족들이 기자회견을 갖고 '독도는 분쟁지역' 및 '친일파 재평가' 등의 친일 발언으로 논란이 된 새누리당 부산 해운대 기장을의 하태경 후보의 사죄와 후보직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뉴시스



10.26에서 멈춰버린 박근혜의 역사시계


그런데 우려스러운 일은 보수세력의 여망을 안고 차기 대권 주자의 행보를 가속화하고 있는 박근혜 씨의 역사관은 더욱 과거회귀적이며 폐쇄적이라는 점이다. 그는 5.16쿠데타를 ‘구국의 혁명’으로 10월유신을 불가피한 결단에서 나온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박정희를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한 일에 대해서는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위협적이고 감정적인 반응을 나타냈던 반면, 일본 우익의 사관을 방불케한다는 평을 받은 뉴라이트의 대안교과서에 대해서는 ‘시대적 쾌거’라고 칭송하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번 총선에서 역사인식의 문제로 이영조 박상일 후보에 대한 전략공천을 전격 철회한 것도 다분히 선거공학의 관점에서 이루어진 고육지책으로 해석된다. 그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은 공천을 주는 쪽과 받는 쪽의 역사인식에 다름이 없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박근혜 씨는 선거기간 내내 이번 총선이 과거를 부정하는 세력과 미래를 지향하는 세력의 대결이라고 누누이 강변했다. 그가 추호의 의심도 없이 긍정하는 과거는 아마 박정희 시대일 것으로 짐작되지만, 이와 같은 이분법은 그 전제부터 잘못되었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친일도 헌정파괴도 사법살인도 그 어떤 잘못도 부정할 수 없는 성역에 속하고 만다. 과거에 대한 성찰을 애써 외면하는 그의 역사 시계는 10.26에서 멈춰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것 같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이러한 역사인식을 고수하는 정치지도자를 한 축으로 전개될 19대 국회에 역사복원을 주문하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일이 될 가능성도 크다. 그러나 역사란 한 정권의 전유물이 될 수 없으며 한 정치인의 입맛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사안도 아니다. 곧 19대 국회의 지형이 드러나겠지만 어느 편이 다수를 차지하든 역사문제에 관한 한 당리당략을 떠나 민족의 미래를 내다보는 거시적 안목으로 접근해야 마땅할 것이다.


▲ 지난 2월 21월, 박정희 대통령 기념ㆍ도서관’ 개관식에 참석한 박근혜 위원장의 모습



역사서술을 객관화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절실하다.


역사와 관련된 19대 국회의 최우선 과제는 역사문제에 권력이 관여하지 못하도록 제도적 장치를 만드는 일이다. 최근 역사교과서 개편과정에서 벌어진 학계 외부의 부당한 압력은 ‘교육은 백년대계’라는 금언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전경련 상공회의소 국방부 경찰청 재향군인회 등 온갖 이익단체와 정부기관까지 나서 구체적인 요구사항을 들이대는 전대미문의 현상까지 일어난 것이 좋은 실례이다. 이런 사태를 방치한다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사와 교육의 대체가 흔들리는 악순환을 면치 못할 것이 자명해 보인다. 따라서 사실상의 사전검열을 방지하고 역사서술의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도록 국회가 법적 제도적 여건을 마련하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또한 현 정부 들어 현저히 왜곡되면서 중단된 과거사청산과 관련된 실질적인 후속조치를 단행해야 한다. 과거사 관련 특별법은 대부분 해당 위원회의 활동 종료 후 재단 또는 사료관을 설치하여 후속사업을 진행하도록 명시해 놓고 있다. 그런데 과거사청산이 미완의 상태에 있음에도 연구,조사,교육이나 피해자에 대한 배상,보상 등 국가 차원의 노력은 완전히 실종되고 말았다. 국가폭력의 피해자 등 국가가 책임져야 할 사안이 다수 밝혀졌음에도 이를 회피하고 있는 현실은 국가의 직무유기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국회 사무처가 공개한 19대 국회의원들이 착용할 배지



역사는 굴절될 것인가 바른 이정표가 될 것인가


3.1운동과 4월혁명으로 대변되는 헌법정신도 구두선에 그치고 방치할 것이 아니라, 독립정신과 민주적 시민의식을 고양시킬 수 있는 방안을 입법을 통해 마련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근현대사 교육의 강화와 국가시험 필수과목 지정, 독립유공자와 후손에 대한 예우 개선과 보훈 교육의 정립, 발굴보훈의 확대를 위한 전면적인 독립운동 인물정보 구축 등을 구체적인 사례로 들 수 있다.

한일간의 과거사문제도 차기 국회가 주목해야 할 분야이다. 한일간에는 여전히 ‘일본군위안부’문제 독도문제 등 과거사 관련 현안이 산적해 있다. '한미일'동맹을 의식한 한국정부의 소극적인 대처는 역사교과서 왜곡이나 독도 영유권 주장에서 나타나듯 일본의 도발을 점차 강화시키는 쪽으로 작용해 왔다. 이미 일회적인 대응이나 외교적 수사만으로는 일본을 제어할 수 없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정부가 적극적인 대처를 회피한다면 국회가 실질적인 정책수립과 대안모색에 나서야 하리라 본다.

이명박 정부 4년 만에 역사정의는 크게 후퇴하고 말았다. 복원하는 데만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들 것이다. 그러나 정신세계의 오염은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근본적이고 중차대한 문제다. 19대 국회가 역사바로세우기를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우리 역사가 이대로 굴절되고 말 것인가 아니면 미래세대의 바른 이정표가 될 것인가는 차기국회의 선택에 달려있다.


『독립정신』63호, 권두언(게재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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