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의 그늘'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2.07.13 [연재]"식민의 유산 유신의 그늘" (6) 죄인의 말
  2. 2012.07.04 [연재]"식민의 유산 유신의 그늘" (5) 조국근대화의 빛과 그림자
  3. 2012.07.03 [연재]"식민의 유산 유신의 그늘" (4) 새마을운동의 숨겨진 기원 (1)
  4. 2012.06.19 [연재]"식민의 유산 유신의 그늘" (3) : 새마을운동, 정말 새마을이 되었나? (1)
  5. 2012.06.19 [연재]"식민의 유산 유신의 그늘" (2) : 45초만에 설치!! (1)
  6. 2012.06.19 [연재]"식민의 유산 유신의 그늘" (1) : 유신의 망령 (1)

[연재]"식민의 유산 유신의 그늘" (6) 죄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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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선생님의 '죄인의 말'




어린이의 참 삶을 위해 평생을 바치신 이오덕선생님 ⓒ보리출판



민주교육운동, 우리말살리기와 글쓰기교육으로 잘 알려진 고 이오덕 선생님은 일제시기부터 교사였다고 합니다. 교원시험에 합격하여 교육자의 길로 들어선 것이지요. 하지만 이오덕 선생님이 갓 교사가 된1944년은 한창 전쟁의 광기가 극을 달하고 있던 때 였습니다. 그 광기는 교육현장에도 예외가 아니었지요.


1982년, 이오덕선생님은 한편의 글을 씁니다. 일제시기, 교사가 되었지만 자신의 위치는 아이들을 군대식으로 훈련시켰던 식민지 교육의 담당자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교육현장의 모습들은 해방 후에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 교육현장에 관한 반성의 글이 바로 '죄인의 말'이었습니다. 


몇 구절 옮겨 볼까요?




'죄인의 말'은 수필집 "거꾸로사는 재미"에 실려있는 글입니다. ⓒ산처럼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교단에서 무엇을 하였던가.  내가 여기서 할 말이 있다면 죄 지은 얘기를 털어놓는 것 뿐이다. 

-일제의 살벌한 군대식 교육은 체질적으로 나에게 거부감을 일으키게 하였지만 그것을 부정하고 다른 참교육을 조금이라도 실천할 만한 나대로의 교육관이나 교육이론이 있을 수 없었다.

-1년 남짓한 그동안에 나는 우리 민족의 아이들을 일본 제국의 아이들로 훈련하는 일에 충실히 협력하였던 것이다. 

-해방이 되어 잠시 꿈같은 날을 보냈지만, 일제의 망령은 모든 학교 교육에서 조금씩 되살아 났다. 아동 중심이니, 민주교육이니 하는 것은 입으로만 지껄이는 말이 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자... 교육행정은 그 어느 때보다 심하게 교육을 그 세부 실천에 이르기까지 간섭함으로써, 학교교육은 온전히 자주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 교사들은 다만 명령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여 그대로 이행하는 기계로서 존재할 수 밖에 없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이 또한 교사의 지시 명령에만 움직이는 기계가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다.


'죄인의 말'에서 이오덕 선생님은 자신을 아이들을 꼭두각시로 훈련시킨 교관으로, 돈을 징수하는 세금쟁이로, 아이들을 획일화 한 폭군으로, 비참한 경쟁을 강요한 깡패로, 선거운동을 한 위선자로 묘사하며 반성합니다. 이오덕선생님이 그 후 보여준 모습은 바로 이 지극한 자기반성에서 출발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이오덕 선생님 개인만 죄인이었을까요? 그럴리가요. 수많은 교사들이 죄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일본제국이 있었고, 독재정권이 자리를 잡고 있었지요. 이들은 수많은 이오덕들을 죄인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학교, 그 잔혹한 풍경



부산에서 전시했던 "식민의 유산 유신의 그늘" 전 ⓒ민족문제연구소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을 전후해서 학교는 전쟁에 동원할 소국민을 양성하는 현장이 되어갔습니다. 그나마 있었던 조선어 과목은 아예 없어졌고 일본어 읽기와 쓰기는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전시동원을 위한 제식훈련, 체조 군가풍의 국민가요. 전차와 글라이더 만들기가 교과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1941년 일제는 소학교의 명칭을 국민학교로 고쳤습니다. 국민학교령이 칙령으로 공포된 것이었지요. 또한 조선총독부는 민족교육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본격적인 황국신민화의 시작이었습니다. 




국민학교로 바뀐 것이 황국신민화의 시작이라는 것은 국민학교령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목적 부터가 달랐습니다. 국민학교령의 목적은 '국민의 기초적 연성을 목적으로 한다'였습니다. 연성은 일종의 군사용어입니다. 연성도장, 연성도장과 같이 심신과 기예를 단련한다는 말이지요. 한만디로 국민학교는 황국신민을 단련시키는 연성도장이었습니다. 


국민학교령은 칙령 제 148호로 쇼와16년(1941년) 반포되었습니다. ⓒ 일본 국립공문서관 아시아역사자료센터



국민학교령의 본문입니다. 기초적 연성이라는 표현이 나와있습니다. ⓒ 일본 국립공문서관 아시아역사자료센터


군국주의 체제로 들어서면서 일본은 기존의 영국, 프랑스를 배척하고 나치의 교육법을 반영합니다. 일본의 은행법이 히틀러의 도이치 은행법을 도입한 것 처럼 국민학교는 나치가 만든 폴크스 슐레를 그대로 직역한 말입니다. 국민학교 만이 아니었습니다. 수신, 국어, 국사 지리 네 과목은 국민과(國民科)라고 불렸습니다. 이 외에도 국민복, 국민가요.. 등등 국민은 어느새 조선 땅에 아무 거리낌 없이 들어와 자리잡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일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패전 후 국민학교라는 말을 바로 버렸습니다. 한국은 어땠을까요? 일본으로 부터 해방이 됬지만 우리는 '국민학교'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대로 썼습니다. 결국 김영삼정부가 들어서고나서야 지금의 '초등학교'로 바뀌었지요. 



일제시기와 다르지 않은 박정희시대 학교의 모습


앞에 국민학교 명칭을 이야기 했습니다만. 이름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오덕 선생님의 말 따마나 해방이 되었어도 학교의 모습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일제의 망령은 학교 교육에서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었습니다. 


1968년 12월 박정희가 선포한 국민교육헌장


요즘도 외우라면 외우실 분들 많을겁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예전에 익숙하게 보던 풍경들이 다시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국민학교에서 교육칙어 대신 국민교육헌장을, 황국신민서사 대신 국기에 대한 맹세를 애국조회때마다 낭독해야 했습니다. 


머리에 고속도로가 난 학생들, 과연 학창시절의 즐거운 추억이기만 할까요?


머릿 속 뿐만이 아닌 겉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생들에게 허용된 것은  '스포츠형'머리, 또는 단발머리에 교복, 교모, 그리고 교련복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학생답지 않은' 모습들이 보이면 가차없었습니다. 선도부가 교문앞을 지키고 있는 등교길 풍경, 바리깡이나 가위를 든 학생주임 선생님이 머리에 '경부고속도로'를 내는 것은 일상다반사였습니다. 그것 뿐이면 그나마 다행이지요. 


가혹한 체벌과 침묵의 강요는 학생들을 그저 복종하는 인간으로 길러냈습니다. 



물론 일제시기와 70년대 그리고 지금 을 단순히 비교하기는 힘들 겁니다. 사회분위기라는 것이 있고, 민주화 과정이 있었지요. 하지만 아직도 갈길은 멀고도 멀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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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식민의 유산 유신의 그늘" (5) 조국근대화의 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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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와 "군사혁명 1주년 산업박람회"  





정당성이 취약할수록 선전은 더 요란하게 마련입니다. ⓒ한겨레


정당성이 취약할수록 선전은 더 요란하기 마련입니다. 어제오늘 이야기 만은 아닙니다. 일제시대도 그랬지요. 


 일제는 조선을 강점한지 5년만인 1915년 9월 11일 시정 5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라는 대규모 박람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했습니다. 요즘 한참 진행중이 여수 엑스포처럼 산업박람회지요. 


조선물산공진회


조선의 산업을 진작시킴과 동시에 식민지 경영의 성과를 과시하기 위한 정치적인 의미가 있었지요. '근대화'된 경성의 모습을 과시하면서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경성의 중심이고 조선의 정궁이었던 경복궁에서 말이지요. 이는 단순히 '경복궁에서 했다.' 의 의미가 아닙니다. 개최하면서 일제는 대원군이 복원한 경복궁의 전각들을 철거해 버립니다.그리고 그 터에 공진회를 위한 가건물들을 지었습니다. 50여일의 공진화가 끝난 후 나머지 가건물그대로 헐렸습니다. 



경복궁이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그리고 총독부 신청사 공사가 시작되었지요.(그 전에 총독부건물은 남산에 있었습니다.) 이미 경복궁 자리에 총독부 건물을 세우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겁니다. 여담입니다만 지금도 경복궁에 보이는 잔디가 다 예전에 건물들이 있던 자리입니다. 한국전통에서 잔디는 무덤에나 쓰이던 풀이었지요. 그리고 그 후 총독부는 몇 년 마다 박람회를 열어서 조선통치의 실적으로 자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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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쿠데타 1년, 경복궁에서 비슷한 행사가 열립니다.


그런데, 해방이후 경복궁에서 또 비슷한 행사가 열립니다. 이름하여 " 군사혁명 1주년 기념 산업박람회" 였지요. 1962년 4월 20일부터 47일간 열린 산업박람회는 경제개발이 본격화 되기도 전에 그 성과를 대대적으로 선전한 행사였습니다. 

군사혁명 1주년 기념 산업박람회장은 다름아닌 경복궁에서 개최되었습니다.




그래서, 박람회는 경제개발보다 소위 "혁명", 군사쿠데타의 정당성을 선정하는데 집중했습니다. 박람회의 건물 이름이 

"혁명기념관", "반공관", "5개년경제계획관", "재건국민관" 이라는 것을 봐도 확실히 보이는 것이지요. 


산업박람회장 사진, 저기 멀리 구 조선총독부 건물이 보이고 근정전, 경회루가 보입니다.




구호와 슬로건 뒤에 가려진 부패 공화국


1962년부터 경제자립과 경제성장을 목표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었습니다


. 기아와 빈곤, 보릿고개로 상징되던 최빈국 한국은 박정희 집권기에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며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많은 구호와 슬로건들이 나왔습니다. 구호의 종류는 각 분야마다 엄청나게 많치만 몇가지만 경제개발과 관련된 구호 몇 가지만 뽑아봐도 그 시대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부산 민주공원에 전시했던 패널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싸우며 건설하자 / 중단없는 전진의 해  / 올해는 총화 유신의 해 / 아껴서서 자립생활 저축해서 경제건설 / 총화유신 민족중흥 / 수출건설에서 조국근대화는 증산 / 증산이다 건설이다 65년은 일하는해 / 10월유신 100억불 수출 1000불 소득 / 수출은 국력의 총화 / 재건에 때가 없다 지금부터 시작하자 / 수출상품은 국력총화의 예술품 / 노사협조 다짐해서 자립경제 이룩하자 / 올해는 건설의 해 / 중단하는 자는 승리하지 못한다.  / 뭉쳐서 이룩하자 자립경제 자주국방 / 근면한 국민성은 번영을 기록한다



그러나 성장의 과실이 재벌에게 돌아가는 구조는 이미 박정희 정권초기부터 만들어졌고,  정경유착으로 인한 각종 비리와 부패의 뿌리역시 깊어졌습니다. 민주당의 부패를 비판하던 군사정부역시 부패하기 시작했습니다. 본격적인 시작은 정치참여를 앞두고 정치자금을 마련하는 가운데 벌어졌습니다.  새나라 자동차사건, 빠찡꼬사건, 증권파동, 워커힐사건 등 이른바 4대의혹 사건 이었지요. 군사정권이 쿠데타 당시 내세웠던 부정부패 일소는 점점 퇴색되어 자신들이 또다른 부정부패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간에는 구악뺨치는 신악 이라는 말이 돌았다고 합니다. 


증권파동

중앙정보부가 개입을한 주가조작 사건. 가격만 형성시켜놓고 실질적 매매는 이루어 지지않는 '불성'이라는 거래방법이 쓰였다고 한다. 


워커힐 사건

군사정권은 61년 성동구 광장동 부지를 수요하고 워커힐을 지었다. 일본으로 떠나는 주한미군의 달러를 잡기위해서였다. 하지만 중앙정보부가 공사자금 가운데 상당부분을 횡령하여 공화당 정치자금으로 사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새나라 자동차 사건

19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자동차 공업 보호법을 재정하여 향후 5년간 자동차 부품수입을 무관세로 했고, 새나라조립공장을 건설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완성된 일본산 소형 자동차를 관세없이 수입하여 업자에게 팔았고, 이 이익은 공화당 창당자금으로 사용되었다. 


빠찡꼬 사건

중앙정보부가 자유당, 민주당 때 금지되었던 빠찡꼬 기계를 500대나 수입하게 하고 영업허가를 내주는 대신에 돈을 챙신 사건이다. 



삼분이란 시멘트, 밀가루, 설탕 을 말합니다.


게다가 군정말기인 1963년에는 이른바 3분 폭리사건이 터집니다. 여기서 3분(3粉) 이란 시멘트, 밀가루, 설탕을 말합니다. 1963년은 태풍과 폭우로 쌀값이 폭등했고 밀가루에 대한 수요도 늘었습니다. 설탕도 수요가 급증했고, 시멘트는 품귀현상까지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 사건들에는 공동된 소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기업들이 정부로부터 지원받은 미국의 원조달러로 설탕, 밀가루 등을 수입하고 국내시장을 장악해 폭리를 취하고 정부는 기업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는 방식이었습니다.  설탕과 밀가루등의 가격이 갑자기 2,3배로 폭등해서 국민에게 엄청난 피해를 준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1970년대 내내 부동산투기 열풍이 불었습니다. 1970년대 후반 아파트 등 주택투기가 불붙었습니다. 복부인이란 말도 이때 생긴 신조어죠. 아파트 분양때 마다 투기행렬이 장사진을 이루었습니다. 1978년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분양과정에서 발생한 사회유력층의 불법, 부정행위는 대표적인 투기사건입니다. 


'조국근대화'는 부패와 비리로 시작한 것이지요. 




조국근대화의 두얼굴, 경부고속도로와 전태일


강준만교수의 한국 현대사산책을 보면 70년대는 전태일과 경부고속도로라는 상징으로 표현할수 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조금만 옮겨보죠





한강의 기적, 그 기적의 이면에 숨은 잔인한 인권유린... 

전태일은 가고 없다. 사람들은 전태일을 잊어버렸다. 남은건 경부고속도로다


경부고속도로의 중단없이 쭉 뻗은 길은 발전과 번영의 표상이었다. 모든게 '고속'이었다. 군사작전이었다. 오직 전짐남니 있을 뿐이었다. (중략)그러나 동시에 경부고속도로가 하나였던 것을 가로지르면서 만들어낸 경계는 새로운 갈등과 차별을 잉태시켰다. 농촌과 지방인구는 그 길에 흡수되어 서울과 도시에 내전져졌고 권력과 부의 집중과 전횡을 낳는 시스템이 고속도로처럼 빠른 속도로 구축되기 시작했다. (중략) 과연 무엇을 위한 조국근대화인가 하는 의문을 음미할 시간조차 없었으며 그게 용납되지도 않았다. 


갑작스럽게 도시에 던져진 사람들은 노동자와 빈민이 되어 '조국근대화'를 위해 싼 노동력을 제공해야만 했다. 싸도 너무 쌌다. 인격적인 모독까지 가해졌다. 저항은 절대 금기였다. 전태일의 분신자살이 그걸 웅변해 주었고, 이후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이 70년대 내내 계속된 그런 '억압과 착취'의 시스템을 상징적으로 폭로했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3 - 1970년대편, 인물과 사상사






상암동 박정희 기념관에 전시되어있는 여공들의 모습



박정희 기념관에는 미싱질을 하는 여공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박정희가 이끈 조국근대화를 이룬 것은 근로자들이라는 의미겠지요. 하지만, 당시 여공들은 어떤 취급을 당하면서 일했을까요? 동일방직사건을 보면 대강 답을 알 수 있습니다. 


권리의식이 높던 동일방직 노동자들은 1972년 한국 최초의 여성지부장을 선출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했습니다. 회사와 경찰은 계속 노조를 탄압하며 대의원 대회를 무산시켰지요. 1976년 7월 대의원 대회 때, 여성노동자들은 아무리 비열해도도 옷을 벗으면 손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옷을 벗고 경찰에 항의했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무자비하게 이들을 구타하고 연행해갔습니다.


동일방직노동자들의 비극은 이것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1978년에는 동일방직 오물투척사건이 일어났습니다. 1978년 2월 회사측의 협박을 받으면서도 동일방직노조가 대의원 선출 투표를 감행하려하자 회사 측 남성노동자들이 똥을 날라다가 여성조합원에게 퍼부었던 것입니다. 

경찰들은 구경만 하였고, 도움을 요청하는 여성노조원들에게는 냉소와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이 사건이 소위 ‘동일방직 똥물세례 사건’이다. 회사 측은 노동자 126명을 해고하였고 해고자 명단을 각 사업장에 돌려 재취업을 봉쇄하였습니다. 



소위 동일방직 똥물사건 사진입니다.



조국근대화의 역군이었고, 산업전사(戰士)로 불린 노동자들은 비참한 작업 조건 속에서 말 그대로 전사(戰死)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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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식민의 유산 유신의 그늘" (4) 새마을운동의 숨겨진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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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 발상지 논란



새마을운동 발상지 논란의 주역 청도와 포항, 잠시 검색만 해봐도 각각 발상지로 기사가 나옵니다.

경북에 살거나 새마을 운동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아실 이야기이지만, 현재 새마을운동은 발상지 논란이 있습니다. 경북 청도군 청도읍 신도리와 경북 포항시 기계면 문성리가 서로 원조라고 다투고 있는 것이지요. 두지역이 각자 발상지라고 주장하고 공금을 들여서 기념관, 연구까지 하는것도 모자라 2009년에는 법정공방까지 벌였습니다. 포항시의원 몇명과 포항 새마을회에서 경상북도와 청도군을 상대로 청도 신도1리가 새마을운동의 발상지라는 것을 써서는 안된다고 사용금지가처분 신청을 낸 거죠. 


2009년 법원은 발상지 개념을 두고 서로 다른 주관적인 기준, 판단에 따른 다툼에 불과하다며 가처분 신청을 각하했다고 합니다. 법원이 각하했지만 그 와중에 경남 동래군 기장면 만화리(현 부산 기장군 만화동)의 동서부락이 발상지라는 주장이 새로 제기되었습니다. 점입가경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네요. 


최근에도 검색을 해 보면 아직도 청도와 포항은 각자 자신들이 발상지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는 것이지요. 문제는 이 '발상지' 논란에 국고가 투입되어서 기념관을 짓고 연구용역을 주어서 근거를 찾고 했다는 것이지요. 


각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재미있습니다. 대학교에 의뢰해서 증빙자료도 첨부해 놓고 있군요. 궁금하신 분들은 한번 보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청도군 청도읍 신도리 http://www.새마을운동 발상지.kr


VS


포항시 기계면 문성리 : http://saemaul.ipohang.org/



청도도, 포항도, 그리고 부산 기장도1970년대 초 박정희 전 대통령의 발언, 발상을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지자체의 입장에서는 그게 중요할 겁니다. 하지만 새마을 운동자체로만 생각하면 이야기는 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게 그전에 아무런 움직임, 경험이 없이 갑자기 생겨난 것일까요?


새마을 운동의 기원은 바로 일제시대부터 5.16군사정변시기까지 몇 가지를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농촌진흥운동과 국민총력운동, 재건국민운동 이지요. 



새마을 운동의 숨겨진 기원 - 농촌진흥운동, 국민총력운동



농촌진흥운동은 새마을운동의 숨겨진 기원이지요



농촌진흥운동은 1932년부터 1940년까지 진행된 조선총독부 주도의 관제 농민운동이었습니다. 총독부는 '농가경제 갱생', '자력갱생'을 표방을 했었지만, 실제로는 경제 갱생보다는 그 구호아래 농민들을 호율적으로 통제할 목적이 있었습니다.


 농촌진흥운동은 새마을운동과 여러가지 부분에서 유사한 점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경험이라는 면에서 봐도 마찾가지였지요. 최고지도자였던 박정희 뿐만 아니라 관료부터 마을의 사람들까지 모두 농촌진흥운동을 경험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박정희의 새마을운동과 우가키 가즈시게의 농촌진흥운동은 닮은 점이 많습니다.




농촌진흥운동의 동원방식과 프로그램들은 새마을운동의 모습들과 비슷한 부분이 많습니다. 몇 가지를 들어볼까요?


우선 배경과 그 대응이 비슷합니다. 농촌진흥운동이 조선의 경제공황, 민족해방투쟁이라는 위기를 막기위한 미봉책이었듯이 새마을 운동역시 심각한 경제발전의 불균형으로 인해 농촌이 피폐해지는 상황에서 추진되었습니다. 농촌의 피폐는 농촌만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지요. 농촌이 못살게되면 농민들을 농촌을 떠나 도시로 옵니다. 이 사람들이 도시빈민층을 형성하게 되고 노동문제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지요.


다음으로는 정치, 사회구조로 생긴 농촌의 위기를 농민의 내부 문제로 해결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새마을운동의 슬로건은 잘 알려져 있듯이 '근면, 자조, 협동' 이었습니다. 그런데 농촌진흥운동도 비슷한 슬로건이 있어요. '자력본원(自力本願)' 과 '자력공려(自力共勵)' 입니다.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갱생한다는 것이지요, 자력공려의 공려는 협동운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새마을 운동에서 보이던 자조와 협동과 같은 내용이지요. 결국 농촌진흥운동에서 농민들의 문제는 농민들의 무지, 게으름, 낭비때문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사회구조의 문제를 농민 개인의 문제로 돌려버렸던 것이지요. 새마을 운동도 여기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당시 농촌진흥운동의 방식이 조선총독부의 관료기구를 이용해서 총독부 - 도지사 - 도 - 군 - 동 - 리 체계로 명령이 내려갔고, 주요 사업중 하나가 각 부락에 중견인물을 육성하는 것이었니다. 농촌지배의 파트너였습니다. 새마을 운동에도 비슷한 것이 있지요? 바로 '새마을지도자'입니다.


마지막으로 국가가 주도한 관제 농민운동이라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농촌진흥운동이건 새마을 운동이건 농민들은 이 운동들의 핵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율성은 많이 떨어졌습니다. 농민들의 운동을 국가가 계획하고 지도했다는 점에서, 행정기관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관제'라는 말은 두 운동을 계속 따라다닐 겁니다. 


국민총력운동시기 일본은 조선에 강력한 전시동원체제를 구축합니다.



이러한 위로부터의 관제운동은 농촌진흥운동으로만 끝났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심해졌습니다.  1937년 중국을 침략한 일제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결성합니다. 모든 주민을 애국반으로 편성해서 통제했지요. 


1941년 중일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될 즈음 조선총독부는 국민정신총동원운동과 농촌진흥운동을 통합해서 국민총력운동을 만듭니다. 이 국민총력운동 아래 일본은 조선에 강력한 전시동원체제를 구축하게 됩니다. 




새마을운동의 예행연습 - 재건국민운동



5.16 군사정권이 주도한 재건국민운동, 새마을 운동의 예행연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의 농촌진흥운동, 국민총력운동이 일제시기의 운동이었다면 재건국민운동은 5.16군사정변 직후 벌어진 운동입니다. 


5.16 군사정권은 1961년 국민정신을 개조하고 국가를 재건한다는 명목으로 국가재건범국민운동을 시작했다. 내무부가 주관을 했었고 1964년 재건국민운동본부가 해체될 때까지 시행되었지요. 


서울시와 각 도에 지부가 생겨나고 읍, 면, 동과 리 단위에 이르기까지 촉진회가 조직되었습니다. 재건국민운동본부는  반공과 내핍, 근면정신 고취, 생산 및 건설의식 증진, 도덕적 양양, 정서순화, 국민체위(體位)향상 등을 과제로 내걸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재건국민운동은 전국에 재건청년회 4만5천여개, 재건부녀회 3만 3천여개가 되었고, 62년도에 들어가면 50만여명의 요원과 360만명에 이르는 청년, 부녀회원을 확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건국민운동의 방식은 꽤 강압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재건국민운동은 박정희의 평소 지론인 '인간개조운동'을 포함했습니다. 각급 학교학생들을 '혁명공약'을 달달 외워야 했고 "혁명공약을 이루자"라는 노래를 불러대야 했습니다. 학급 학교에 장교들을 파견해서 지휘, 감독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 재건체조와 신생활복, 국민가요 등을 제정해 의무적으로 시행케 했다. 이러한 방식은 당시에도 일제말 국민총력운동본부가 제정한 라디오체조(보건체조)나 국민복, 또는 국민가요를 부활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고 합니다. 


결국 재건국민운동은 큰 성과를 보지 못하고 끝나버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경험을 당연히 새마을운동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재건국민운동본부에서 발간했던 "재건통신"



부산에 전시한 새마을 운동 관련 부분. ⓒ 민족문제연구소



새마을운동을 두고는 여러가지 평가가 엇갈립니다. 대단히 성공적으로 이야기 되고 있는 새마을 운동. 그러나 좋다고 말할 수 없는 지금 농촌의 풍경이 그 결과를 이야기 해 주는 것이 아닐까 다시한번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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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식민의 유산 유신의 그늘" (3) : 새마을운동, 정말 새마을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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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의날, 새마을식당, 새마을운동

 

언제부턴가 다시 새마을운동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새마을 깃발도 다시 우리 곁에 돌아오는 느낌입니다

 

4월쯤에 거리를 지나면서 새마을운동 깃발이 거리 여기저기 휘날리고 있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왜 갑자기 새마을깃발이지? 싶었는데 알고보니 제 2회 새마을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거리마다 단 것이더군요. 공식적으로 끝나지 않았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새마을운동이 다시 눈앞에 다가오는 느낌이었습니다. 

새마을의날은 언론에 거의 보도되지 않은 채 2011년 2월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었고, 국무회의에서 결정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매년 4월22일 새마을의 날은 국가기념일이 되었지요.

 

 

우리 주변에는 60~70년대 컨셉의 식당이 꽤 있습니다. 새마을식당은 그중 하나입니다. [출처 : 새마을식당 홈페이지]

 

 

 

또하나 우리 주변에서 유행하는 새마을이 있습니다. 새마을식당이지요. 비단 특정업체 '새마을식당' 뿐만이 아니라 몇년 전 부터 60~70년대 식의 식당들이 복고풍이라는 이름을 달고 많이 생겼습니다. 왠지 촌스러운 인테리어에 옛날 영화 포스터, 양은냄비, 막걸리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네요. 


새마을 식당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왜 이런 컨셉을 잡았는지 설명이 있습니다. 

 

“1960~70년대식의 인테리어와 식사시간에 흘러나오는 새마을 노래는 먹는이로 하여금 그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켜 어린 시절과 고향생각에 푹 빠지게 만들어버립니다”

 

“정감있는 컨셉”, “향수가득한 어린시절” “고객들의 향수 자극”

 

 추억, 또는 향수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겠네요. 그 중 사업가가 잡은 소재가 새마을 운동이었던 것입니다. 어느순간에 우리주위에 다시 보이고 있고, 어르신들의 머릿속에 아련한 추억으로 자리잡은 새마을운동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박정희가 주도한 새마을운동

 

부산에 전시중인 "식민의 유산 유신의 그늘" 전시 중 새마을운동 부분입니다.


새마을 운동은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시작된 운동입니다. 1970년 4월 한해대책 전국지방장관회의에서 '새마을가꾸기 운동'을 제창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 운동은 1971년 '새마을운동'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정권이 직접 나서서 전국적으로 퍼져갔습니다. "새마을의 노래"를 직접 작사작곡할 정도로 박정희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습니다. 1973년부터 새마을운동은 전국민적운동으로 확산되었고, 1975년에는 공장새마을운동, 도시새마을운동으로 발전했다고 합니다.


언제나 새마을운동하면 근면, 자조, 협동이 들어갔습니다. 농민들에게 이것이 부족하다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새마을운동은 일종의 민족성 개조운동이기도 했습니다. 새마을운동은 "자포자기에 빠진 농민들에게 '하면된다'는 신념을 준 위대한 정신개혁운동이며 풀뿌리 민주주의의 근간이자 국민정신함양운동이었다" 라고 선전되고 있습니다. 박정희대통령의 가장 위대한 치적이라는 새마을운동, 과연 새마을운동은 농민을 잘 살게 만들었을까요?

 

한국사 최대, 최장의 국가대중운동이라는 새마을 운동은 극단적인 찬양과 비판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국근대화의 세계적인 성공사례의 반면에는 상명하복의 권위주의, 일사불란한 획일주의, 외형적 실적주의, 집단주의라는 폐해를 남겼다는 비판이 있지요. 

 


새마을운동의 성과와 한계, 정말 농촌은 잘 살게 되었을까

 

새마을 운동이 외형상 농촌의 환경을 크게 바꾼 것은 사실입니다. 새마을운동은 당시 남아도는 시멘트를 각 부락에 배당하면서 이루어 진 것이니까요. 많은 흙길들이 시멘트 도로로 바뀌고 초가지붕이 시멘트 기와로 바뀌면서 지금의 농촌모습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지요. 다양한 소득증대사업이 전개되면서 농민들은 '잘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갖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소득도 늘었다고 합니다. 1970년대 10년동안 농가소득은 10배가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농가부채가 쌓이기 시작한건 이때부터였지요. 농민들의 이농은 가속화 되었습니다. 


새마을운동의 평가는 어떻게 되어야 할까요? 그건 지금 농촌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국민대 김영미선생님의 책 '그들의 새마을운동'중에 일부분을 올려봅니다.



김영미선생님의 "그들의 새마을운동"입니다.


 

▲김영미, 그들의 새마을운동, 푸른역사, 2009

-잘살기 운동이라면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나 존재했다. 해당 시대 해당 지역의 각 주체들은 최선을 다해서 잘 살기 위해 노력해왔다. 새마을운동을 통해서 비로소 농민들이 잘 살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한다면 그동안 농민들은 게으름뱅이에 잘 살려는 의지가 없었으며 농촌 사회에는 부지런한 농군은 하나도 없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것은 농민에 대한 우리들의 선조에 대한, 악의적인 모함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새마을운동으로 농촌 근대화는 빠른 속도로 앞당겼다. 그러나 새마을 운동을 경과하면서 농민들이 진정으로 잘 살게 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잘 살게되었다는 지표는 대단히 가시적인 것들이다. 마을환경의 근대화는 대단히 효과적이었다. 이 가시적인 성과가 새마을 운동을 성공적인 근대화운동이었다고 평가하는 주요 지표로 꼽히고 있다.그러나 소득증대를 통한 농가경제의 수지 개선은 환경개선처럼 노력만 하면 되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새마을 운동을 경과하면서 농가 부채는 급증했다.

 

-새마을 운동은 과연 성공적인 농촌 근대화의 모델을 창출했는가. 새마을 운동으로 한국의 농민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력을 갖춘 주체가 되었는가. 과연 박정희 정부가 그렇게 강조한 스스로의 힘으로 서는 자조하는 농민이 되었는가? 새마을운동이 근대화를 앞당겼다는 평가와 함께 우리가 물어야 하는 질문은 바로 근대화의 질에 대한 것이다.


-새마을 운동은 청년들이 농촌에서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하는 데 실패했다. 청년들이 사라진 농촌, 부채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자생력을 상실한 농촌, 자본주의 체제에서 경쟁력을 갖추는 데 실패한 농촌이 만들어진 것도 바로 새마을 운동이 고조되던 1970년대였다.

 

 

이렇게 말도많고 탈도많은 새마을운동, 그런데 새마을 운동은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천재적인 발상으로 시작한 운동은 아니었습니다. 새마을운동과 매~우 닮은 운동들이 이전에도 있었지요.  다음포스팅에서는 새마을운동의 숨겨진 기원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새마을운동에 좀 더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몇 가지 링크와 참고할 만한 책을 걸어둡니다. 

 - 김영미, 『그들의 새마을운동』, 푸른역사

 - 성공회대학교 민주주의연구소 새마을운동아카이브

 - 국가기록원 새마을운동 기록과 현장 

 - 새마을운동 중앙연수원 

 - 새마을운동 발상지 청도 

 - 오마이뉴스 120421 새마을 운동 창립일이 국가기념일이라니



1부 

(1)새마을운동, 정말 새마을이 되었나

(2)새마을 운동의 숨겨진 기원

2부 

(1)조국근대화 빛과 그림자 / 

(2)시국선전뉴스와 대한뉴스

3부 

(1)학교, 그 잔혹한 풍경

4부 

(1)총력안보와 전국민 병사만들기

(2)금지곡의 사회사

5부 

(1)명치유신, 소화유신, 그리고 10월유신

6부 

(1)감옥에 갇힌 진실

(2)증언으로 보는 부마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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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식민의 유산 유신의 그늘" (2) : 45초만에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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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9일 새벽에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출발해서 한 5시간이 걸려서 부산 민주공원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리고... 45초만에 설치를 완료했습니다!

 

.....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느 전시가 그렇겠지만 전시설치라는게 시간이 꽤 걸립니다. 생각으로 패널이나 그림들을 만들지만 그게 실제로 눈앞에 놓이면 여러 상황도 생깁니다. 이번 전시도 실제로는 이틀을 꼬박 준비해서야 설치할 수 있었습니다. 


전시를 준비하면서 구석에 삼각대를 설치 해 놓고 자동으로 찍게 한 다음에 나중에 합치니 재미있는 영상이 나오네요~^^ 이 영상이 45초입니다.


 

[동영상1] 23초




[동영상2] 22초

 



이런 과정을 통해서 전시가 완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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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식민의 유산 유신의 그늘" (1) : 유신의 망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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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은 6월항쟁이 25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리고 박정희 시대를 상징하는 10월 유신이 40년이 되는 해 이기도 합니다. 지금 10대는 말할 것 없고 20대, 30대까지 사람들에게 유신이란 시대는 어떤 시대인지 실감하기 힘든 시기입니다.


 하지만 그 시대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박정희가 죽은 지 33년이 지났지만 아직 우리 사회는 박정희의 '추억'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새마을 운동은 다시금 국가기념일이 되었고, 각종 설문조사에서 존경받는 대통령에는 박정희가 빠지는 날이 없습니다. 그리고 2012년 현재 가장 영향력 있는 대통령 후보는 다름아닌 박정희의 딸입니다. 


40년이 지난 지금, 유신, 박정희시대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한쪽에서는 박정희기념관을 지어서 박정희의 업적과 공로만을 치켜 세우고 있습니다. 공과를 같이 봐야 한다는 말이 무색할만큼 '공'쪽에만 무게를 두고 있지요.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여전히 유신시대의 망령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오늘날을 되돌아 보기 위해  '식민의 유산, 유신의그늘'전을 개최하고있습니다. 


직접 가서 보시면 좋겠지만 다른 지방이나,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서 못가시는 분들을 위해, 하나하나씩 풀어가려고 합니다. 


1부 새마을운동, 정말 새마을이 되었나

2부 조국근대화 빛과 그림자 / 전시영상, 시국선전뉴스와 대한뉴스

3부 학교, 그 잔혹한 풍경

4부 총력안보와 전국민 병사만들기

5부 명치유신, 소화유신, 그리고 10월유신

6부 감옥에 같힌 진실

[기획1]시국선전뉴스와 대한뉴스

[기획2]금지곡의 사회사

[기획3]증언으로 보는 부마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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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의 유산, 유신의 그늘전

기간 : 2012년 6월10일~6월30일

장소 : 부산 민주공원 기획전시실

주최 : 6월민주항쟁25주년 부산행사위원회

주관 : (사)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민족문제연구소




[참고링크]

부산민주공원 홈페이지 : http://www.demopark.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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