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인명사전'에 해당되는 글 39건

  1. 2013.01.14 自畵像_벼락이 떨어져도 나는 내 서재를 뜰 수가 없다 (3)
  2. 2013.01.07 절망을 희망으로, 희망을 행동으로!
  3. 2012.12.05 박정희 혈서기사가 조작이라구요? - 종북놀음과 박정희 혈서 (1) (3)
  4. 2012.12.05 박정희 혈서기사가 조작이라구요? - 종북놀음과 박정희 혈서(2) (10)
  5. 2012.12.05 다카키 마사오, 민족문제연구소에 문의가 많아 간략히 정리해드리겠습니다. (27)
  6. 2012.09.03 꼭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_ 친일인명사전 앱 (10)
  7. 2012.08.23 민주 사회가 지탱되는 기본원리가 무너졌다
  8. 2012.07.16 민족문제연구소 심정섭 회원, 근현대 자료 215점 기증
  9. 2012.07.13 [연재]"식민의 유산 유신의 그늘" (6) 죄인의 말
  10. 2012.06.29 친일인명사전! 당신의 이름으로 아이들, 지역주민, 일본 조선학교에 전했습니다 (4)

自畵像_벼락이 떨어져도 나는 내 서재를 뜰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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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지식채널ⓔ가 지난 2012년 11월 친일연구의 선구 임종국선생의 기일을 맞아 선생이 우리에게 남긴 것들을 되돌아보게 했습니다.

 

 

 

 

친일문제 연구에 평생을 바치셨던 임종국 선생이 1989년 11월 60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돌아가신 후,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결코 손에서 놓지 않았던 선생의 친일연구 업적과 유지를 이어가기 위해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는 설립되었습니다.

 

그리고 2005년 연구소는 친일청산과 역사정의실현이라는 선생의 뜻을 더욱 널리 확산시키고 이를 실천하는 후학을 격려하고자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를 만들고 <임종국상>을 제정해 2012년 11월까지 총 6회의 시상식을 가졌습니다.

 

1965년 굴욕적인 한일협정이 체결되자 우리 근현대사 왜곡의 근본 원인이 과거사 청산의 부재에 있음을 직시하고, 사실상 금기시되었던 친일문제 연구에 착수해 이듬해인 1966년 <친일문학론>을 발표해 지식인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던졌던 선생처럼, 연구소는 온갖 음해와 방해 속에서도 18년을 한결같이 오로지 사실과 진실만을 좇아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할 수 있었습니다.

 

온갖 거짓 역사가 부끄럼도 없이 판을 치는 2013년 오늘,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다시 가슴깊이 새기게 됩니다.

 

 

 

 

EBS 지식채널ⓔ <자화상>에 활용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영상다큐를 더 보고 싶으시다면 아래를 클릭해 보세요.

 

  친일연구의 선구자, 임종국

  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다둥이카드소지자  민족문제연구소 편찬실
- 세상도, 사람도 늘 변화 · 발전함을 믿는다.
친일인명사전의 기적,역사관 건립으로 이어가겠습니다.
TEL 02-969-0226 / E-mail 
historyac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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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을 희망으로, 희망을 행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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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을 희망으로! 희망을 행동으로! 

역사의 진실과 정의를 담는 시민역사관

 

 

 

 

     역사전쟁은 단판의 승부가 아닙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09년 국민의 힘으로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했습니다.

            2012년 역사다큐 백년전쟁! 거짓역사를 향해 돌직구를 던졌습니다.

            2013년 올해 시민역사관의 주춧돌을 세우겠습니다. 

▲ 2009년 11월 9일 친일인명사전발간 국민보고대회 개최

 

▲ 백범 김구선생 묘역에서 진행한 친일인명사전발간 국민보고대회 현장


 

         민족반역자들에게 분노했다면, 역사적 진실에 가슴을 쳤다면

         허탈과 좌절을 떨쳐버리고 시민역사관 건립에 힘을 모아주십시오. 

 

 

 

     시민역사관 건립모금 현황

 

           목표모금액 : 50억

           모금현황 : 현재까지 역사관 건립모금 총액 15억!

                         (친일인명사전 판매수익금 10억 + 시민역사관 건립모금액  5억)

           모금인원 : 10만원 이상 역사관 건립기금을 내주신 발기인 1000명

                         십시일반 힘을 보태주신 시민추진단 600명  

▲ 민족문제연구소·오마이뉴스 공동캠페인 <친일인명사전 발간, 네티즌의 힘으로> 진행 3일만에 5억 모금(2004년 1월)



 


     시민역사관 건립계획

 

           광복70주년을 맞는 2015년 8월 15일 개관을 목표로 합니다.

           독립과 민주화운동의 성지,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인근에 세우겠습니다.

           시민역사관은 진실된 역사의 전시/ 교육/ 문화/ 연구 중심지가 될 것입니다.

 ▲ 시민역사관, 같이 만들고 함께 가꾸겠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유물

 

민족문제연구소는

20여년간 문헌류·시청각류·박물류를 포함한 3만여점의 유물을 기증받고 수집해 보유하고 있습니다. 

1991년 연구소 설립 이후 축적해온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180만건의 학술정보DB를 구축했습니다.

계속적인 자료수집과 연구를 통해 국내외의 근현대 유물과 학술정보DB를 축적할 계획입니다.

▲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3.1 독립선언서> 원본

 

▲ 유신40년 특별전시 <식민의 유산, 유신의 추억>, 서대문형무소 12옥사

(2012년 민족문제연구소는 유신40년을 맞아 38회에 걸친 전국순회전시를 개최)




     국민여러분께



      친일인명사전이 밝혀낸

      민족반역자들에게 분노했다면

      백년전쟁이 보여준 

      역사적 진실에 가슴을 쳤다면

      이땅의 역사가

      진실과 정의를 향해 나아가길 희망한다면

      힘을 모아주십시오. 시민역사관 반드시 만들어내겠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시민역사관 │ 
친일인명사전의 기적,역사관 건립으로 이어가겠습니다.
T. 02-969-0226 / E-mail.
 minjok@minjok.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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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혈서기사가 조작이라구요? - 종북놀음과 박정희 혈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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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조세열 사무총장

 

찌라시 수준의 인쇄공해물, 종북백과사전 


지난 19일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극우논객 조갑제 씨가 펴낸 종북백과사전을 거론하며 야권의 주요 지도자들을 싸잡아 종북 정치인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이틀 뒤에는 민주통합당의 박지원 원내대표가 친일인명사전을 인용하면서 “친일?종북의 원조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고 정면으로 반박해 종북논란이 바야흐로 2라운드로 접어들고 있다. 종북백과사전 대 친일인명사전이란 몹시 마땅찮은 구도를 앞에 두고, 우선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참여했던 한사람으로서 이러다 두 책이 혹시 같은 부류로 취급받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앞섰다.




▲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 지난 19일,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극우논객 조갑제 씨가 펴낸 종북백과사전을 거론하며 야권의 주요 지도자들을 싸잡아 종북 정치인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 오마이뉴스



2009년 11월 8일 친일인명사전이 전국민적 관심 속에 발간되자, 같은 달 26일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라는 정체불명의 급조 극우단체가 친북반국가인명사전을 만들겠다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은 김대중 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이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소동을 피우는 강경극우세력들에 의해 난장판이 되고 말았지만, 그 기민한 대응과 패러디의 기발함에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날 발표한 명단에 우리 사회의 존경받는 어른들이 다수 포함되었는데, 그 때 거기에 빠진 어떤 분들은 “내가 이렇게도 한 일이 없었는가”하고 자탄해마지 않았다는 우스개 아닌 우스개도 더러 들려왔다. 명단이 발표된 뒤 전혀 소식이 없어 한갓 해프닝으로 여기고 있었더니만, 살짝 이름을 바꾼 종북백과사전이란 살벌한 느낌의 책이 나온 것을 이번에 이한구 대표의 친절한 소개가 있고서야 알게 되었다.


짐작은 했지만 책을 직접 보니 한마디로 찌라시 수준의 인쇄공해물에 불과해 2만원이란 책값도 아깝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다소 내용이 궁금하더라도 절대 사볼 필요가 없는 허접 쓰레기라는 점을 거듭 밝혀둔다. 이 책의 참고자료들은 대부분 재심에서 무죄취지로 결론이 난 사건에 대한 안기부 국정원 검찰의 공안기록이거나 자신들이 발간한 책 아니면 인터넷 기사들이다. 이 따위 책에다 함부로 백과사전이란 명칭을 붙이다니 언어를 농단해도 분수가 있어야 한다. 한 때 치밀한 채증과 예리한 분석으로 정평이 있던 조갑제 씨가 판단력마저 종북 색출에 저당잡힌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종북이라면 어감상 친북보다 죄상이 한결 무거워 보이는데, 조 씨는 종북백과사전에 전직 국무총리 둘과 대선주자들을 포함 야당 국회의원 33명을 무더기로 집어넣는 쿠데타적 사변을 일으켰다. 1952년 이승만 정권 때 국회의원 40여 명이 통근버스에 탄 채 크레인으로 헌병대에 끌려간 부산정치파동 이후 국회의원들이 단체로 이런 봉변을 당한 일은 군사정권 때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내용이 진실이라면 나라의 명운이 가히 적화통일 직전의 백척간두에 서있다고 할 만하다. 검찰은 직무유기라는 비난을 듣기 전에 미적거리지 말고 조 씨를 소환하여 사실관계를 알아봐야 한다. 조사결과 관련자들이 혹 국가보안법에 저촉되었다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정하게 처벌해야 하며, 반대의 경우에는 유언비어유포죄나 어떠한 형태로든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아 그런데 박정희 정권이 긴급조치 때 만든 유언비어유포죄는 없어졌나 보네요. 뭐 다른 죄목 없나요.)


어느 나라에서나 극우인물들의 언행이 선동적이고 과격하다 하지만 상궤를 벗어나는 것도 정도가 있을 것이다. 특히 집권여당의 원내대표가 쪽박부터 깨는 이런 식의 행태를 보인다면 도대체 의회정치의 기본인 대화와 타협이 무슨 수로 가능하겠는가.



종북 공격이 잇따르고 있는 까닭



▲ 유신 40년 "식민의 유산, 유신의 그늘" 유신 40년이 되는 이 해, 유신의 망령이 우리의 머리 위를 배회하고 있다.민족문제연구소는 박정희체제와 박정희주의의 완전한 극복을 위해 '박정희 유신"의 모든 것을 담은 전시회를 진행 중이다. ⓒ 민족문제연구소



이렇게 상식을 벗어난 종북 공격이 잇따르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바로 ‘본원’이 박근혜 의원이기 때문이다. 말 수 적은 그가 단호하게 ‘자유’와 ‘국가관’ 검증을 언급했을 때 화살은 시위를 떠난 것이라 봐야한다. 이미 사당화한 새누리당 내외의 ‘종박세력’은 그 뜻을 충실히 받드는 외에 달리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많은 국민들이 유신시대를 떠올리면서 공포스런 데쟈부를 경험하고 있다.


유신 40년이 되는 이 해, 냉전시대로 끝없이 후진하는 대한민국의 정치현실을 지켜보면서 박정희체제와 박정희주의의 완전한 극복 없이는 민주주의란 헛말임을 실감하게 된다. 21세기 대명천지에 시대착오적인 매카시즘 논란이 어찌된 노릇인가. 종북 놀음의 재미가 쏠쏠하겠지만 반드시 대선에 유리할지도 의문이며, 후과에 대한 책임도 결코 적지는 않을 것임을 단언한다.


유신의 망령이 우리의 머리 위를 배회하고 있는 이 시점에, 친일인명사전은 편찬자들의 의도와 전혀 무관하게 역사전쟁이 아닌 이념전쟁의 전면에 놓이게 되었다. ‘박정희 친일?종북 원조론’은 사실 박정희 전대통령 추종세력에겐 역린을 건드린 것과 진배없는 불경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박정희주의자들은 특이하게도 종북 부분보다 친일에 더 격분하고 과민반응을 보여 왔다. 남로당원 경력은 동료들을 밀고한 것으로 대속하였다고 생각하는지 또는 가혹한 사상탄압으로 상쇄되었다고 보는 것인지는 그 속을 알 수 없다.


어쨌든 친일문제는 다퉈볼 여지가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래서 불똥은 이제 친일인명사전으로 옮겨붙었다. 각종 매체와 SNS를 통해 유포되고 있던 근거 없는 반론들이 자가발전을 통해 재구성되고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한결같은 목표는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는 데 있다.


먼저 그들이 보아도 치명적인 친일의 증거이면서 치욕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지원혈서는 무조건 조작이라고 떼를 쓴다. 다음으로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주체가 빨갱이라고 몰아붙인다. 그리고 모든 과정이 정치적 의도 아래 이루어졌다고 덮어씌운다. 모두 합리적인 반론이라기보다 막무가내식 들이대기에 가까운 주장이긴 하지만, 여론을 호도할 우려가 있어 부득이 한 마디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 중에서도 혈서조작설은 친일인명사전의 권위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고 있다. 특히 인터넷에는 조작설로 도배가 되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그레샴의 법칙이 그대로 작동되고 있다. 진실은 덮이고 억지 주장만 난무하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자료실 고양이 │ 민족문제연구소 자료실
못난 조상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친일인명사전의 기적,역사관 건립으로 이어가겠습니다.
TEL 02-969-0226 / E-mail
 historyac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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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혈서기사가 조작이라구요? - 종북놀음과 박정희 혈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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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조세열 사무총장


박정희 혈서기사 발굴의 일등공로자, 조갑제




▲ 일본국회도서관 소장 만주신문 마이크로 필름 ⓒ 민족문제연구소


▲ 일본국회도서관의 마이크로필름 판독기에 나온 만주신문의 혈서지원 기사 ⓒ 민족문제연구소


그들이 그렇게도 조작이라고 믿고 싶은 박정희 혈서가 실린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 원본은 현재 일본 국회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일반인은 마이크로필름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출력도 가능하다(『滿洲新聞』 康德 六年(昭和 十四年) 三月 三十一日, 日本 國會圖書館 所藏 마이크로필름). 이조차 일본이 박정희를 음해하기 위해 조작된 자료를 보관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정신분석학적 처방 외에 달리 방도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박정희 혈서 발굴의 일등 공로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조갑제 씨다. 그는 자신의 저작인 『박정희』(1992, 까치)에서 박정희가 군관학교에 지원하기 위해 혈서를 쓴 사실을 처음 언급하여 발굴추적의 물꼬를 텄다. 그러나 박정희 연구자들의 끈질긴 조사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증거자료는 찾을 수가 없었다. 민족문제연구소도 친일인명사전 집필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2009년 10월에 가서야 가까스로 관련 자료를 입수할 수 있었다. 증언만 있었을 뿐 확실한 증거가 발굴되지 않아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지 못할 뻔했던 엄청난 내용들이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 우리들은 예나 지금이나 “마지막 순간에 순국선열들의 보살핌이 있었음이 틀림없다”고 여기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당초 발굴한 혈서기사에 관한 보도자료를 따로 내지 않기로 의견을 모았었다. 혈서 자체도 충격이거니와 ‘조국(일본)을 위해 일사봉공(一死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하겠다’는 등 편지 내용이 워낙 엽기적이라 톱뉴스가 되고도 넘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정치쟁점화를 피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연구소가 방침을 바꿔 자료 공개를 결정하게 된 데는 박 전대통령의 아들 박지만 씨의 도발이 크게 작용했다. 그는 2009년 10월 28일 일차적으로 게재금지가처분신청을 낸 뒤, 11월 8일로 예정되어 있던 발간보고회 직전인 11월 4일 기습적으로 법원에 배포금지를 추가 신청했다. 사실상 친일인명사전을 금서로 만들려는 악의적인 시도였다. 거기에다 박정희 지지자들의 위협도 날이 갈수록 심해져 갔다. 연구소는 결정적인 증거자료 공개만이 유일한 대응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11월 5일 즉각 보도자료를 배포하게 된 것이다.



박정희가 일본군으로 복무한 적이 없다고요?


이밖에 박정희가 만주군 장교이지 일본군으로 복무한 적이 없다는 주장도 친일인명사전이 허위사실에 기초하고 있다는 모함 중 하나이다. 이에 대해서도 연구소는 확고한 반증을 가지고 있음을 밝혀둔다.(『舊時陸軍軍人(軍屬)屆』, 昭和 二十年 三月 一日.)



▲ 박정희가 일본군 예비역 소위임을 입증하는 공문서 ⓒ 민족문제연구소



만주국은 일제의 괴뢰국이며 만주군은 일본 관동군의 통제를 받았고 일본군 현역 장교가 직접 지휘하는 경우도 많았다. 뿐만 아니라 박정희는 일본 육사를 졸업한 엄연한 일본군 예비역 소위이며, 관동군에서 복무한 시기도 있었다.


또 박정희가 대적한 팔로군은 중공군이므로 공비토벌이지 항일세력 탄압이 아니라는 유치한 발상도 연구소를 공격하는 단골 메뉴로 등장하고 있다. 팔로군도 항일부대이며 중국 소련에 대한 적대행위는 당시로서는 연합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상식 수준의 이해도 하지 못하는 억설이라 치부하겠다. 특히 다수의 조선 청년들이 항일을 위해 팔로군에 복무하고 있었던 사정을 감안하면 이런 궤변은 더더욱 삼가야 마땅하다.


중위를 단순하게 하급장교 정도로 간주하는 ‘대범함’도 당시의 사정에 비추어 볼 때 지나치게 관대한 시각이다. 당시의 위관급 장교는 지금과 달리 군이 절대적 우위에 있던 파시즘 국가의 고등관으로서 군수나 경찰서장도 쩔쩔맬 정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출세욕에 불탄 박정희가 연령 제한에 걸리고도 혈서까지 써가며 거듭 군관을 지원했던 이유의 하나이다. 참고로 일제 35년간을 통틀어 자발적으로 일본제국의 장교된 자는 일본육사와 만주군관학교 출신을 포함 170여명에 지나지 않는다. 식민지 출신으로서는 드물게 간택받은 존재들이었던 셈이다.


무엇보다도 대일선전포고를 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 박정희는 바로 적국의 장교다. 비록 착수 전에 해방이 되긴 했지만 만약 광복군의 국내진공작전이 개시되었다면, 박정희는 그토록 꺼려했던 장준하처럼 사선을 넘어 광복군에 입대한 상당수의 일본군 출신 애국자들과 전장에서 만나는 운명이 되었을지도 알 수 없다.


박정희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대우와 존경을 받고 안정적인 직업이었던 교직을 버리고 군관의 길을 선택하였다. 강요에 의한 입대도 아니었으며 생계나 생존이 위협받는 불가피한 상황도 아니었다. 목적이 출세였든 영웅심의 발로였든 간에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부일협력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사실과 정황이 이를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이다.


논쟁에도 규칙이 있고 예의가 있다. 


▲ 친일인명사전 친일인명사전은 각 분야 교수 학자 180여명이 참여하여 3,000여종에 이르는 방대한 증거자료에 의거 객관적으로 집필한, 한국근현대 최대최고의 인물사전으로 평가받고 있는 역사적 학문적 성과물이다 ⓒ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의 구성원과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한 이들을 빨갱이로 모는 야비한 공격은 일찍부터 있어왔다. 자신들의 견해와 다르면 4대강 반대도 파업도 무상급식도 모두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고삐 풀린 극우세력의 방약무인함을 보면서 동시에 냉전의 끝자락을 붙잡고 유지해 온 그들의 기득권도 이제 소멸의 때가 왔음을 예감하게 된다. 도대체 합리성이라곤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집단들이기 때문이다.


친일인명사전은 각 분야 교수 학자 180여명이 참여하여 3,000여종에 이르는 방대한 증거자료에 의거 객관적으로 집필한, 한국근현대 최대최고의 인물사전으로 평가받고 있는 역사적 학문적 성과물이다. 지난 4월 13일 만주국 사무관을 지낸 박정희의 동서 홍순일의 후손이 제기한 서적복제배포금지소송이 대법원에서 기각됨으로써 3년간에 걸친 기나긴 소송도 끝이 났다. 사법부는 박정희를 포함한 5건의 관련 소송에서 모두 연구소 승소로 판결했다. 일관되게 친일인명사전의 공공성 객관성 엄밀성을 인정한 것이다.


친일인명사전은 민족 내부의 자성이 담긴 과거사에 대한 최소한의 학문적 정화과정의 결과물이다. 왜 친일인명사전을 정치의 이름으로 오염시키려 하는가.


민족문제연구소는 1991년 발족 때부터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목적사업으로 추진해 왔다. 당시 박근혜 의원은 정계에 입문하기도 전이었다.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20여 년간 시쳇말로 영양가 없는 작업을 해왔다는 언설이 가당하기나 한가. 도대체 무슨 정치적 목적이 있단 말인가. 이는 친일인명사전 편찬과정에서 나타난 압도적인 국민적 지지와 관계자들의 헌신을 모독하는 횡포일 뿐이다.


이미 객관적인 증거도 제시되었고 최종 판결까지 내려졌다. 논쟁에도 나름의 규칙이 있고 예의가 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내세울 것이 있으면 내세우자. 역사 앞에 성역은 없고 인물에 대한 비판에 금기가 있을 수 없다. 언제까지 박정희신화에 얽매여 그를 맹목적인 숭배의 대상으로 삼을 셈인가. 박정희를 극복하고 나아가지 못하는 한 한국사회에 미래는 없다. 장담하거니와 보수세력 그대들도 여기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주신문 기사 번역문


▲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 7면 전문 ⓒ 민족문제연구소

만주신문 기사 번역문


혈서(血書) 군관지원 - 반도의 젊은 훈도(訓導)로부터


29일 치안부(治安部)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訓導)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고 피로 쓴 반지(半紙)가 봉입(封入)된 등기로 송부되어 관계자(係員)를 깊이 감격시켰다. 동봉된 편지에는


(전략)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일반적인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송구하지만 무리가 있더라도 아무쪼록 국군(만주국군-편집자 주)에 채용시켜 주실 수 없겠습니까. (중략)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중략)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 : 편집자 주)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후략)


라고 펜으로 쓴 달필로 보이는 동군(同君)의 군관지원 편지는 이것으로 두 번째이지만 군관이 되기에는 군적에 있는 자로 한정되어 있고 군관학교에 들어가기에는 자격 연령 16세 이상 19세이기 때문에 23세로는 나이가 너무 많아 동군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중히 사절하게 되었다.


(『만주신문』 1939.3.31.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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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키 마사오, 민족문제연구소에 문의가 많아 간략히 정리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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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4일) 저녁 대선토론에서 나온 ‘충성혈서를 써서 일본군 장교가 된 다카키 마사오. 한국 이름 박정희. 친일과 독재의 후예’라는 이정희 후보의 발언 때문인지 오늘 연구소로 문의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간 연구소가 조사하고 축적한 내용들을 간략히 정리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 발간 친일인명사전, 2권 106~107쪽 박정희 항목 부분

 

 

친일인명사전앱 '박정희' 검색화면

 

 

친일인명사전에는 4,389명 친일인사 중 1인으로 박정희의 출생부터 사망까지의 주요행적과 일제강점기의 상세한 친일행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올해 총 3권 1질의 방대한 사전분량을 스마트폰 안에 쏙 넣을 수 있게 ‘친일인명사전앱’을 출시해 큰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2009년 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을 내놓기 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씨는 법원에 자신의 아버지와 관한 사전 게재금지가처분신청을 제출했습니다. 하지만 사전 발간예정일을 이틀 앞둔 11월 6일 법원에서 이 신청은 기각되었고, 8일 사전 발간보고대회는 예정대로 치를 수 있었습니다.

 

 

『만주신문』1939년 3월 31일

 

이런 과정을 거쳐 친일인명사전이 공개되었음에도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는 분들이 있었고, 특히나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만주군 혈서 지원과 관련해서는 연구소의 조작이라는 말까지 돌았습니다. 역사 연구자들의 철저한 검증과 법원의 판단이 있었음에도 말이지요.

 

다시 한 번 확인하시지요.

 

 

 

 

이상의 사실은 미하원 외교위원회에 제출된 한미관계조사보고서인 ‘프레이저 보고서’에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프레이저 보고서가 담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잘 알려지지 않은 실상은 연구소제작 역사다큐 “백년전쟁”의 스페셜에디션 <프레이저보고서 - 누가 한국경제를 성장시켰는가>를 보시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역사다큐 "백년전쟁" 스페셜에디션

<프레이저보고서 - 누가 한국경제를 성장시켰는가> 관람하러 가

 

 

또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일제강점기 교사 또는 일본제국 군인으로 체득한 식민의 유산은 5.16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서서히 외화되어 마침내 이 땅 민주주의에 조종을 울리며 끔찍한 암흑의 역사, 유신시대를 만들어 냈습니다. 

 

연구소는 올해 10월유신 선포 40년을 맞아 유신독재의 본질을 조명하는 특별전시 “식민의 유산, 유신의 추억”전을 개최했습니다. 의미심장하게도 서대문형무소 옥사에서 개막전을 진행한 이후로 창원, 부산, 광주, 대구 등 대도시에서 순회전시를 개최했을 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소규모 야외 전시를 무려 5개월 여 동안 진행해 오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식민의 유산, 유신의 추억> 특별전 전면소개. 위 내용은 전시도록에 더 상세히 실렸습니다.

 

 

 

 

어떻습니까, 이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에 대한 정리가 좀 되시는지요?

 

이상의 주요내용들은 유신40년 특별전시도록 [식민의 유산, 유신의 추억]에 각종 이미지들과 함께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도록에 관한 문의는 민족문제연구소 전화 02-969-0226 으로 해주십시오.

 

 

<식민의 유산, 유신의 추억> 특별전 전시도록 표지

 

 

<식민의 유산, 유신의 추억> 전시도록 6~7쪽, '친일인명사전으로 본 박정희' 중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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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_ 친일인명사전 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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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가 와해된 지 60년, 민족문제연구소 출범 18년 만인 2009년 11월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은 국민이 만들어 주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전 발간은 연구소의 18년을 한결같이 지켜주고 함께 해주신 7,000여 회원이, 2004년 국회(한나라당)의 사전편찬 기초조사예산 전액 삭감에 분노해 단 11일 만에 삭감액 5억 전부를 모아주신 3만 여 국민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 때 연구소는 그 감동을 고스란히 안고, 친일인명사전을 반드시 발간해 국민에게 돌려드리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이제 그 때의 대국민 약속을 지키고 전국민적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102년 국치일 8월 29일에 친일인명사전 앱을 출시했습니다. 

 

연구소는 그간 친일인명사전의 대중적 보급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해왔습니다. 특히 정가 30만원인 고가의 사전이기에 여러 사람이 폭넓게 접할 수 있는 공공도서관이나 학교 보급에 특히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며 사전 구입을 꺼려하는 경우가 태반이었습니다.




그래서 만들어야 했습니다. 친일인명사전 앱은 친일인사 4,389명이 수록된 전3권 총 3,00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사전을 고스란히 담았습니다. 고가라서 개인이 구매하기 어려웠고 공공도서관 등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기 때문에, “내 손안”에서 찾아보기 쉽게 함으로써 사전을 보다 간편하게 보고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내 손안의 친일인명사전!” 이제 스마트폰만 있으면 거리나 지하철, 그 어디서나 친일인명 검색이 가능하고, 인명 외에도 분야별·지역별·출생연대별 등 다양한 영역별 검색이 가능해 훨씬 편리하게 활용도 가능한 것이 큰 장점입니다.

 

연구소는 당초 무료이용을 검토했으나 개발비용과 종이책 보급 등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하여 부득이 앱 가격을 1만원으로 책정했습니다. 그리고 수수료와 세금 등 경비를 제외한 수익금 전액(건당 약 5천원)은 현재 추진하고 있는 시민역사관 건립 기금으로 적립할 예정이다.

 

시민역사관은, 일제 식민지배가 근대화의 기초라느니 5.16군사쿠데타가 근대화혁명이라느니 하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는 과거 친일독재세력의 역사바꿔치기로부터 시민의 힘으로 지켜온 진실한 역사를 오롯이 담을 것입니다. 오로지 객관적인 사료에 근거해 엄정하게 기록한 친일인명사전의 발간에도 불구하고, 더더욱 역사왜곡에 골몰하는 이들로부터 더욱 강고하게 역사정의를 지켜내 미래세대에 전달할 시민역사관 또한 반드시 세워내겠습니다.


 


- 현재 내려받기는 안드로이드폰(구글)에서만 가능하며, 애플용은 승인과정에서 예기치 않은 문제가 발생해 9월말 출시됩니다.

- 포털(다음, 네이버) 검색창에서 "친일인명사전 앱"을 검색하셔도 쉽게 구매사이트에 접근하실 수 있습니다.


 

 안드로이드용 친일인명사전 앱 다운로드 바로가기

      https://play.google.com/store/apps/details?id=com.minjok.pjdic

      (안드로이드는 아이폰·아이패드를 제외하고 국내에 출시된 스마트폰·스마트기기 대부분이 해당됩니다.)


 

  좀 더 자세한 안내를 원하신다면 아래 바로가기를 클릭해 보세요~ 

     구매안내  /  사용설명서  /  문의 및 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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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 사회가 지탱되는 기본원리가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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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김민철

이명박 정권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마치 수학 공식처럼 정권 말기면 드러나는 비리가 이 정권이라고 예외 없이 적용되고 있다. 그 비리의 결정판은 역시 세간에서 ‘상왕’으로 불리던 대통령의 형 이상득 씨의 구속이다. 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망나니마냥 수행하던 검찰이 이제 그 칼끝을 돌려 현 권력 심장부를 깊숙하게 찌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권력 무상의 씁쓸함을 느끼기에 앞서 완장들의 본질을 보는 같아 인간에 대한 환멸까지 느낄 지경이다.

이명박 정권의 대차대조표는 곧 나올 것이다. 이념적인 선호에 따라 그 평가가 매우 다르게 나올 수밖에 없겠지만, 그 점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낙제점을 면하기에는 어려울 것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세력이 정권을 잡음으로써 그동안 한국 사회가 성취했던 자유와 민주주의의 수준이 다소 퇴보할 것이라고는 모두들 예상했다. 그러나 그 퇴보는 상상을 훨씬 뛰어넘어 어디서부터 어떻게 진단하고 대처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전방위적이었다. 몇 가지의 목록만 열거해 보자.

정부의 신뢰도를 잃게 만든 광우병 파동, 사회의 갈등을 힘으로만 밀어붙여 해결하려다 빚어낸 용산 참사와 이후의 무대책, 아무런 전망도 제시하지 못한 채 한반도의 긴장만 악화시킨 반북정책의 지속과 그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천안함 사건, 환경재앙에 가까운 4대강 사업의 강행, 역대 정권 중 ‘가장 깨끗한 정권’이라고 자부한 대통령의 친인척과 측근들의 잇따른 비리와 구속, 특정 집단에 이익을 주기 위해 밀어붙인 종합편성채널(종편) 사태, 자유로운 비판을 봉쇄하기 위해 국가권력을 남용한 미네르바 사건, 언론을 장악하기 위해 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 언론사 사장을 몰아낸 사건, 한국의 경제구조를 미국의 요구에 맞게 만들기 위한 한미FTA 체결 강행, 독재정권 하에서나 있었던 국가권력을 불법적으로 동원한 민간인 사찰, 그간의 사회적 합의를 토대로 마련한 교과개정의 전면 부정과 역사교과서의 수정 강요(이른바 금성교과서 사건), 편법으로 체결하려다 해프닝으로 끝난 한일군사정보협정 체결 시도 등등.

목록을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쁠 지경이다. 큰 사건이 터지면, 그것을 수습하기도 전에 다른 더 큰 사건이 터져 앞의 문제가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리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문제를 해결할 능력은커녕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인식할 능력이 있는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상황은 심각하다. 왜 이런 현상들이 지속되고 있을까. 합리성의 결여와 비민주성 등 다양한 해석과 진단이 가능하겠지만, 두 가지 공통적인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정책의 공공성이 너무 심하게 훼손되었다는 점이다. 공적 이익보다는 특정 집단의 사적 이익이 정책을 주도했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이다. 공적 이익이라는 것도 실상은 사적 이익들간의 집단적 조정을 통해 나오는 것이겠지만, 그 조정이 너무 편향적이고 일방적이어서 롤스의 지적처럼 내용과 절차 모두에서 정의롭지 못한 정책이 양산된 것이다.

한국의 지배세력은 경제성장이라는 미명 아래 오랫동안 많은 특권을 누려왔다. 그 특권이 너무 오래되고 일상화되어 특권이 아니라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여겨 왔다. 다만 그 특권이 정치적 민주화로 인해 부분적으로 견제 받고 침해 받자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잃어버린 10년’을 외치며 정권 탈환에 절치부심했던 심리적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그 이전과 차이가 있다면, 정치권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졌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아니 독재정권 하에서는 꿈도 꾸지 못했던 정치권력까지 장악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즉 민주화 이후 독재권력으로부터 통제당하던 상황이 사라지면서 재벌을 비롯한 특권세력의 발언권이 커져, 이제는 경제권력이 정치권력을 조정하는 형국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해석도 설득력을 갖고 있다. 어찌 보면 민주화의 수혜를 가장 많이 받은 집단이 특권세력이라는 역설도 성립한다.

문제의 심각성은 이 특권을 되찾는 과정에서 사회적 합의에 기초하여 만들어놓은 규칙을 너무 쉽게 바꾼 것에 있다. 두 번째의 공통된 현상이면서 매우 위험한 현상이기도 하다. 자신들이 권력을 잡았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경기장의 규칙을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만듦으로써 사회의 운영원리를 심각하게 훼손시키는 결과를 양산한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역사 교과서의 내용을 뜯어고친 사건이다.

이른바 뉴라이트들이 기존 역사교과서를 좌편향적이며 자학사관이라 비판하자, 이명박정권은 수년에 걸쳐 교과서를 뜯어고치는 일을 강행했다. 어떤 의미에서 교과서는 한 사회가 갖고 있는 공통적인 도덕감각과 표준적인 지적 수준, 가치를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정권에 따라 이리저리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인식이야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겠지만 민주 사회에서 국민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유아적 발상이거나 독재적 발상이 아니면 가능하지 않은 일을 태연하게 저지른 것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사교과서가 바뀐다고 상상해 보라. 얼마나 끔찍한가. 교과서 사건의 심각성은 역사인식의 차이가 아니라 사회를 바라보는 태도에 있다. 사회가 운영되는 기본 원리를 흔들어놓은 것이다.

최근에 벌어진 수자원공사의 고소 사건도 같은 맥락에서 위험하다. 4대강 사업을 비판한 박창근 관동대 교수를 수자원공사가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경찰에 고소한 일은 경기의 룰을 무시하는 폭력과 다름없다. 국가권력의 정치적 행위를 비판하는 일에 사법적 잣대를 들이대어 비판자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것인데, 매우 위험한 발상이거나 바보이거나 둘 중 하나에 해당한다. 만약, 이번 고소 사태가 성립한다면, 국가권력이 잘못된 정치적 판단을 가지고 실행한 행위로 빚어진 결과에 대해 당사자에게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반대논리도 성립된다.

이렇게 되면 모든 국가 행위가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는 소송 사태가 벌어지게 되고, 행정부는 준비서면 쓰느라 마비상태에 이를 것이다. 다행히도 현실 세계는 정치적 행위와 사법적 행위라는 서로 다른 운영원리가 작동하기 때문에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수자원공사가 이를 무시하고 소송을 진행했다. 완장들의 충성 경쟁으로만 치부하기에 앞서 자신들이 무슨 죄를 저지르고 있는지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무지함이 더 걱정이다.

사회의 운영원리 자체를 훼손하거나 자신들 마음대로 운영하겠는 식의 생각이 배경에 깔려있지 않으면 상식적으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을 벌여놓은 것이다. 그것도 백주 대낮에. 만일 이게 아니라면 순전한 엄포용이다. 마치 미네르바 사건처럼 정권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합법을 가장한 폭력을 행사한 것이다.

어느 쪽이든 민주 사회가 지탱되는 기본원리가 무너졌다. (국내 유일 과거사 청산 관련 전문잡지 "역사와 책임" 3호 권두언에서)

민족문제연구소 발간도서 자세히 보기 ▶ "히스토리 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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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심정섭 회원, 근현대 자료 215점 기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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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심정섭 회원, 근현대 자료 215점 기증


하나하나 포장해서 기증해 주신 자료 215점



심정섭 회원이 한점 한점 포장해서 기증해 주신 자료 ⓒ 민족문제연구소



심정섭 회원이 지난 5월에 이어 또 근현대사 관련 자료를 연구소에 기증 해 주셨습니다. 자료는 총 215점을 헤아립니다. 한점 한점 꼼꼼하게 직접 포장해서 보내주셨습니다.


기증해주신 자료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나주지역에서 발행된 영수증, 지세명기대장각종 서신, 간찰, 1940~1960년대 상장, 근하신년 엽서, 명함, 금융자료, 지방행정자료 등 입니다. 

 


아들과 아버지가 나눈 편지



경성에서 공부하고 있는 자식들이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들 ⓒ 민족문제연구소



기증 해 주신 자료 가운데 몇 가지  재미있는 자료들이 있었습니다.


경성에서 공부하고 있는 자식들이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가 여러장 눈에 띕니다. 편지봉투에 적혀있는 아버지는 박진옥(朴陣玉)씨 입니다. 조선총독부 직원록을 확인 해 보니 1940년에 해남군 삼산면장(三山面長)을 지내신 분 이네요.


내용을 살펴보면 당시 학교생활이 어땠는지 볼 수 있습니다.


"곧 있으면 신체검사를 한다"

"식대와 하복비를 보내달라"

"매월 근로봉사에 출석하고 있다"

"졸업시기까지 학도근로동원을 나가고 동급생들은 3일간 연성을 받는다"

"졸업식은 320일에 시행한다"

"고무신을 잃어버렸다"


고무신, 졸업식과 같은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학도근로동원, 연성, 근로봉사와 같은 내용은 전시체제기의 학교가 어떤 분위기였는지 보여주는 내용이 많습니다.


1944년 원동무역 증권



심정섭회원이 기증해 주신 서류 중에는 원동무역주식회사의 증권도 있습니다. 원동무역주식회사는 마산에서 한국인이 설립한 최초의 주식회사이자 무역회사였습니다.



마산에서 한국인이 설립한 최초의 주식회사 원동무역 ⓒ 국내항일독립운동사적지 조사보고서


지역유지인 옥기환 씨와 애국지사 명도석 선생이 설립한 이 회사의 이익금의 일부는 백산 안희재 선생과 상해 임시정부로 건너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회사는 태평양전쟁 발발과 함께 시작된 일본의 전시 경제통제 강화로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 국내항일독립운동사적지 조사보고서


지금도 남성동 91-1번지에는 원동무역주식회사 터가 남아있습니다. ⓒ 국내항일독립운동사적지 조사보고서




귀한 자료기증에 감사드립니다.



지난 5월 자료기증에 대한 감사패 증정 박한용 연구실장님과 함께


기증해 주신 자료는 연구소에서 정리, 분류 후에 자료실 전시, 기획전시 등에 활용될 예정입니다.


다시 한 번 심정섭 회원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자료실 고양이 │ 민족문제연구소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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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식민의 유산 유신의 그늘" (6) 죄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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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선생님의 '죄인의 말'




어린이의 참 삶을 위해 평생을 바치신 이오덕선생님 ⓒ보리출판



민주교육운동, 우리말살리기와 글쓰기교육으로 잘 알려진 고 이오덕 선생님은 일제시기부터 교사였다고 합니다. 교원시험에 합격하여 교육자의 길로 들어선 것이지요. 하지만 이오덕 선생님이 갓 교사가 된1944년은 한창 전쟁의 광기가 극을 달하고 있던 때 였습니다. 그 광기는 교육현장에도 예외가 아니었지요.


1982년, 이오덕선생님은 한편의 글을 씁니다. 일제시기, 교사가 되었지만 자신의 위치는 아이들을 군대식으로 훈련시켰던 식민지 교육의 담당자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교육현장의 모습들은 해방 후에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 교육현장에 관한 반성의 글이 바로 '죄인의 말'이었습니다. 


몇 구절 옮겨 볼까요?




'죄인의 말'은 수필집 "거꾸로사는 재미"에 실려있는 글입니다. ⓒ산처럼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교단에서 무엇을 하였던가.  내가 여기서 할 말이 있다면 죄 지은 얘기를 털어놓는 것 뿐이다. 

-일제의 살벌한 군대식 교육은 체질적으로 나에게 거부감을 일으키게 하였지만 그것을 부정하고 다른 참교육을 조금이라도 실천할 만한 나대로의 교육관이나 교육이론이 있을 수 없었다.

-1년 남짓한 그동안에 나는 우리 민족의 아이들을 일본 제국의 아이들로 훈련하는 일에 충실히 협력하였던 것이다. 

-해방이 되어 잠시 꿈같은 날을 보냈지만, 일제의 망령은 모든 학교 교육에서 조금씩 되살아 났다. 아동 중심이니, 민주교육이니 하는 것은 입으로만 지껄이는 말이 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자... 교육행정은 그 어느 때보다 심하게 교육을 그 세부 실천에 이르기까지 간섭함으로써, 학교교육은 온전히 자주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 교사들은 다만 명령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여 그대로 이행하는 기계로서 존재할 수 밖에 없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이 또한 교사의 지시 명령에만 움직이는 기계가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다.


'죄인의 말'에서 이오덕 선생님은 자신을 아이들을 꼭두각시로 훈련시킨 교관으로, 돈을 징수하는 세금쟁이로, 아이들을 획일화 한 폭군으로, 비참한 경쟁을 강요한 깡패로, 선거운동을 한 위선자로 묘사하며 반성합니다. 이오덕선생님이 그 후 보여준 모습은 바로 이 지극한 자기반성에서 출발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이오덕 선생님 개인만 죄인이었을까요? 그럴리가요. 수많은 교사들이 죄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일본제국이 있었고, 독재정권이 자리를 잡고 있었지요. 이들은 수많은 이오덕들을 죄인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학교, 그 잔혹한 풍경



부산에서 전시했던 "식민의 유산 유신의 그늘" 전 ⓒ민족문제연구소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을 전후해서 학교는 전쟁에 동원할 소국민을 양성하는 현장이 되어갔습니다. 그나마 있었던 조선어 과목은 아예 없어졌고 일본어 읽기와 쓰기는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전시동원을 위한 제식훈련, 체조 군가풍의 국민가요. 전차와 글라이더 만들기가 교과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1941년 일제는 소학교의 명칭을 국민학교로 고쳤습니다. 국민학교령이 칙령으로 공포된 것이었지요. 또한 조선총독부는 민족교육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본격적인 황국신민화의 시작이었습니다. 




국민학교로 바뀐 것이 황국신민화의 시작이라는 것은 국민학교령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목적 부터가 달랐습니다. 국민학교령의 목적은 '국민의 기초적 연성을 목적으로 한다'였습니다. 연성은 일종의 군사용어입니다. 연성도장, 연성도장과 같이 심신과 기예를 단련한다는 말이지요. 한만디로 국민학교는 황국신민을 단련시키는 연성도장이었습니다. 


국민학교령은 칙령 제 148호로 쇼와16년(1941년) 반포되었습니다. ⓒ 일본 국립공문서관 아시아역사자료센터



국민학교령의 본문입니다. 기초적 연성이라는 표현이 나와있습니다. ⓒ 일본 국립공문서관 아시아역사자료센터


군국주의 체제로 들어서면서 일본은 기존의 영국, 프랑스를 배척하고 나치의 교육법을 반영합니다. 일본의 은행법이 히틀러의 도이치 은행법을 도입한 것 처럼 국민학교는 나치가 만든 폴크스 슐레를 그대로 직역한 말입니다. 국민학교 만이 아니었습니다. 수신, 국어, 국사 지리 네 과목은 국민과(國民科)라고 불렸습니다. 이 외에도 국민복, 국민가요.. 등등 국민은 어느새 조선 땅에 아무 거리낌 없이 들어와 자리잡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일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패전 후 국민학교라는 말을 바로 버렸습니다. 한국은 어땠을까요? 일본으로 부터 해방이 됬지만 우리는 '국민학교'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대로 썼습니다. 결국 김영삼정부가 들어서고나서야 지금의 '초등학교'로 바뀌었지요. 



일제시기와 다르지 않은 박정희시대 학교의 모습


앞에 국민학교 명칭을 이야기 했습니다만. 이름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오덕 선생님의 말 따마나 해방이 되었어도 학교의 모습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일제의 망령은 학교 교육에서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었습니다. 


1968년 12월 박정희가 선포한 국민교육헌장


요즘도 외우라면 외우실 분들 많을겁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예전에 익숙하게 보던 풍경들이 다시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국민학교에서 교육칙어 대신 국민교육헌장을, 황국신민서사 대신 국기에 대한 맹세를 애국조회때마다 낭독해야 했습니다. 


머리에 고속도로가 난 학생들, 과연 학창시절의 즐거운 추억이기만 할까요?


머릿 속 뿐만이 아닌 겉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생들에게 허용된 것은  '스포츠형'머리, 또는 단발머리에 교복, 교모, 그리고 교련복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학생답지 않은' 모습들이 보이면 가차없었습니다. 선도부가 교문앞을 지키고 있는 등교길 풍경, 바리깡이나 가위를 든 학생주임 선생님이 머리에 '경부고속도로'를 내는 것은 일상다반사였습니다. 그것 뿐이면 그나마 다행이지요. 


가혹한 체벌과 침묵의 강요는 학생들을 그저 복종하는 인간으로 길러냈습니다. 



물론 일제시기와 70년대 그리고 지금 을 단순히 비교하기는 힘들 겁니다. 사회분위기라는 것이 있고, 민주화 과정이 있었지요. 하지만 아직도 갈길은 멀고도 멀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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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 당신의 이름으로 아이들, 지역주민, 일본 조선학교에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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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 기부프로젝트, 두 번의 성공적 마감 !

 

우리 연구소와 아름다운재단이 소셜펀딩 개미스폰서를 통해 공동으로 진행한 <정직한 역사를 나눕니다_친일인명사전 기부프로젝트>는 지난 2월 28일~4월 1일 사이 모두 2차례에 걸쳐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 결과 총 1천만 원이 넘는 모금이 이뤄졌고, 전국 각지 44곳의 대안학교, 마을도서관, 시민단체 등에 친일인명사전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조선학교에 전할 6권의 사전은 ‘조선학교돕기 몽당연필’에서 오는 6월 22일 개최한 도쿄 콘서트 즈음에 해당 조선학교로 전달할 예정이라 합니다.

 

 

두번째 <친일인명사전 기부프로젝트> 사전 기증처 20곳

 

 

 

소셜펀딩, 공감의 힘과 가능성을 확인

 

연구소는 소셜펀딩이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 아이들에게 좀 더 가까이 친일인명사전을 보급하고자 이번 프로젝트를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사전이 발간된 지 만 2년이 지난 뒤라 프로젝트의 성공여부를 쉽게 가늠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프로젝트에서 단 3일 만에 목표모금액을 초과달성하고, 연이은 2차 프로젝트 역시 20여일 만에 성공함으로써,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친일인명사전의 사회적·교육적 가치를 지지하고 역사정의실현을 열망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두 차례의 프로젝트에 참여해주신 전체 인원은 292명이고, 이 중 두 번의 프로젝트에 모두 참여한 분도 5명이나 되었습니다. 또 같은 주소의 참여자가 꽤 있어 확인해 본 결과, 한 가족이 각각의 이름으로 참여경우였습니다. 대구의 어느 노신사께서는 연구소로 전화해 인터넷으로 모금을 할 수 없으니 방법을 가르쳐 달라했고, 그 인연이 연구소 회원가입으로까지 이어질 듯합니다. “죽기 전에 대구가 바뀌는 걸 보고 싶다”는 노신사의 말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습니다.

 

 

 

 

 

친일인명사전을 이을 또 하나의 기적, 역사정의실천 시민역사관

 

2009년 발간한 이래 끊임없는 소송에 단 한 번도 패소하지 않은 친일인명사전의 힘은 철저히 자료와 사실에 근거한 진실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일제 식민지 지배의 실상과 해방 후 한일과거사 청산운동의 역사를 더욱 적극적으로 알려내겠습니다. 친일인명사전에 보내주신 지지와 성원 가득 안고 시민여러분이 보여주실 또 한 번의 기적 <역사정의실천 시민역사관> 건립을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했습니다.

아프지만 반드시 기억해야할 우리의 역사를 정직하게 보여줄 시민역사관에도 아낌없는 지지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다둥이카드소지자 민족문제연구소 편찬실
- 세상도, 사람도 늘 변화 · 발전함을 믿는다.
친일인명사전의 기적,역사관 건립으로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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