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 사회가 지탱되는 기본원리가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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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김민철

이명박 정권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마치 수학 공식처럼 정권 말기면 드러나는 비리가 이 정권이라고 예외 없이 적용되고 있다. 그 비리의 결정판은 역시 세간에서 ‘상왕’으로 불리던 대통령의 형 이상득 씨의 구속이다. 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망나니마냥 수행하던 검찰이 이제 그 칼끝을 돌려 현 권력 심장부를 깊숙하게 찌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권력 무상의 씁쓸함을 느끼기에 앞서 완장들의 본질을 보는 같아 인간에 대한 환멸까지 느낄 지경이다.

이명박 정권의 대차대조표는 곧 나올 것이다. 이념적인 선호에 따라 그 평가가 매우 다르게 나올 수밖에 없겠지만, 그 점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낙제점을 면하기에는 어려울 것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세력이 정권을 잡음으로써 그동안 한국 사회가 성취했던 자유와 민주주의의 수준이 다소 퇴보할 것이라고는 모두들 예상했다. 그러나 그 퇴보는 상상을 훨씬 뛰어넘어 어디서부터 어떻게 진단하고 대처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전방위적이었다. 몇 가지의 목록만 열거해 보자.

정부의 신뢰도를 잃게 만든 광우병 파동, 사회의 갈등을 힘으로만 밀어붙여 해결하려다 빚어낸 용산 참사와 이후의 무대책, 아무런 전망도 제시하지 못한 채 한반도의 긴장만 악화시킨 반북정책의 지속과 그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천안함 사건, 환경재앙에 가까운 4대강 사업의 강행, 역대 정권 중 ‘가장 깨끗한 정권’이라고 자부한 대통령의 친인척과 측근들의 잇따른 비리와 구속, 특정 집단에 이익을 주기 위해 밀어붙인 종합편성채널(종편) 사태, 자유로운 비판을 봉쇄하기 위해 국가권력을 남용한 미네르바 사건, 언론을 장악하기 위해 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 언론사 사장을 몰아낸 사건, 한국의 경제구조를 미국의 요구에 맞게 만들기 위한 한미FTA 체결 강행, 독재정권 하에서나 있었던 국가권력을 불법적으로 동원한 민간인 사찰, 그간의 사회적 합의를 토대로 마련한 교과개정의 전면 부정과 역사교과서의 수정 강요(이른바 금성교과서 사건), 편법으로 체결하려다 해프닝으로 끝난 한일군사정보협정 체결 시도 등등.

목록을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쁠 지경이다. 큰 사건이 터지면, 그것을 수습하기도 전에 다른 더 큰 사건이 터져 앞의 문제가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리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문제를 해결할 능력은커녕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인식할 능력이 있는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상황은 심각하다. 왜 이런 현상들이 지속되고 있을까. 합리성의 결여와 비민주성 등 다양한 해석과 진단이 가능하겠지만, 두 가지 공통적인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정책의 공공성이 너무 심하게 훼손되었다는 점이다. 공적 이익보다는 특정 집단의 사적 이익이 정책을 주도했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이다. 공적 이익이라는 것도 실상은 사적 이익들간의 집단적 조정을 통해 나오는 것이겠지만, 그 조정이 너무 편향적이고 일방적이어서 롤스의 지적처럼 내용과 절차 모두에서 정의롭지 못한 정책이 양산된 것이다.

한국의 지배세력은 경제성장이라는 미명 아래 오랫동안 많은 특권을 누려왔다. 그 특권이 너무 오래되고 일상화되어 특권이 아니라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여겨 왔다. 다만 그 특권이 정치적 민주화로 인해 부분적으로 견제 받고 침해 받자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잃어버린 10년’을 외치며 정권 탈환에 절치부심했던 심리적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그 이전과 차이가 있다면, 정치권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졌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아니 독재정권 하에서는 꿈도 꾸지 못했던 정치권력까지 장악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즉 민주화 이후 독재권력으로부터 통제당하던 상황이 사라지면서 재벌을 비롯한 특권세력의 발언권이 커져, 이제는 경제권력이 정치권력을 조정하는 형국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해석도 설득력을 갖고 있다. 어찌 보면 민주화의 수혜를 가장 많이 받은 집단이 특권세력이라는 역설도 성립한다.

문제의 심각성은 이 특권을 되찾는 과정에서 사회적 합의에 기초하여 만들어놓은 규칙을 너무 쉽게 바꾼 것에 있다. 두 번째의 공통된 현상이면서 매우 위험한 현상이기도 하다. 자신들이 권력을 잡았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경기장의 규칙을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만듦으로써 사회의 운영원리를 심각하게 훼손시키는 결과를 양산한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역사 교과서의 내용을 뜯어고친 사건이다.

이른바 뉴라이트들이 기존 역사교과서를 좌편향적이며 자학사관이라 비판하자, 이명박정권은 수년에 걸쳐 교과서를 뜯어고치는 일을 강행했다. 어떤 의미에서 교과서는 한 사회가 갖고 있는 공통적인 도덕감각과 표준적인 지적 수준, 가치를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정권에 따라 이리저리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인식이야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겠지만 민주 사회에서 국민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유아적 발상이거나 독재적 발상이 아니면 가능하지 않은 일을 태연하게 저지른 것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사교과서가 바뀐다고 상상해 보라. 얼마나 끔찍한가. 교과서 사건의 심각성은 역사인식의 차이가 아니라 사회를 바라보는 태도에 있다. 사회가 운영되는 기본 원리를 흔들어놓은 것이다.

최근에 벌어진 수자원공사의 고소 사건도 같은 맥락에서 위험하다. 4대강 사업을 비판한 박창근 관동대 교수를 수자원공사가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경찰에 고소한 일은 경기의 룰을 무시하는 폭력과 다름없다. 국가권력의 정치적 행위를 비판하는 일에 사법적 잣대를 들이대어 비판자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것인데, 매우 위험한 발상이거나 바보이거나 둘 중 하나에 해당한다. 만약, 이번 고소 사태가 성립한다면, 국가권력이 잘못된 정치적 판단을 가지고 실행한 행위로 빚어진 결과에 대해 당사자에게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반대논리도 성립된다.

이렇게 되면 모든 국가 행위가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는 소송 사태가 벌어지게 되고, 행정부는 준비서면 쓰느라 마비상태에 이를 것이다. 다행히도 현실 세계는 정치적 행위와 사법적 행위라는 서로 다른 운영원리가 작동하기 때문에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수자원공사가 이를 무시하고 소송을 진행했다. 완장들의 충성 경쟁으로만 치부하기에 앞서 자신들이 무슨 죄를 저지르고 있는지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무지함이 더 걱정이다.

사회의 운영원리 자체를 훼손하거나 자신들 마음대로 운영하겠는 식의 생각이 배경에 깔려있지 않으면 상식적으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을 벌여놓은 것이다. 그것도 백주 대낮에. 만일 이게 아니라면 순전한 엄포용이다. 마치 미네르바 사건처럼 정권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합법을 가장한 폭력을 행사한 것이다.

어느 쪽이든 민주 사회가 지탱되는 기본원리가 무너졌다. (국내 유일 과거사 청산 관련 전문잡지 "역사와 책임" 3호 권두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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