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실/ 친일인명사전'에 해당되는 글 12건

  1. 2013.01.14 自畵像_벼락이 떨어져도 나는 내 서재를 뜰 수가 없다 (3)
  2. 2012.09.03 꼭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_ 친일인명사전 앱 (10)
  3. 2012.06.29 친일인명사전! 당신의 이름으로 아이들, 지역주민, 일본 조선학교에 전했습니다 (4)
  4. 2012.03.28 '친일파 명단' 기부한 당신, 기억하겠습니다 - 네티즌 모금 8주년 친일인명사전 기부프로젝트2를 시작하며 (2)
  5. 2011.12.05 일본군 장교 출신 유재흥, 아버지 유승렬에 이어 대전 국립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 (1)
  6. 2011.11.28 11월 25일 친일인명사전 발간 2주년 국제학술회의 사진입니다.
  7. 2011.11.18 고 임종국 선생 여동생의 헌시 "오라버니 - 22주년 다시 사는 그날에" (3)
  8. 2011.11.17 친일인명사전 발간 2주년 기념,국제학술회의가 개최됩니다 (1)
  9. 2011.11.11 제5회 임종국상 시상식이 열립니다. (1)
  10. 2011.11.03 살아움직이는 친일인명사전

自畵像_벼락이 떨어져도 나는 내 서재를 뜰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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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지식채널ⓔ가 지난 2012년 11월 친일연구의 선구 임종국선생의 기일을 맞아 선생이 우리에게 남긴 것들을 되돌아보게 했습니다.

 

 

 

 

친일문제 연구에 평생을 바치셨던 임종국 선생이 1989년 11월 60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돌아가신 후,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결코 손에서 놓지 않았던 선생의 친일연구 업적과 유지를 이어가기 위해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는 설립되었습니다.

 

그리고 2005년 연구소는 친일청산과 역사정의실현이라는 선생의 뜻을 더욱 널리 확산시키고 이를 실천하는 후학을 격려하고자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를 만들고 <임종국상>을 제정해 2012년 11월까지 총 6회의 시상식을 가졌습니다.

 

1965년 굴욕적인 한일협정이 체결되자 우리 근현대사 왜곡의 근본 원인이 과거사 청산의 부재에 있음을 직시하고, 사실상 금기시되었던 친일문제 연구에 착수해 이듬해인 1966년 <친일문학론>을 발표해 지식인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던졌던 선생처럼, 연구소는 온갖 음해와 방해 속에서도 18년을 한결같이 오로지 사실과 진실만을 좇아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할 수 있었습니다.

 

온갖 거짓 역사가 부끄럼도 없이 판을 치는 2013년 오늘,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다시 가슴깊이 새기게 됩니다.

 

 

 

 

EBS 지식채널ⓔ <자화상>에 활용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영상다큐를 더 보고 싶으시다면 아래를 클릭해 보세요.

 

  친일연구의 선구자, 임종국

  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다둥이카드소지자  민족문제연구소 편찬실
- 세상도, 사람도 늘 변화 · 발전함을 믿는다.
친일인명사전의 기적,역사관 건립으로 이어가겠습니다.
TEL 02-969-0226 / E-mail 
historyact@hanmail.net  


 

 

Trackback 2 And Comment 3
  1. 감사합니다 2013.01.16 14:13 address edit & del reply

    ㅠㅠㅠㅠㅠㅠㅠㅠ 소름이 끼치고 눈물이 납니다. 임종국 선생님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감사합니다. 친일파 연구는 임종국 선생님께서 연구하신 범위 내에서 한 발짝도 더 넘어서지 않는다...라는 말을 들은 적 있습니다. 그 만큼 완벽한 사실관계에 근거한 자료조사...그 과정이 얼마나 힘드셨을까 생각해봅니다. 존경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임종국 선생님의 삶에서 보여준 용기와 인내는 우리 남는 사람의 몫이겠지요 감사합니다.ㅠㅠ

  2. MCITP Certification 2013.04.02 12:45 address edit & del reply

    히 포샵질로 왜곡이라고 어떻게든 우기시려고 하는 모습이.. 안쓰러웠습니다.) 생각이 1차원 적이신것 같고.. 말해도 이해 못 할 거란 말씀도 이해가 되고..

  3. ugg baratas 2013.04.13 21:00 address edit & del reply

    ♡ 살아있으므로 태양의 따스함을 느끼고 살아있으므로 너의 사랑의 느껴

꼭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_ 친일인명사전 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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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가 와해된 지 60년, 민족문제연구소 출범 18년 만인 2009년 11월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은 국민이 만들어 주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전 발간은 연구소의 18년을 한결같이 지켜주고 함께 해주신 7,000여 회원이, 2004년 국회(한나라당)의 사전편찬 기초조사예산 전액 삭감에 분노해 단 11일 만에 삭감액 5억 전부를 모아주신 3만 여 국민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 때 연구소는 그 감동을 고스란히 안고, 친일인명사전을 반드시 발간해 국민에게 돌려드리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이제 그 때의 대국민 약속을 지키고 전국민적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102년 국치일 8월 29일에 친일인명사전 앱을 출시했습니다. 

 

연구소는 그간 친일인명사전의 대중적 보급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해왔습니다. 특히 정가 30만원인 고가의 사전이기에 여러 사람이 폭넓게 접할 수 있는 공공도서관이나 학교 보급에 특히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며 사전 구입을 꺼려하는 경우가 태반이었습니다.




그래서 만들어야 했습니다. 친일인명사전 앱은 친일인사 4,389명이 수록된 전3권 총 3,00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사전을 고스란히 담았습니다. 고가라서 개인이 구매하기 어려웠고 공공도서관 등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기 때문에, “내 손안”에서 찾아보기 쉽게 함으로써 사전을 보다 간편하게 보고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내 손안의 친일인명사전!” 이제 스마트폰만 있으면 거리나 지하철, 그 어디서나 친일인명 검색이 가능하고, 인명 외에도 분야별·지역별·출생연대별 등 다양한 영역별 검색이 가능해 훨씬 편리하게 활용도 가능한 것이 큰 장점입니다.

 

연구소는 당초 무료이용을 검토했으나 개발비용과 종이책 보급 등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하여 부득이 앱 가격을 1만원으로 책정했습니다. 그리고 수수료와 세금 등 경비를 제외한 수익금 전액(건당 약 5천원)은 현재 추진하고 있는 시민역사관 건립 기금으로 적립할 예정이다.

 

시민역사관은, 일제 식민지배가 근대화의 기초라느니 5.16군사쿠데타가 근대화혁명이라느니 하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는 과거 친일독재세력의 역사바꿔치기로부터 시민의 힘으로 지켜온 진실한 역사를 오롯이 담을 것입니다. 오로지 객관적인 사료에 근거해 엄정하게 기록한 친일인명사전의 발간에도 불구하고, 더더욱 역사왜곡에 골몰하는 이들로부터 더욱 강고하게 역사정의를 지켜내 미래세대에 전달할 시민역사관 또한 반드시 세워내겠습니다.


 


- 현재 내려받기는 안드로이드폰(구글)에서만 가능하며, 애플용은 승인과정에서 예기치 않은 문제가 발생해 9월말 출시됩니다.

- 포털(다음, 네이버) 검색창에서 "친일인명사전 앱"을 검색하셔도 쉽게 구매사이트에 접근하실 수 있습니다.


 

 안드로이드용 친일인명사전 앱 다운로드 바로가기

      https://play.google.com/store/apps/details?id=com.minjok.pjdic

      (안드로이드는 아이폰·아이패드를 제외하고 국내에 출시된 스마트폰·스마트기기 대부분이 해당됩니다.)


 

  좀 더 자세한 안내를 원하신다면 아래 바로가기를 클릭해 보세요~ 

     구매안내  /  사용설명서  /  문의 및 건의







      다둥이카드소지자 │ 민족문제연구소 편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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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호환 2012.09.21 13:47 address edit & del reply

    라반특에서 앱 출시했다는 말 듣고 바로 설치했습니다. 친일인명사전을 보지 못 해서. 앱에는. 사진자료가 전혀 없네요! 아쉽습니다. 한가지 더...탭에서도 화면이 작게 나와서 불편합니다. 수정이 가능하다면...부탁드려요

    • 오인가족세트 2012.09.21 14:25 신고 address edit & del

      네, 감사합니다. 앱 용량 관계로 사진자료를 전혀 넣지 못했습니다. 이 점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화면 크기 자동변환 문제는 현재 수정개발 중이고, 완료되면 무료 업데이트할 예정이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2. 이정민 2012.09.30 00:32 address edit & del reply

    친일인명사전 앱 출시를 축하드립니다.
    아이폰에서 어제 구입했습니다. 현 한나라당(현재 새누리당)의 예산 삭감에 분노한 분들과 먹고 사느라 바빠서 그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넘어갔지만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딴나라당을 용서하지 않았을 국민들의 마음과 뜻을 같이하면서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일에 늦은 일은 없죠~
    2012년에도 살아 숨쉬는 친일 찌끄러기들을 청산하는데 밑거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애쓰셨습니다~~

  3. 버드나무 2012.10.01 01:18 address edit & del reply

    드디어 앱으로 나왔네요. 바로 구매했습니다. 정말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어야 할 앱이라고 생각합니다.

  4. NGC6543 2012.10.01 21:03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구매했습니다. 늘 고생 많으십니다. 화이팅이에요!!!

  5. 오인가족세트 2012.10.05 16:3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응원하고 지켜봐주시는 모든 분들, 항상 감사드립니다.~~

  6. 2012.10.21 00:22 address edit & del reply

    좋은 사전을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들의 노고를 잊지 않겠습니다. 저희가 할수 있는 일은 이 성과를 바탕으로 올바르게 배워서 다음세대에 옳은 역사인식을 전달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7. 독립투사 2012.12.03 06:42 address edit & del reply

    바로 구입했습니다. 우리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데 작은 힘이 되고 싶습니다.

  8. 하늘그림자 2013.01.11 14:00 address edit & del reply

    저는 어제 저녁 밤새 고민하다가 구입햇습니다.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에 소심한 저도 동참할 수 있겟죠?

  9. MCITP Certification 2013.04.02 12:46 address edit & del reply

    히 포샵질로 왜곡이라고 어떻게든 우기시려고 하는 모습이.. 안쓰러웠습니다.) 생각이 1차원 적이신것 같고.. 말해도 이해 못 할 거란 말씀도 이해가 되고..

친일인명사전! 당신의 이름으로 아이들, 지역주민, 일본 조선학교에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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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 기부프로젝트, 두 번의 성공적 마감 !

 

우리 연구소와 아름다운재단이 소셜펀딩 개미스폰서를 통해 공동으로 진행한 <정직한 역사를 나눕니다_친일인명사전 기부프로젝트>는 지난 2월 28일~4월 1일 사이 모두 2차례에 걸쳐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 결과 총 1천만 원이 넘는 모금이 이뤄졌고, 전국 각지 44곳의 대안학교, 마을도서관, 시민단체 등에 친일인명사전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조선학교에 전할 6권의 사전은 ‘조선학교돕기 몽당연필’에서 오는 6월 22일 개최한 도쿄 콘서트 즈음에 해당 조선학교로 전달할 예정이라 합니다.

 

 

두번째 <친일인명사전 기부프로젝트> 사전 기증처 20곳

 

 

 

소셜펀딩, 공감의 힘과 가능성을 확인

 

연구소는 소셜펀딩이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 아이들에게 좀 더 가까이 친일인명사전을 보급하고자 이번 프로젝트를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사전이 발간된 지 만 2년이 지난 뒤라 프로젝트의 성공여부를 쉽게 가늠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프로젝트에서 단 3일 만에 목표모금액을 초과달성하고, 연이은 2차 프로젝트 역시 20여일 만에 성공함으로써,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친일인명사전의 사회적·교육적 가치를 지지하고 역사정의실현을 열망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두 차례의 프로젝트에 참여해주신 전체 인원은 292명이고, 이 중 두 번의 프로젝트에 모두 참여한 분도 5명이나 되었습니다. 또 같은 주소의 참여자가 꽤 있어 확인해 본 결과, 한 가족이 각각의 이름으로 참여경우였습니다. 대구의 어느 노신사께서는 연구소로 전화해 인터넷으로 모금을 할 수 없으니 방법을 가르쳐 달라했고, 그 인연이 연구소 회원가입으로까지 이어질 듯합니다. “죽기 전에 대구가 바뀌는 걸 보고 싶다”는 노신사의 말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습니다.

 

 

 

 

 

친일인명사전을 이을 또 하나의 기적, 역사정의실천 시민역사관

 

2009년 발간한 이래 끊임없는 소송에 단 한 번도 패소하지 않은 친일인명사전의 힘은 철저히 자료와 사실에 근거한 진실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일제 식민지 지배의 실상과 해방 후 한일과거사 청산운동의 역사를 더욱 적극적으로 알려내겠습니다. 친일인명사전에 보내주신 지지와 성원 가득 안고 시민여러분이 보여주실 또 한 번의 기적 <역사정의실천 시민역사관> 건립을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했습니다.

아프지만 반드시 기억해야할 우리의 역사를 정직하게 보여줄 시민역사관에도 아낌없는 지지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다둥이카드소지자 민족문제연구소 편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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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의 기적,역사관 건립으로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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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병기 2012.07.17 09:43 address edit & del reply

    늦었지만 친일청산을 해야 합니다. 우리민족의 발전을 위해서는 일제강점기 니리위해 목숩 받치신 분들의 명에를 찾아줘야 하며 군자금이나 일제와 투쟁하시다 체포 구금 등으로 형무소에서 모진 고문과 탄압 강제노역으로 옥사하신 명단을 발굴하고 일제당시 제정호적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 자료발굴에 박차를 가해야 합니다. 특히 악명높던 마포 경성형무소에 대한 자료발굴과 역사관 건립을 서둘러야 합니다.

    마포 경성형무소는 정말 일제가 식민지통치의 대명사로 악명높던 형무소로 붉은 벽돌을 생산하는 데 강제노역을 시켰던 곳입니다. 이곳에서는 생존자가 많지않다고 합니다. 이옷에서 옥사하신 수형자들을 밝혀내고 자료 발굴을 서둘러야 합니다.

  2. 정병기 2012.07.17 09:46 address edit & del reply

    마포 '경성형무소' 식민지역사관 건립해야

    애국선열의 민족과 나라위해 걱정하는 호령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진정한 민족독립의 성지, 악명높던 마포 경성형무소이다

    오는 8월15일은 제67주년 광복절을 맞았다. 이날을 위해 우리 선조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잃어 가면서까지 만세를 부르고 모진 고문과 탄압에도 굴하지 않았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를 위해 우리 강토 그 어느곳인들 독립을 위해 피 흘렸던 역사가 스며있지 않은 곳이 없겠지만 지금은 잊혀져 가고 있는 이 장소만큼은 그 의미를 다시 새겨야만 하는 한 장소가 있다.

    바로 역사의 현장으로 독립투사들에게 악명 높았던 마포 경성형무소다. 지금은 그 자취조차 찾아 보기 힘들정도로 역사의 뒤안길로 묻혀지고 있지만 바로 이곳이 독립에 몸바쳤던 수 많은 이들의 피울음이 새겨져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서부지방법원과 검찰청 자리잡은 '경성형무소' 표지석만이 당시 형무소였다는 사실 알려줘

    모진고문과 탄압 그리고 굶주림, 붉은 벽돌 생산하는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병사, 그래도 독립의지 지켜내

    마포구 공덕리 105번지 경성형무소 자리에는 현재는 서울서부 지방법원ㆍ검찰청이 들어서 있지만, 당초 한일병합 조약 체결전인 1908년 서울 서대문구에 지어졌던 '경성감옥'이 수용공간이 적어지자 이곳 마포구 공덕동에 지은 후 1923년부터는 '경성형무소'로 이름을 바꾸어 불렀었다.

    경성형무소는 일제 강점기 동안 대전형무소와 함께 무기수나 장기 수형자를 수용한 곳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했다. 김일성 주석의 숙부인 김형권이 옥사한 곳이기도 하다. 저의 증조부 또한 이곳에서 41세의 짧은 생을 마감한 곳이기도 하다. 바로 지난 1928년 5월 20일 이었다. 이런 중요한 경성형무소를 자취도 없게 철거한 후 공공기관을 건축하였다는 것은 역사의식의 부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어떻게 해야 아픈 과거를 잊지 않고 미래 발전의 동력으로 승화 시킬 수 있까? 바로 이곳 경성형무소 자리 옆에라도 '경성형무소 식민지 역사관'을 건립함으로서 그 해결책을 찾는 것은 어떤가 한다. 비록 민족의 치욕스럽고 수치스러운 역사라 할지라도 일정 규모라도 복원해 전시함으로서 이를 후손들에게 보여주고 물려줘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됨으로서 현재 표지석 하나 달랑 있는 문제점을 극복하고 산 체험의 장이 되어 다시는 외세에 짓밟히거나 수모를 당하는 일이 없게끔 교훈 삼는 역사의 장소가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 이를 통해 우리 미래 세대들은 과거의 진실한 역사를 통하여 나라사랑 정신을 본받게 되고 애국정신의 근본이 될 것이라 점 때문이다.

    아울러 이를 계기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도 잊혀지거나 역사속에 묻혀가고 있는 미발굴독립유공자가 없게끔 정부는 자료발굴과 그 명예를 찾아 주는데 앞장서야 하지 않는가 한다.

    과거가 없는 현재는 없고 현재가 없는 미래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현재를 위해 그리고 먼 미래를 위해 반드시 기록되고 기억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국가가 해야 할일은 시간이 흘러도 반드시 한다는 교훈을 남기기를 원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광복 66주년을 맞은 오늘, 국가보훈과 나라사랑에 대한 국가의 중요성을 다시한번 재인식하고 다짐하는 계기가 되고 나라를 위해 희생한 국민은 국가가 반드시 책임 진다는 풍토가 확고하게 정착되기를 바라며 진정한 보훈은 말이나 구호보다 실천이 우선되고 나라위해 희생하신 애국선열이나 호국영령이 제대로 대우받고 추앙받게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 주기를 바란다.

    글쓴이/정병기<미발굴독립유공자 정용선의 증손자. 대구연합일보 논설위원>

  3. 정병기 2012.07.17 09:52 address edit & del reply

    미발굴독립유공자 정용선선생에 대한 사연입니다.

    증손자 증조부 독립운동 명예 찾으려 지난 36년 고군분투
    정용선 증조부께서는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으로 군자금모급운동을 하시다 체로 마포 공덕리 105번지 악명높던 일제식민지통치의 상징인 경성형무소에서 모진 탄압과 고문 그리고 굶주림과 강제노역으로 시달리시다 41세로 1928.5.20.옥사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작도 옥시기록 담긴 제정호적 제출해도 거증자료 부족리라며 미루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제사연을 꼭 대통령님과 청와대 관계자분들이 보시고 증손자의 바램이 이루어지고 자손된 도리를 할수 잇게 도움을 주시길 간곡히 당부드립니다.

    저의 애절하고 절박한 사연에 대하여 알려드리오니 한번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합니다.
    저희는 증조부를 비롯하여 4대가 국가를 위해 희생했습니다.

    저는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위하여 항일독립운동으로 군자금 및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체포되어 경성형무소에서 41세(1928년5월20일 오후3시15분/제정호적에 일제가 기록하였습니다.)에 젊은 나이에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보시지 못하고 옥사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서훈을 받지 못한체 잊혀진 명예가 되어버렸답니다.

    저는 증손자로서 지난 30년 세월을 증조부 독립운동 관련 자료발굴에 나섰지만 많은 자료가 소실되거나 정부의 관리부실 그리고 관보를 지시하여 소각되었답니다. 이런 사연에 대하여 이번에 국무총리실 행정심판위원회에 400여장의 증거자료와 소장을 내어 억울한 일을 해결하여 달라고 행정심판을 국가보훈처를 상대로 제기했답니다. 한번 꼭 관심 가져 주시길 바랍니다.행정심판 접수일/2009.8.28. 접수번호 행심-2940 소장 포함 400페이지 분량/동영상자료(kbs1 tv 시청자칼럼)포함

    존경하는 김 양 국가보훈처장님께

    국가보훈처장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지금까지 36년이 넘게 일제강점기에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위해 젊음을 받치며 투쟁하시다 체포되어 1928년5월20일 오후3시15분 경성형무소에서 병사하신 정용선 선생인 증조부님에 대한 자료발굴 노력을 해왔으며 독립유공자 신청을 해 보았지만 거증자료 미비로 미루어온지 벌써 20여년이 다가오고 있어 안타깝게 생각하며 안타까운 사연들이 연합뉴스, 매일경제신문, 서울신문, 브레이크뉴스 등에 보도되고 심지어는 kbs1 시청자칼럼에 출연하여 호소하여 보았지만 아직도 잊혀진 명예를 찾기가 너무나 어려워 눈물로 세우러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악명높던 경성형무소에 관련한 자료가 매우 부족하고 그에 대한 연구도 턱없이 부족한 현실에 관련자료 찾기는 너무나 어려운 현실입니다. 저는 이번에 국무총리실 행정심판위원회에 이 억울한 사연을 알려 행정처분을 받아 보기로 결심하고 모든 자료를 정리하여 제출 접수하였답니다.

    [kbs1 tv 시청자칼럼 출연] 독립운동가 기록찾기 30년./억울한 사연 행정심판청구
    작성일: 2009/08/29 AM 04:06
    작성자: 정병기(jbg1219)

    [kbs1 tv] 독립운동가 기록찾기 30년의 노력 /출연 정병기
    방송일: 20080814 /동영상/억울한 사연 국가보훈처 상대 행정심판 청구

    우리들세상/시청자칼럼/다시보기 가능합니다.(출연자/정병기) highSpeedVod(1539806);
    시청자칼럼.우리사는세상에서 그 결과를 지켜 보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억울한 세상이 없는 살기좋은 대한민국이 바로 우리가 바라는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위해 모든 거슬 버리고 조국에 받치신 애국선열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함을 가져야 하며, 또 그들의 후손드리 잊혀진 선조의 명예를 찾을수 있게 협조하고 그렇게 돼야합니다.

    서울에 사는 정병기씨는 정씨의 증조부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시다 옥사하셨지만 근거자료가 부족해 독립운동가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정씨는 근거를 찾기 위해 30년째 노력을 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정씨는 증조부의 독립운동을 증명하기 위해 애써왔지만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독립운동가에 대한 증빙자료 발굴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달라고 호소한다.

    시청자칼럼에 출연했으나 아직까지 인정하지 않아 결과를 얻지 못한 억울한 사연을 국무총리실 산하 행정심판위원회에 행정심판을 청구했습니다.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이며 답답하답니다. 다시는 이러한 일이 재발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문서가 없어지고 소각된 사유는 정부의 귀책사유인데도 인정하지 않고 변하지 않은 국가보훈처의 잘못된 관행과 고정관념이 문제라고 지적하고 싶습니다.

    지난 30년 세월을 증조부 독립운동 자료 발굴을 위해 노력했지만 국가보훈처가 인정하지않아 억울한 사연을 행정심판청구를 통하여 해결하겠다는 마음으로 국무총리실행정심판위원회에 행정심판을 제기했습니다. 소장을 포함한 서류 400여장 분량에 관련 동영상 자료(2008.8.14. kbs1 시청자칼럼) 소장에서 항일운동으로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던 중 병사로 독립유공자를 인정하여 잊혀진 명예를 회복시켜달라고 재판부에 호소했습니다.

    이제 국가보훈처인 피청구인과 청구인간에 열띤 공방이 전개 될 것입니다. 아마도 정부의 독립운동 관련 서류가 영구보존문서임에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귀책사유가 도마위에 오르게 될 것입니다.

    방송관계자분 그리고 시청자 여러분의 많은 협조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선조의 훌륭한 "독립운동 자료 찾기가 독립운동하기 보다 어려워서야" 말이 되겠습니까? 진정으로 나라를 위해 희생한 애국선열과 호국영령 그리고 그 후손들이 대우받는 대한민국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진실은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이며, 지난 30년이상을 증조부의 잊혀진 명예를 바로 세우고자 한 노력이 헛되지 않으리라 확신합니다.

    존경하는 국가보훈처장님

    후손들이 선조의 훌륭한 독립운동 관련 자료를 찾기가 독립운동 하기 보다 어려운 현실이라니 참으로 답답합니다. 선조의 잊혀진 명예를 찾을수 있게 한번 더 검토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경성형무소에서 사만하셨어도 시신도 인도받지 못한 채 증조할머니 묘소에 비석만 세워놓아 하루속히 잊혀진 명예를 찾아 국립묘지에 가묘라도 모셔드리고 싶습니다. 이것이 마땅히 후손이 해야 할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지난 36년세월이 증조부님의 명에를 찾는데 기여하게 된다면 조금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희 집안은 증조모님 독립운동으로 풍비박산이 되고 일제의 혹독한 감시와 박해로 집안이 흩어지고 머슴살이 전전하거나 처거살이로 살아와쑈다는 사실입니다. 저의 부친도 배움이 없는 (문맹인)무학이시고 저역시 국가를 위해 희생한 국가유공자이며 부친도 이번에 50년만에 국가유공자 신체검사를 받고 잇으며 저의 아들도 의경으로 입대하여 평택집회현장에서 진압근무 중 다쳐 제대를 하였답니다. 저말 위로 보나 아래로 보나 국가에 충성하고 성실하게 살고 있는 평범한 국민이랍니다.

    다시한번 정용선 선생에 대하여 철저한 조사와 검토가 이루어져 잊혀진 명에가 반드시 찾아질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미발굴독립유공자 정용선의 증손자 정병기



    덧글/일제겅점기 식민지통치의 사징이였던 악명 높던 마포공덕리 경성형무소 역사적 자료발굴과 역사관 건립을 정부가 앞장서 서둘러야 합니다.이곳이 진정한 민족독립의 성지이며 역사의 현장입니다.


  4. 정병기 2012.07.17 09:55 address edit & del reply

    광복절 맞아 애국선열 숭고한 희생정신 가슴에 되새겨야

    진정한 민족의 독립과 광복은 아직도 더 노력해야

    나라위해 목숨 받치고도 버림받고 잊혀진 애국으로 역사 속에 묻혀 안타까워
    미발굴독립운동가 후손들 뿔뿔이 흩어져, 머슴살이 처가살이 전전, 고생 달고 살아,

    광복 제67주년, 버림받고 잃어버린 애국이 되지 않게 정부가 자료 발굴 앞장서야 할 것이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아 가슴앓이를 해야 하는 슬픈 사연들이 많다. 미발굴독립유공자 발굴과 해결문제가 바로 정부의 더 미룰 수 없는 현안이자 당면 과제라고 본다. 후손들이 선조 독립운동 자료 찾아 36년 고군분투 하고 있으나 정부의 무관심과 자료의 부실 관리부족과 역사인식의 부재로 어려움을 겪고 있어 안타깝다. 광복 67주년, 적지 않은 세월이 지나갔지만 당시 나라위해 일제와 맞서 싸우다 옥사하신 무명의 애국투사와 독립투사들의 애국은 빛이 바래거나 잃어버린 애국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묻혀가고 있어 유감스럽고 통탄스럽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분이다, 독립운동가 후손 정용선선생의 증손자 36년째 고군분투하고 있다.

    일제시대 경성형무소(현 서대문형무소, 경성형무소 원래자리 공덕동 서부법원자리)에서 옥사한 증조부가 독립투사였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국가를 상대로 36년째 외롭고 지루하고 고독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미발굴독립유공자의 후손인 증손자가 있다. 나는 ‘광복 67주년’인 올해도 어김없이 아픈 몸을 이끌고 만사를 제쳐놓고 방방곡곡을 누비고 있다. 증조부가 독립투사였다는 사실을 입증할 만한 단서만 있다면 만사를 제쳐두고 어느 곳이든 달려간다. 부양할 가족도 있고 몸도 성치 않지만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증조부와 일제로부터 모진 탄압을 받았을 조상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만 둘 수 없다.

    나는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비록 인정은 받지 못했지만 "증조부님이 자랑스러운 독립투사였다는 사실을 마음 뿌듯하게 생각한다." “아버지와 친척 등의 증언을 종합하면 증조부인 정용선(1883년생) 선생은 1900년대 초부터 1916년까지 고향인 경북 봉화군을 중심으로 독립군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던 독립운동가가 확실하다”고 주장해 왔고 그것 이사실이다. 옥사시록이 제정호적에 확연하게 나와 있다. 돌아가신 고모나 큰댁이 증조부님 때문에 온&#49346;수난과 고초를 겪어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독립 자금을 모으기 위해 친일파의 집을 털고 일본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위험천만한 활동을 서슴지 않았다는 그의 증조부는 1916년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고 10년 가까이 지난 1928년 경성형무소에서 형무소장이 보낸 옥사했다는 사실통지서 한통만 날아왔다. 그 증거는 지금도 제정호적에 자세히 적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기록도 못 믿는다면 그 무엇을 믿겠는가?

    일제강점기 “당시 반일 활동가를 가두던 경성형무소에서 장기복역하다 숨졌다는 것 자체가 증조부가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희생됐다는 증거”라고 본다. 그 사실은 바로 일제가 형무소에서 온갖 탄압과 고문 그리고 굶주림과 강제노역으로 옥사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또 증조부로 인해 일제로부터 모진 탄압을 받자 이를 견디지 못한 일가친척들이 증조부 이름을 족보에서 파버렸고 증조부가 실종된 후 일제의 화가 미칠까 두려워한 가족들이 나서서 증조모를 개가시켰다는 사실은 독립운동을 했음을 뒷받침하는 명백한 ‘정황증거’라고 강조했다. 실제 호적등본을 보면 증조모는 독립투사의 아내였던 것을 감추기 위해 본명인 ‘박열이’에서 ‘정열이’로 개명까지 했다. 개가한 인동 장씨집안 호적(경북 봉화군 춘양면 석현2리)을 보면 그 내용을 잘 알 수 있는데도 정부는 두 손 놓고 있어 안타깝다.

    그러나 일제가 만든 호적에 증조부가 경성형무소에서 병으로 사망했다는 기록 외엔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것을 증명할만한 서류는 남아있지 않다. 당시 수형당한 경성형무소가 불에 탔기 때문이다. 이는 후손들의 귀책사유가 아니라 정부문서를 관리하는 정부의 책임이라고 본다. 국가보훈처는 물론 국가권익위원회 청와대에까지 서류를 안 내밀어 본 곳이 없지만 ‘객관적인 입증자료인 거증자료가 없어 독립유공자로 선정할 수 없다’는 답변뿐이었다.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증손자인 본인이 국내에서 안 되면 외국에서라도 찾아보자는 생각에 1993년 미국 의회도서관에 편지를 띄워 수형인 명부가 담겨 있을지도 모르는 마이크로필름 500장을 200달러를 주고 사오기도 했다. 일본 외무성에 수차례 서신을 띄우기도 했지만 안타깝게 결정적인 사료를 찾는 데는 실패했다. 지난해엔 국가를 상대로 행정소송까지 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지난 정권인 전두환 군사정권이 관보로 지시(형의실효에 관한 법률)“일제시대 형무소 수형인 기록을 지난 80년 12월 실수로 모두 불살라버렸던 정부가 이제 와서 독립운동으로 수감됐다는 걸 증명할 문서를 가져와야 독립유공자로 인정해준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더욱이 일본 외무성은 1995년까지 조선인 수형인 명부를 보관했지만 우리 정부는 단 한번도 그 서류를 요청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식민지 관련 자료는 반영구적으로 보존되어야 할 서류임에도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지난정부의 실책이라고 본다. 그래도 개인이 후손들이 책임지고 찾아와야 한단 말인가?

    조부이신 정덕수 할아버지는 인접 금광(풍정광업소)에서 일하다 폐병으로 숨졌다. 증손자인 자신은 경찰관으로 근무하던 지난 1980년 강도 살인범을 붙잡다 부상을 당했다. 당시 후유증에 간경화로 지금도 고통을 받고 있다. 독립운동가의 겪은 고통과 수모를 어찌 말이나 글로 다할 수 있겠는가? 본인은“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자료를 찾는 일을 후손들에게만 떠넘기는 정부가 야속하지만 어디엔가 분명히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증거가 있을 거라 믿는다.”며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정부도 이제 뒤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그 후손들 가슴에 못 박는 일이 없게 최선을 다해 한을 풀어 주어야 할 것이며, 일제강점기 관련 당시 제정호적도 중요하게 다루고 살펴 독립유공이 인정되는 분들에 대해서는 명예를 찾아주고 그 후손들에 대한 배려와 지원이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국가가 부강해지고 지금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은 나라와 민족의 부름 앞에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진 애국선열과 독립투사 미발굴독립유공자의 거룩한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시대가 변한다고 해도 나라위해 피 흘린 목숨 받친 결과가 결코 변할 수 없으며 역사적 가치가 혼동되거나 평가절하 돼서는 절대로 안 될 것이다. 고귀한 희생과 헌신에 보답하고 숭고한 정신을 받드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정부는 일제강점기 독립을 위해 일제와 맞서 싸우다 체포되어 모진고문과 강제노역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한 많은 생을 마친 악명 높던 마포 경성형무소 식민지역사관을 세워 민족의 치욕스러운 식민지 역사라도 제대로 보존하고 가르쳐 후손들에게 일제의 만행과 탄압사실을 알려야 할 타산지석의 교훈으로 삼게 될 것이다. 지난 과거의 잘못된 사실을 알려야 살아있는 올바른 역사교육이고 민족교육이 아닌가 생각한다.

    덮고 가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제대로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어야 할 것이다. 어떠한 경우라도 나라위해 목숨 받친 고귀하고 숭고한 희생은 정부가 끝까지 책임을 지는 풍토가 정착되어야 하며 예우하는 것은 당연지사라고 본다. 다시한번 정부는 말이나 구호보다 독립을 위해 목숨 받치신 옥사자에 대한 철저한 자료검증과 발굴을 통하여 그 명예를 찾아주는 일에 최선을 다해 주기를 아울러 바란다. 글쓴이/정병기 <미발굴독립유공자 후손>

'친일파 명단' 기부한 당신, 기억하겠습니다 - 네티즌 모금 8주년 친일인명사전 기부프로젝트2를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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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명단 기부한 당신, 기억하겠습니다.

▲ 2012년 1월 8일부터 3월 초까지 진행한 '그날의 당신을 찾습니다'. <오마이뉴스>·민족문제연구소 공동캠페인 ⓒ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와 <오마이뉴스>가 공동으로 진행한 '그날의 당신을 찾습니다' 캠페인이 지난 1월 8일부터 한 달여간 진행됐습니다. 이 행사는 2004년 '친일인명사전 편찬, 네티즌의 힘으로!' 모금에 참여해 주신 분들께 늦게나마 감사 인사를 전하고자 기획됐습니다. 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발간에 그치지 않고, 현재 벌어지는 역사 왜곡을 막아내고 역사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겠다는 다짐을 전함과 동시에 사전 발간에 동참해 주셨던 많은 시민들의 올바른 역사에 대한 지지와 열정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몇 분이나 찾을 수 있을까'라던 조바심은 연일 이어진 격려와 응원 덕에 희망으로 바뀌었습니다. 남겨주신 댓글을 읽으며 연구소 상근 일꾼들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작은 도리였다'는 겸손의 글, '잊고 있었는데 기억해줘 고맙다'는 감사의 글, '역사적인 과업에 동참했던 사실이 자랑스럽다'는 감격의 글, '역사정의 실현은 계속돼야 한다'는 다짐의 글을 보면서 이런 분들이 바로 연구소의 든든한 지원군이자 우리 사회를 함께 변화시켜갈 힘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3월 초까지 1140여 분이 이벤트 게시판에 이름과 주소를 남겨주셨습니다. 2월 3일, 1차로 779분께 '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영상 다큐 DVD를 발송했습니다. 그리고 2월 25일 330분께, 3월 13일 31분께 마저 보내면서 발송작업을 마무리했습니다.

"아기에게 정의가 살아있는 나라 선물하고 싶다"

▲ '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 영상 다큐 DVD의 1차 발송을 위한 포장 작업. 연구소 전직원과 아르바이트생까지 함께 한 완전 수작업 포장. ⓒ 민족문제연구소

그날의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제 삶의 하나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유윤조님

"대한민국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보여주어야 합니다. 앞장서서 일하시는 모든 분들의 노고와 노력, 그리고 희생에 감사를 드립니다." - 조정호님

"감동이네요. 당시 3살이던 아들이 벌써 11살이 되어 옆에서 함께 기사를 읽었습니다. 삐뚤어진 역사를 바로 잡아가는 민중들의 살아있는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네요. 민족문제연구소의 많은 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 김홍성님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나요. 너무 쉽게 잊고 사네요. 그때의 뜨거웠던 감정, 알 수 없던 눈물 한 방울, 참여의 소중함을 알게 된 기회였습니다. 님들과 함께해 영광입니다." - 문병수님

"지치지 않고 견뎌낸 여러분께 박수를 보냅니다. 우리 사회 바로 세우기는 ''친일청산''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끝까지 황소걸음으로!" - 곽성순님

"불의가 지배하고 있는 지금, 정의라는 이름들이 하나둘씩 새겨지는 것 같아 가슴이 찡해 옵니다. 정의가 살아있다는 것, 양심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어서 감사합니다." - 이덕우님

"우리 딸 최예진 양이 이제 9살입니다. 딸아이에게 정의가 살아있는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서 참여했는데 너무 가슴 뿌듯합니다. 그날의 감동이 되살아나는 듯 하네요. 이제 제대로 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보여줄 수 있겠네요." - 최석순님

"태어날 아기에게 정의가 살아있는 나라를 선물하고 싶다고 했던 새신랑입니다. 그 아기가 벌써 올해 초등학교 2학년이 됩니다. 친일인명사전은 제가 근무하는 학교 도서관에 주문을 해서 현재 도서관에 있습니다. 중요한 일을 한 민족문제연구소에게 감사드립니다. 고 김근태 선생님이 하신 2012년을 점령하기 위해 미력한 힘 보태도록 하겠습니다.^^ " - 류승용님

 ('그날의 당신을 찾습니다' 게시판에 남겨 주신 글 중에서)


<오마이뉴스>에 실린 특별기고에 대한 반응도 뜨거웠습니다. 모두 4회에 걸쳐 게재한 기사의 총 조회수는 무려 50만 건에 달했습니다. 특히 '일본서 더 잘나가는 친일파 명단, 참담하다' 기사에서 친일인명사전의 공공도서관 보급률이 저조하고 학교 현장에서조차 사전 보급이 차단되고 있다는 사실이 소개되자, 연구소에 사전 구매 문의가 무척 활발해졌습니다.

한편, 사전의 대중적 보급을 위한 자발적인 실천도 다양하게 전개됐습니다. 다음 아고라에는 '공공도서관과 학교에 친일인명사전 보급을 촉구한다'는 서명운동이 펼쳐졌습니다. 이와 함께 공공도서관에 사전 비치를 위한 '희망도서 신청 방법'을 상세히 알리는 블로거들도 늘었습니다. 또 어느 대학생들은 직접 '친일인명사전' 영상을 제작해 사전 보급을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자발적 노력과 관심은 또 한 번의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연구소는 지난 2월 28일 아름다운재단 소셜펀딩 개미스폰서를 통해 한 달을 모금 예정기한으로 '친일인명사전 기부프로젝트'를 개시했습니다. 의외로 반응이 빨라 모금 개시 이틀 만에 목표 모금액(489만5000원)의 6분의 1이 모였고, 3일째인 3월 2일 새벽부터는 참여 인원이 빠르게 증가하더니 오전 9시부터는 거의 분단위로 모금이 이뤄졌습니다. 결국 3월 2일 오후 5시 3분, 친일인명사전 기부프로젝트는 단 3일 만에 당초 목표 모금액을 초과 달성하며 성공적으로 마감됐습니다(달성 금액 497만1000원).

 
친일인명사전은 계속 읽혀야 합니다


자발적인 사전 보급 운동과 사전 기부프로젝트에 대한 뜨거운 반응은 온전한 친일청산과 역사정의실현에 대한 시민들의 절절한 열망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습니다. 이 프로젝트가 초 단기간에 마무리되서 많은 분들께서 함께 하지 못해 아쉬움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또, 친일인명사전 보급을 통한 역사정의실현의 열망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는 당부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바람을 담아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3월 14일부터 '친일인명사전 기부프로젝트 2'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총 20권의 친일인명사전을 농어촌 지역 도서관과 대안학교, 동일본 지진 피해 조선학교 등에 보낼 수 있게 돼 정직한 역사, 친일인명사전을 보다 많은 이들과 함께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리겠습니다.
 
친일인명사전 기부프로젝트2 바로가기

 우리는 '그날의 당신을 찾습니다' 캠페인에 참여한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몸소 역사정의 실현을 바라며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아끼지 않는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 모든 당신들과 함께 친일인명사전에 이어 역사정의실현의 보루가 될 시민역사관 건립에 더욱 매진하겠습니다. 참 역사의 주역인 '당신'과 함께 '정직한 역사'의 지킴이가 되겠습니다. 지켜봐 주시고 또한 함께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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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 고양이 │ 민족문제연구소 자료실
못난 조상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친일인명사전의 기적,역사관 건립으로 이어가겠습니다.
TEL 02-969-0226 / E-mail
 historyac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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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장교 출신 유재흥, 아버지 유승렬에 이어 대전 국립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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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탑 비문 :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제3대 합참의장(1957~59년)과 제19대 국방장관(1971~73년)을 지낸 유재흥 예비역 육군 중장이 91살을 일기로 26일 별세했다. 군은 29일 오전 10시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정승조 합참의장을 장의위원장으로 하는 합참장(合參葬)을 치렀고, 이후 고인은 국립 대전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되었다.



》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 검색 결과

  


  원균을 능가하는 졸장, 북한군 최고의 명장 ……


》유재흥 전 국방장관

이와 같은 비아냥거림은 고 유재흥 장군의 6·25전쟁 중 전적 즉 자신이 지휘한 부대마다 패전하고, 심지어 그로인해 자신의 군단이 해체되기까지 했던 것을 두고 일컫는 말들이다. 그런데 29일 치러진 합참장에서 “당신은 휴전 때까지 한 번도 전장을 떠나 본 적이 없는 진정한 전투지휘관”이라며 그의 전적은 치하되었다. 더 나아가 그의 불굴의 용기와 숭고한 헌신, 투철한 군인정신은 후배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호국의 불씨로 남으리라 한다. 아무리 고인에 대해 너그러운 것이 우리네 풍습이라 해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친일은 집안 내력


유재흥은 '부자(父子) 친일 장교'로 유명하다. 그의 친아버지 유승렬(劉升烈, 1891~1958)은 1914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26기로 졸업해 나고야의 일본군 제3사단 보병 6연대에서 견습사관 과정을 거쳐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그리고 1920년대 중반까지 나고야에 머물던 중 1921년 8월 2남 유재흥을 낳았다. 유재흥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해 1941년 제55기로 졸업했고 이후 근위보병 제3연대 일본군 보병소위로 임관했다. 더불어 양자로 출계(出系)한 큰아버지 유익렬(劉益烈, 1886~?)은 일제 때 충청남도 청양군수·보령군수를 지냈으며, 유승렬의 딸이자 유재흥의 여형제는 일제 말기 경북 선산군수를 지낸 부완혁(夫琓爀, 1919~1984)과 결혼했다. 한 집안에서 본인을 비롯해 총 4명이 현재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는 것이다.



》경성육군지원병훈련소에 입소한 지원병 ⓒ 민족문제연구소


  학병지원은 조선을 위한 일


특히 유재흥은 일본군 보병소위 시절이던 1943년 11월 도쿄의 메이지대학(明治大學) 강당에서 열린 ‘특별지원병 궐기대회’에 연사로 참여했다. 연설에서 자신은 일본 육사를 나온 중위로서 아침저녁으로 천황을 지키고 있다고 소개하고, ‘지금 우리 조선인은 우리의 가치를 일본인에게 충분히 인식시킬 기회’이며 ‘이 시국에 일본 군대 장교로서 능력을 가진 조선인 학생들이 군에 들어가 밑에 거느린 일본 병정들을 가르쳐 주면서 임무를 완수하면 그 성과는 조선인을 위한 일이 될 것’이라고 군 입대를 종용했다.


이때 이광수, 최남선도 함께 한 ‘조선인 학병지원 촉구 연설’은 일본에 유학 중인 조선인 학생들까지도 학병 ‘지원’을 하도록 권유한다는 명목이었다. 그러나 이는 일제가 미국을 상대로 벌인 태평양전쟁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직접 조선인 청년을 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몰기 위한 전방위적 압박의 한 수단이었다. 


     『친일인명사전』 수록 유재흥 항목

     유재흥 劉載興│江本載興, 1921~2011

일본군 대위


1921년 8월 3일 일본 나고야(名古屋)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충청남도 공주다. 일본육사 제26기 졸업생으로서 일본군 대좌를 지낸 유승렬(劉升烈)의 차남이다.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보령군수를 지낸 큰아버지 유익렬(劉益烈)에게 양자로 출계(出系)했다. 다섯 살이 되던 해 부친이 대위로 승진해 함경북도 나남으로 부임지를 옮기면서 경원군으로 이사했다. 경원의 소학교를 다니다가 3학년 때 나남소학교로 전학했다. 1년 만인 1932년 부친이 용산(龍山) 제20사단 보병 제79연대 대위로 옮기자 경성 삼판심상소학교로 전학했다. 1932년 경성의 용산중학교를 입학했으나 3학년 때 부친이 평양 77연대로 전속(轉屬)되어 평안북도 일원의 신의주중학교, 신의주동중학교, 신의주상업학교, 의주농업학교, 정주 오산중학교의 배속 장교를 맡게 되자 신의주중학교로 전학했다.

1937년 신의주중학교 4학년 2학기에 평양 77연대에서 일본육사 예과에 응시해 합격한 후 1938년 12월 일본 육군예과사관학교를 입학했다. 신원보증인은 부친이 나고야 6연대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할 때 중대장을 지낸 이시카와(石川房三) 예비역 소장이다. 1939년 11월 예과사관학교를 마친 후 도쿄(東京) 부근에 자리 잡은 근위보병 제3연대에서 4개월의 대부근무(隊付勤務 : 부대실습)를 거친 후 1940년 4월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1941년 7월에 제55기로 졸업했다. 졸업 후 견습사관으로 다시 근위보병 제3연대 유수대(留守隊 : 동부 제6부대) 보병포 중대에 배치되었다가 며칠 뒤 지바(千葉) 소재 보병학교에 입교해 3개월 과정의 보병포 교육을 받고 근위보병 제3연대로 복귀해 일본군 보병소위로 임관했다. 당시 근위보병 제3연대장은 영친왕 이은(李垠)이었다.

1943년 11월 14일 상부의 지시로 도쿄의 메이지대학(明治大學) 강당에서 열린 ‘특별지원병 궐기대회’에서 이광수·최남선과 함께 조선인 학병지원을 촉구하는 연설을 했다. 자신은 일본 육사를 나온 중위로서 아침저녁으로 천황을 지키고 있다고 소개하고, ‘지금 우리 조선인은 우리의 가치를 일본인에게 충분히 인식시킬 기회’이며 ‘이 시국에 일본 군대 장교로서 능력을 가진 조선인 학생들이 군에 들어가 밑에 거느린 일본 병정들을 가르쳐 주면서 임무를 완수하면 그 성과는 조선인을 위한 일이 될 것’이라고 군 입대를 종용했다. 같은 해 보병 대위로 진급했고 박격대(迫擊隊) 대장을 맡았다.

1945년 3월 유수연대 보병포 중대장으로 근무하다가 본토 결전에 대비해 제206사단이 편성되면서 사단 중박격포연대 제2대대장으로 옮겼다. 새로 포병학교에 들어가 1개월간 중박격포 교육을 받고 부대 편성과 훈련을 마치고 규슈(九州) 구마모토(熊本) 아리아케(有明) 해안에 배치되었다가 패전을 맞이했다. 1945년 5월 육군대학에 응시했으나 일본이 항복함으로써 무산되었다. 교토에 있는 사단사령부에서 복원(復員) 절차를 밟고 육사 예과 과정의 대부실습 때 상관인 대본영(大本營)의 구메고로(久米五郞) 중령의 도움으로 도쿄에서 후쿠오카(福岡)까지 항공편으로, 후쿠오카에서 부산까지는 배편으로, 부산에서 서울까지는 기차를 이용해 9월 28일 귀국했다.

서울로 돌아온 후 부친과 일본 육사 동기생인 이응준(李應俊)의 추천으로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해 1946년 1월 졸업하고(군번 3번) 육군 대위로 임관했다. 이후 과도정부 군수국장과 제6여단장 등을 지냈으며, 1948년 12월 대령으로 진급했다. 1949년 1월 육군사관학교 부교장으로 임명받았으나 3월에 제주도지구 전투사령관에 임명되어 4·3사건을 전후해 2개월간 제주지역에서 ‘토벌작전’을 지휘했다. 1949년 5월 초 6여단 소속 8연대 제1대대장 표무원(表武源)과 제2대대장 강태무(姜太武)가 대대원들을 이끌고 각기 집단 월북한 사건으로(강·표사건) 제6여단장 김백일(金白一)이 해임되고 제6여단이 제6사단으로 승격되자 초대 사단장으로 부임했다. 이와 함께 준장으로 승진했다. 1950년 1월 태백산지구 전투사령관으로 공산유격대를 소멸하는 작전을 전개하다가 6·25 개전 보름 전 의정부 방면의 제7사단장으로 부임했다. 6ㆍ25전쟁에 제7사단장·제2군단장으로 참전했으며, 1950년 9월 육군 소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육군 참모차장, 제2군단장, 연합참모본부 총장, 제1군사령관을 역임한 뒤 1960년 7월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다. 1960년 8월부터 주태국 대사, 주스웨덴 대사, 주아이슬랜드 대사, 주이탈리아 대사를 지냈고, 1970년 9월 대통령비서실 안보국방담당 특별보좌관을 맡았다. 1971년 8월 제19대 국방부장관을 맡아 1973년 12월까지 재직했다. 1974년 대한석유공사 사장, 1980년 대한석유협회 초대 회장, 1991년 성우회(星友會) 회장을 역임했다. 을지·충무·금성·태극 무공훈장과 1등 수교훈장 등을 받았다. 2011년 11월 26일 사망했으며, 국립대전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되었다.


[참고문헌]

『京城日報』 1940.3.2 ; 滿鮮日報』 1940.3.5 ; 每日新報 1943.11.15, 1943.11.17 ; 朝鮮日報』 1949.5.21 ; 東亞日報』 1949.6.4 ; 三千里』 제12권 제4호(1940.4) ; 大韓民國人事錄』(1949.12) ; 忠淸人士集』(1957.5) ; 韓國名士大鑑 第1輯』�(1958.2) ; 1966年版 韓國·北朝鮮人名辭典』(1966.5) ; 現代韓國人名辭典(合同年鑑 67年版 別冊)』(1967.1) ; 陸軍士官學校(1969) ; 韓國出身 日本陸士·滿洲軍校同窓生名簿』(1975) ; 韓國戰秘史』(1977) ; 悲劇의 軍人들』(1982) ; 日本留學韓國人名錄』(1982.10) ; 創軍』(1984.2) ; 滿洲國軍誌』(1987) ; 大韓民國歷代三府要人總鑑』(1993.10) ; 激動의 歲月 : 劉載興回顧錄』(1994) ;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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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영섭 2012.12.21 23:29 address edit & del reply

    -_-;;; 4.3항쟁을 진압한놈...
    현리전투 대패의 장본인...아니 인류역사에 남을 대패의 장본인...

    저사람 인민군 장군아니었나요??

    참네 욕먹으면 오래산다더니....
    오래살거니와 자연사까지하는 호강에 국립묘지라....

11월 25일 친일인명사전 발간 2주년 국제학술회의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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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포스팅 에서 말한 것 처럼 친일인명사전 발간 2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과거에 대한 성찰, 미래를 위한 역사쓰기; 친일인명사전의 성과와 과제"가 11월 25일 충무아트홀에서 개최되었습니다.  

못 오신 분들을 위해서 학술대회 풍경사진 올립니다.

아침부터 준비하느라 분주한 모습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충무아트센터 안내소에 설치된 민족문제연구소 배너 ⓒ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 주관이었습니다. ⓒ 민족문제연구소


진행을 맡은 박수현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민족문제연구소



여는 말은 전 한성대총장인 윤경로 선생님이 해 주셨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이른 시간이었지만 많은 분들이 함께 해주셨습니다 ⓒ 민족문제연구소

 

전 국사편찬위원장 이만열 선생님의 기조강연 ⓒ 민족문제연구소


이만열 선생님 기조강연 풍경 ⓒ 민족문제연구소


첫 번째 발표는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이었습니다. ⓒ 민족문제연구소


ⓒ 민족문제연구소

 

ⓒ 민족문제연구소

 

두 번째 발표는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자료실장님이었습니다. ⓒ 민족문제연구소

 

두 번째 주제는 "시민사회의 친일청산운동 전개와 그 영향"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

 

토론은 부산교대 전진성선생님이 맡아주셨습니다. ⓒ 민족문제연구소

 

세 번째 발표는 김기협 선생님입니다. ⓒ 민족문제연구소


김기협선생님은"한국 민족주의와 친일인명사전"이라는 주제로 발표했습니다. ⓒ 민족문제연구소


토론은 성공회대 정해구 선생님입니다. ⓒ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민족문제 연구소 소장님입니다. ⓒ 민족문제연구소

 

네 번째 주제는 친일분제와 일본사회입니다. 오사카 산업대 후지나가 다케시 선생님이 발표하고 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마지막 주제는 독일의 과거청산의 지속과 공직자입니다. 서울대 이동기 선생님의 발표였습니다. ⓒ 민족문제연구소


마지막은 종합토론입니다. ⓒ 민족문제연구소

 

각 발표 때 못한 질문들을 중심으로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 민족문제연구소

 

윤경로 이사님의 발언 ⓒ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님의 발언 ⓒ 민족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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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조상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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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임종국 선생 여동생의 헌시 "오라버니 - 22주년 다시 사는 그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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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11일 제 5회 임종국상 시상식이 열렸다는 건 지난 포스팅 "제5회 임종국상 시상식 사진"과  "제5회 임종국상 시상식이 열립니다" 에서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임종국 시상식 때마다 참석하시는 임종국 선생님의 여동생 임순화 여사가 헌시를 써오셨습니다.
지면으로나마 임종국 선생님 22주기를 기리는 헌시를 나누고자 여기에 소개합니다.

고 임종국 선생님이 작업하신 인명카드ⓒ 민족문제연구소


*고 임종국 선생님 약력*
1929 경남 창녕 출생
1952 고려대학교 정치학과 입학
1959 《문학예술》誌에 시 <비(碑)>발표로 등단, 60년대 '사화집(詞華集)' 동인으로 詩作 활동
1965 굴욕적 한일회담을 계기로 일제침략사와 친일파에 대한 연구 시작
1966 《친일문학론》 《이상전집》 출간
1968 고려대학교 4학년 재입학
1969 고려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1970 《발가벗고 온 총독》 출간(선문출판사)
1974 《한국문학의 사회사》 출간(정음사)
1978 《醉漢들의 배》 출간(평화출판사)
1980 《韓國社會風俗野史》 출간(서문당)
1981 《정신대 실록》 출간(일월서각)
1982 《일제침략과 親日派》 출간(청사)
1984 《밤의 일제침략사》 출간(한빛출판사)
1985 《일제하의 사상탄압》 출간(평화출판사)
1986 《한국문학의 민중사》 출간(실천문학사)
1987 《친일논설 選集》 출간(실천문학사)
1988 《日本軍의 朝鮮侵略史 1》 출간(일월서각)
1989 《日本軍의 朝鮮侵略史 2》 출간(일월서각)
1989 '친일파총사' (전10권) 발간을 계획하고 저술 중 폐기종으로 타계
1992 故 임종국 선생 제6회 심산상 수상 (수상저서 : ≪친일문학론≫≪일제침략과 친일파≫)
2003 KBS1TV 인물현대사 '임종국'편 방영(연출 김정중)
2005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 출범(회장 장병화)
2005 보관문화훈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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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무득 2011.11.18 20:09 address edit & del reply

    진정한 선구자

    • 시민역사관 2011.11.21 12:00 신고 address edit & del

      네, 임종국선생님이야말로 정말 진정한 선구자입니다.

  2. louboutin femme 2013.04.20 21:44 address edit & del reply

    슬픔을 나누면 반으로 되지만, 기쁨을 나누면 배가된다.

친일인명사전 발간 2주년 기념,국제학술회의가 개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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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된 지 2주년이 되었습니다. ⓒ 민족문제연구소


2011년 11월 25일 금요일, 오전 9시30분 부터 5시까지 충무아트홀 컨벤션 센터에서 『친일인명사전』발간 2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가 열립니다. 

학술회의의 제목은 
 
"과거에 대한 성찰, 미래를 위한 역사쓰기; 친일인명사전의 성과와 과제" 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모시는 말씀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청산의 기치를 높이든 지 18년,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구성되고 민족사정립의 대역사에 착수한 지 8년만인 지난 2009년 11월 8일. 수많은 이들의 정성과 염원이 합쳐진 끝에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이 드디어 첫 결실을 맺었습니다. 친일문제연구총서 중 핵심 부분인 인명편 전3권을 세상에 내놓게 된 것입니다.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여기에 이르기까지 한국근현대사의 과업을 추진해 온 힘은 오로지 국민적 지지와 성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제 발간 2주년을 맞아 편찬과정을 돌이켜보면서, 친일인명사전 발간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와 사회적 파장 그리고 이후의 과제를 짚어보는 토론의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친일·독재 미화와 역사교과서 개악으로 들끓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은, ‘기억과 책임’이라는 상식적 해법이 결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임을 반증해주고 있습니다. 역사의 진전을 바라는 선생님. 바쁘시더라도 부디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주시고, 역사정의를 향한 도정에 지혜와 힘을 보태주십시오. 고맙습니다.

2011. 11. 16.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윤경로·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김병상
 


순서

09:30~09:40 개회사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09:40~10:10 기조강연  친일인명사전 발간의 역사적 의의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주제발표  사회 : 박수현 민족문제연구소

10:10~10:50 1주제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선정기준과 범주   
                                발표 :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토론 : 김명구 안동대

10:50~11:30 2주제      시민사회의 친일청산운동 전개와 그 영향  
                                발표 :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토론 : 전진성 부산교대 

11:30~12:10 3주제     한국민족주의와 친일인명사전   
                                발표 : 김기협 역사학자   토론 : 정해구 성공회대

12:10~13:00               점 심

13:00~13:40 4주제     친일’ 문제와 일본사회   
                               발표 : 후지나가 다케시 오사카산업대   토론 : 홍종욱 도시샤대 

13:40~14:20 5주제     독일 과거청산의 지속과 공직자-나치시기 외교관들의 책임문제
                               발표 : 이동기 서울대   토론 : 한정숙 서울대

14:30~17:00 종합토론 사회 : 안병욱 가톨릭대   발표자·토론자 전원
 




오시는 길
충무아트홀 컨벤션센터 6호선 신당역 9번출구 2호선 신당역 1번출구 2,4,5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2번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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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ac ralph lauren 2013.04.23 00:42 address edit & del reply

    바보처럼 이제와서야 난 뒤늦은 후회를 하고 있어

제5회 임종국상 시상식이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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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국상 시상식이 열립니다. 

 
제 5회 임종국상 시상식이
 11월 11일 오후 7시  조계사 안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전통문화 예술공연장에서 열립니다.  

 임종국상은 ‘친일청산’, ‘역사정의 실현’, ‘민족사 정립’이라는 선생의 높은 뜻과 정신을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 올바르게 계승하고 있는 개인과 단체를, 학술·문화와 언론·사회 두 부문에서 선정해 수여하는 상입니다. 2005년 부터 시작되었고 올 해가 다섯번 째입니다. 


2011년 임종국상 수상자는 이재승 교수, 이민석 변호사


이번 임종국상 수상자는 학술부문 이재승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사회부문 이민석 변호사입니다. 이재승 교수는 저서 <국가범죄>로, 이민석 변호사는 한일 과거사와 친일분제 관련 법정 투쟁에서 적극적인 법률 지원활동으로 선정되었다고 합니다.
 

 

제5회 임종국상 수상식은 2011년 11월 11일 7시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열립니다.ⓒ 민족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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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ay ban glasses 2013.04.30 07:21 address edit & del reply

    태양이 바다에 미광을 비추면, http://rtff.scarpehoganlt.com/ hogan sito ufficiale,나는 너를 생각한다.

살아움직이는 친일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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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원혼을 달래는 위령제, 친일인명사전

친일 인명사전 편찬과정은 원혼을 달래는 위령제의 시작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편찬과정 그 자체는 항일독립 원혼을 달래는 위령제의 시작이었다.

친일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우리 현대사의 비극적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동시에 ‘친일’은 비판받아 마땅하다는 ‘상식’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온 국민의 정의로운 모금은 사전편찬을 이끌었고, 객관적 사실의 기록은 역사가 전해주는 진실을 보게 했다.

두툼하고 묵직한 세 권짜리 사전.


친일인명사전은 그간 우리 현대사의 주역으로 모든 부와 권력과 명예를 가진 친일파들에게 친일의 증거를 두 눈으로 확인시켜주며, 우리 사회의 ‘왜곡된 기념’들을 하나 둘 거둬들이고 있다.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독립유공자의 서훈취소

친일인명사전은 편찬 후, 살아움직이며 활약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살아 움직이는 사전의 활약상을 올해 결정된 독립유공자의 서훈 취소부터 살펴보려 한다. 이 외에도 여러 방면에서 진행되는 친일인사의 기념사업에 거론되는 인물들에 대해 친일인명사전에 기재된 그들의 친일행적을 중심으로 계속해서 살펴보려 한다.


우선 친일인명사전이 편찬·발간된 지 1년 여 만인 지난 2010년 12월 보훈처에서는 사전에 수록되어 있는 독립유공자 20명 중 19명에 대한 서훈 취소를 결정했고, 다음 해인 2011년 4월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대통령 재가를 얻어 서훈 취소를 확정했다. 나머지 1명은 동아일보 창립자인 김성수 전 부통령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결정 취소 행정소송을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서훈 취소 결정에서 일단 유보되었으나 얼마 전인 10월 20일 1심 재판에서 그의 친일행위를 인정하는 판결이 내려져 서훈 취소 가능성이 높아졌다.


2011년 4월 현재 서훈취소자

19명의 서훈 취소자는 항일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으로 잘 알려진
장지연, 초대 내무부 장관 윤치영 등이 포함되었다. 이들을 서훈별로 보면 건국훈장 독립장 4인, 건국훈장 애국장 3인, 건국훈장 애족장 11인, 건국포장 1인 등이다. 김성수의 경우는 이들보다도 높은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고, 같은 대통령장 상훈자로는 신채호, 이상재, 이봉창, 장인환, 전명운 등의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 2011년 현재 서훈취소자 19명 + 1명 >

이름 대표경력(친일) 서훈 서훈 근거 해방 후 경력
강영석 동양지광사 경리부장 건국훈장 애족장(1990) 광주학생운동 관련
김우현2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장로교 목사
건국훈장 애족장(1990) 3·1운동 참여 YMCA연맹 이사장/중앙신학교 교장
김응순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총
회연맹 이사장

장로교 목사
건국훈장 애족장(1993) 청년의용단(비밀결사) 인천 보합공민학교 보합고등공민학교 설립 및 교장
김홍량 국방금품헌납자
국민
동원총진회 이사
건국훈장 독립장(1977) 안명근사건(안악사건) 보국기금실행위원회 위원장/ 삼일동지회 영수
남천우 일본기독교조선교단 충남교구
감리교 목사
건국훈장 애족장(1990) 십자가당 대전 중앙감리교회 설립 및 담임/민주당 중앙위원
박성행 촉탁보호사
도회의원
건국포장(1982)→
건국훈장 애국장(1990)
3·1운동 참여대한독립단
박영희1 대흥사 주지
조선불교 중앙교무원 이사
대통령표창(1977)
건국훈장 애족장(1990)
3·1운동 참여/ 만당(비밀결사) 전국승려대회에서 중앙감찰원장 선출
유재기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경북노회연맹 이사장
장로교 목사
건국훈장 애족장(1995) 농촌·농민운동(청년면려회) 기독신민회 조직국장/ 흥국형제단 조직 및 기관지 흥국시보 창간
윤익선 대동일진회 동학원 교장 건국훈장 독립장(1962) 조선독립신문(3·1운동)
윤치영 중앙기독교청년회 부총무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건국포장(1982) 2·8독립선언 참여/ 미주방면 독립운동 제헌의원/ 초대 내무부장관/ 민주공화당 의장서리
이동락 대동민우회 이사 건국포장(1977)→
건국훈장 애국장(1990)
고려혁명당 천도교총부 교화원장/ 천도교중앙총부 종무원장
이종욱 월정사 주지
조계종 종무총장
건국훈장 독립장(1977) 3·1운동 참여/ 임시정부 활동 국회의원/ 동국대 이사장/조계종 총무원장
이항발 민우회 검사장 대통령표창(1982)→
건국훈장 애국장(1990)
노동운동/ 신간회 제헌의원, 일민구락부 부위원장
임용길 일본 동아신문 사장 대통령표창(1982)→
건국훈장 애족장(1990)
민족부활단 결사대/ 부산청년회 동아시보 창간(사장)
장지연 언론인(친일 논설·시) 건국훈장 독립장(1962) 언론
차상명 범어사 주지(국방헌금 주도) 대통령표창(1977)→
건국훈장 애족장(1990)
3·1운동 참여
최준모 국민정신총동원천도교연맹이사
국민총력 천도교연맹 평의원
대통령표창(1980) 3·1운동 참여 천도교총부 장로
최지화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연맹 이사장
장로교 목사
대통령표창(1962)→
건국훈장 애족장(1990)
3·1운동 참여 평양장로회 신학교 교수
허영호 해은사 주지
조선불교 중앙교무원 상무이사
건국훈장 애족장(1990) 3·1운동 참여 동국대학 초대 학장/  국회의원
※김성수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조선방송협회 평의원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동아일보사 창립
현 고려대학교 인수경영 등 민족교육
동아일보 사장/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민주국민당 창당/ 대한민국 부통령

  ※김성수는 이후 추가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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