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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3.12 [뉴스펀딩] 해방 70년, 나는 싸우고 있다
  2. 2015.02.04 역사교과서 파동 타임라인
  3. 2015.01.29 2014 민족문제연구소 10대 뉴스-격동의 갑오년, 과거회귀세력에 맞서 싸운 민족문제연구소의 주요활동
  4. 2015.01.29 회원 여러분께 호소드립니다 (1)
  5. 2013.02.08 이웃 할아버지 같으셨던, 일제강점기 마지막 의사 고 조문기 선생을 추모하며 (1)
  6. 2012.12.05 박정희 혈서기사가 조작이라구요? - 종북놀음과 박정희 혈서 (1) (3)
  7. 2012.12.05 박정희 혈서기사가 조작이라구요? - 종북놀음과 박정희 혈서(2) (10)
  8. 2012.11.22 당신이 몰랐던 진짜 역사가 온다! 역사다큐 <백년전쟁> 시사회 (1)
  9. 2012.10.31 백선엽은 자신의 반민족 행위 스스로 고백했습니다 (3)
  10. 2012.09.28 <유신의 추억 그리고 인혁당> 전국순회 공동전시

[뉴스펀딩] 해방 70년, 나는 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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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70년, 나는 싸우고 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목소리

 

 

 

 

  

일제 강점 말기 1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해외의 전장과 군수공장, 탄광으로 끌려갔습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끌려갔다 원자폭탄에 죽은 사람들과 평생을 방사능에 고통 받은 사람들,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포로로 죽어간 사람들, BC급 전범으로 몰려 처형당한 사람들, 사할린에 억류되어 돌아올 수 없었던 사람들, 13살 어린 나이에 공장에 끌려가 가혹한 노동을 강요당한 할머니들,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어 영혼마저 감금된 2만 1천여 명의 희생자들..

 

 

"분하고 억울한 사연은

끝이 없습니다"

 

 

2012년 5월 24일, 한국 대법원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강제동원 피해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니 일본기업은 피해자에게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일본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한 30년이 넘는 싸움에 마침표가 찍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베신조 일본 총리는 '한국 대법원의 판결이 나오더라도 따르지 말라'고 기업들에 지시했습니다. 오히려 판결이 확정되면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습니다. 그 사이 재판을 이어가던 원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해방 70년, 한일협정 50년이 된 지금도 여전히 식민지배의 고통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미안하다' 사과 한 번 받아보지 못한 피해자와 유족들은 오늘도 일본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싸우고 있습니다.

 

이들의 무책임하고 뻔뻔한 태도를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독일이 주변 국가들과 서로 존중하며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것은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국제사회가 독일이 저지른 '죄'를 기억하고, 끊임 없이 추궁했기 때문입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증언을, 생생한 목소리를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이 필요한 때입니다. 

 

여러분들의 힘을 모아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고 번역해서 영상을 만들겠습니다. 올해 5월 '야스쿠니반대촛불행동in독일' 캠페인(독일), 8월 '전후 70년 동아시아평화를 위한 시민집회'(일본)에서 유럽과 일본, 중국, 대만, 오키나와의 시민들에게 일본 제국주의가 저지른 만행을 알리겠습니다. 또한 ‘국제노동기구’(ILO)에 증언영상을 제출하여 당시 일본의 불법행위를 고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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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과서 파동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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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보기>

 

- '역사교과서 파동' 타임라인(전체) http://www.minjok.or.kr/timeline.html


- 2002~2007 http://www.minjok.or.kr/timeline(1).html
- 2008~2012 http://www.minjok.or.kr/timeline(2).html
- 2013~현재 http://www.minjok.or.kr/timeline(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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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민족문제연구소 10대 뉴스-격동의 갑오년, 과거회귀세력에 맞서 싸운 민족문제연구소의 주요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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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여러분께 호소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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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공사잘해 2015.02.15 19:51 address edit & del reply

    아자아자 힘네세요

이웃 할아버지 같으셨던, 일제강점기 마지막 의사 고 조문기 선생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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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국지사 고 조문기 선생님

2008년 그해 설을 이틀 앞둔 2월 5일,

설 쇨 마음에 조금은 들떠있던 연구소 식구들에게 비보가 전해졌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님이신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님의 별세 소식이 그것이었습니다.

 

조문기 선생은 1991년 연구소 출범과 함께 "친일청산은 바로 오늘의 독립운동이다"라는 신념으로 투신하여 1999년 민족문제연구소 2대 이사장에 취임하셨고,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친일청산을 위해 온힘을 쏟으셨습니다. 

  

국가가 개최하는 3·1절이나 8·15 광복절 행사에 참석하기보다 진정한 조국독립을 위해 거리의 투쟁을 선택하셨던 선생의 마지막 소원은 '친일인명사전' 편찬이었지만, 끝내 보지 못하고 향년 82세의 나이로 별세하셨습니다.

 

 

▲ 조문기 선생의 노제가 선생의 의열투쟁 현장인 옛 경성부민관(현 서울시의회 본관)에서 거행되었다. ▲ 조문기 선생의 마지막 소원인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된 후에 선생의 묘역에서 헌정식을 가졌다.

 

조문기 선생님은 일제강점기인 1945년 7월 24일 마지막 의열투쟁으로 널리 알려진 “부민관 폭파 의거”의 주역이셨습니다. 해방 후에도 선생은 조국의 완전한 독립과 통일을 위한 투쟁을 중단하지 않으셨지만, 너무도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을 하시고도 몇 차례의 투옥과 고문, 옥고를 고스란히 치르셔야만 했습니다. 선생이 “죽으면 선배선열들에게 보고할 것이다. 죽는 날까지 독립투쟁을 하다 왔노라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던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끼는 요즘입니다.

 

▲ 부민관 폭파의거 주역들 좌로부터 강윤국, 조문기, 유만수 선생 ▲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재직 중 부민관 표석 앞의 조문기 선생

 

지난 2월 5일 독립투사 고 조문기 선생의 5주기 추모식이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역사정의실현과 조국통일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고인의 뜻을 기리며 짧은 글로 다 설명할 수 없지만, 오늘에 가슴깊이 되새기고 싶은 선생의 삶을 소개한 글을 아래에 싣습니다.

 

▲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 5주기 추모식 현장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이 2008년 3월 <민족21>에 기고한 글입니다.

 

 

“죽으면 선배선열들에게 보고할 것이다. 죽는 날까지 독립투쟁을 하다 왔노라고”

 

 

   당산(堂山) 조문기(趙文紀, 1926∼2008)!

일제강점기에는 항일투쟁으로, 해방 후에는 친일파 청산과 통일운동으로 일관한 불굴의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이 2008년 2월 5일 기어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선생은 떠났지만 82년 생애, 그 풍운의 세월은 고스란히 남았다.

 

 

“나는 너무 오래 살아 욕되다. 구차하게 오래 살고 싶지도 않다.”

늘 이렇게 되뇌던 그였다. 그러나 또 민족문제연구소가 추진하고 있는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고대하면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요즘은 더 살고 싶어진다. 친일인명사전이 나오는 것이라도 보고 죽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불과 6개월 남기고 끝내 그는 가버리고 말았다.

 

   외할아버지를 통해 항일의식을 깨치다

 

선생은 1926년 경기도 화성에서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선생의 선친은 아내와 자식들을 남겨두고 늘 외지를 돌아다녔다. 술이나 도박도 할 줄 모르고 당시 유행하던 미두나 광산에도 손을 대지 않던 아버지였다. 그러나 그가 집에 들렀다 가면 땅문서는 하나씩 없어졌고 살림도 찌들어갔다. 어린 선생은 아버지가 무엇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부엌 장독 안에 감춰져 있던 ‘비(秘)’라고 붉게 도장이 찍힌 ‘조선독립소요의 진상’을 우연히 발견하고 가슴이 뛰었을 뿐이다. 남부럽지 않던 살림도 거덜이 나고 집마저 내놓아야 했던 어머니는 어린 선생을 친정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수원 외갓집에서 선생은 외할아버지를 통해 자신의 조국이 일본에게 강탈당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다. 그리고 나라 없는 백성의 치욕과 서러움을 뼈저리게 겪게 된다. 1937년 중일전쟁이 한창일 무렵 보통학교 4학년이었던 선생은 전쟁터로 떠나가는 군인들을 위해 역으로 나가 양손에 일장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러야 했다. 어린 선생은 일장기를 들고 외갓집에 돌아오다 할아버지에게 크게 야단을 맞았다. 이날 밤 대한제국의 관료를 지낸 할아버지 이조영은 선생에게 비로소 망국의 비밀을 얘기했다. 그제야 손자는 자신이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더불어 일제에 대한 크나큰 분노를 느꼈다.

 

얼마 후 선생은 친구들과 향교 정문의 태극문양을 보러 간다. 일장기가 아닌 조선의 국기, 태극기를 알려주기 위해 향교 정문에 그려져 있는 태극문양을 보러 간 것이다. 이 일이 학교에 알려져 선생은 주재소로 끌려갔고 할아버지가 각서를 쓰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나라 잃은 설움과 분노와 치욕으로 그 자리에서 죽고만 싶었”던 어린 시절, 그는 새벽길을 밟아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날의 치욕을 천 배 만 배로 갚아 주리라”고 맹서한다.

 

   선비의 도의와 무인의 의기가 결합된 의열투쟁

 

1942년 15세였던 선생은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군수공장인 일본강관주식회사에서 훈련공으로 일하던 선생은 평생의 동지 유만수 선생을 만나 친형처럼 따른다. 징용령이 실시되고 일본강관주식회사에 그대로 일하게 된 선생은 1944년 5월 유만수 선생과 모의하여 2000여 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을 이끌고 일제의 민족차별에 항의하며 대규모 파업을 일으켰다. 경찰과 헌병이 포위한 가운데 벌어진 대규모 파업 후 선생과 유만수 선생은 현장을 탈출해 잠행을 거듭한다.

 

도쿄에서 비밀활동을 하던 서상한 아래서 비밀리에 책이나 문서를 나르는 일을 거들다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선생은 단식훈련원에서 수양을 통해 혁명가로서 강인한 의지와 담력을 키웠다. 그리고 다시 암흑의 조선에 돌아왔다. 보다 더 큰 투쟁을 국내에서 전개하고 이를 기초로 중국으로 망명할 결심이었다.

 

1945년 7월 24일 일제의 말기적 광란이 극에 달한 때, 박춘금을 비롯한 친일세력은 ‘대의당(大義黨)’을 결성, 동아시아 각 국의 친일파들을 불러들여 지금의 서울시의회 별관인 부민관에서 ‘아시아민족분격대회’를 열었다. 일제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을 찬양하고, 나아가 수천 명의 조선인 민족지도자를 살해할 계획 등을 추진하기 위해 열린 동아시아 친일사냥개들의 피의 제전이었다.

 

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선생은 애국청년당을 조직하고 이 대회를 무산시키고 악질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해 다이너마이트 폭약을 구해 시한폭탄을 만들었다. 대회 당일 선생과 유만수 선생은 엄중한 일본 헌병의 감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식장 안에 시한폭탄을 설치, 폭파해 대회를 무산시켰다. 일체의 항일운동이 지하로 들어가고 명망 있는 민족지도자 상당수가 친일로 돌아선 시기, 한 달 후면 보고야 말 해방조차 예견하지 못하는 절망의 ‘경성’에서 제국 일본의 무한 번영을 노래하는 혼 없는 사냥개들의 사육제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부민관 폭파의거이다. 부민관 폭파의거는 일제 말기 국내에서 일어난 최후의 의열(義烈)투쟁으로 기록되거니와, 친일파의 격분 대회를 조선 민족의 격분의 현장으로 바꾸어 놓은 쾌거였다.

 

여기서 우리는 부민관 폭파의거 당시 선생과 유만수 선생의 행동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민족에 대한 깊은 애정과 인명 존중의 생각이 ‘테러’ 배후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당시 선생과 유만수 선생은 청중석에 폭탄을 설치하려다, 식장에 가득 찬 조선인들을 보고 차마 청중석에 폭탄을 설치하지 못했다. 일본제국주의자를 죽여야지 조선인을 죽여서야 독립운동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억압받는 자의 해방, 누구나 한번 뿐인 삶의 가치를 민족의 차원에서 지키고자, 이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헌병이 지키고 선 무대 앞까지 가 폭탄을 설치했다. 그러므로 이들의 투쟁은 통상의 테러리즘이 아니라, 선비의 도의와 무인의 의기가 결합된 의열투쟁이라 부를 수 있다.

 

해방은 도적같이 찾아 왔다. 미소 군정이 실시되면서 한반도는 분단되었고, 좌우투쟁은 격화되었다. 미군정과 이승만, 그리고 한민당 세력은 친일파를 다시 권력으로 끌어들이고 민족운동을 탄압하며 단독정부의 길로 나아갔다. 선생과 그 동지들이 꿈꾸던 해방과는 너무나 달랐다. 선생은 분연히 새로운 투쟁을 준비했다. 남북협상을 지지하고 분단을 반대하는 통일운동의 길로 나선 것이다.

 

분단정부 수립 전야인 1948년 6월 2일 밤, 선생은 ‘인민청년군’ 동지들과 서울 삼각산 6개 봉우리에 봉화를 올렸다. 이어 시내 여러 곳에서 ‘통일정부 수립하자’ ‘단일정부 수립반대’ ‘미군은 물러가라’ 라는 구호가 적힌 현수막을 일제히 내걸기 위해 하산했다. 하지만 조직원의 배신으로 체포되었고, “죽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모진 고문을 당했다. 고문의 주인공들은 일제강점기 악명 높았던 친일경찰 출신이었다. 해방된 조국에서 여전히 독립운동가는 ‘쫓기는 자’였고 친일파는 ‘쫓는 자’였다. 이것이 그가 맞이한 ‘해방’의 서곡이었다.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6·25전쟁이 나기 직전 선생은 석방되었다. 이후엔 선배 독립투사와 마찬가지로, 해방 후에도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일제 때보다 더 숨 막히는 공포와 위기 속에서, 신분을 숨기고 ‘남일성’이라는 예명으로 10년간 유랑극단 배우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나 이승만정권은 이마저 허용하지 않았다. ‘이승만대통령 암살, 정부전복음모 조작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선생은 또다시 끔직한 고문을 당했다.

 

끝내 무혐의로 석방되었지만 고문의 후유증은 평생 가시지 않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민족의 병이 깊어지듯 후유증도 악화되었다. 팔순잔치 때,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은 선생에게 지팡이를 선물로 드렸다. 임종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한 지팡이 속에 숨은 선생님의 간난고초를 어찌 다 헤아리겠는가.

 

   친일파 청산과 민족통일은 제2의 독립운동

 

선생은 말년에 쓴 자서전 《슬픈 조국의 노래》의 글머리에서 ‘나의 삶의 대부분은 민족의 역사와 끈이 닿아 있다’고 술회했다. 그렇다. 그가 부산에서 유만수 선생의 중매로 장염심 여사와 결혼한 것도 결코 개인사가 아니었다. 여사 또한 단정반대 투쟁을 하면서 당당히 역사의 길을 걷다 고초를 겪은, 마땅히 역사의 한 장에 기록되어야 할 알려지지 않은 투사였다. 두 사람의 결합은 분단을 극복하고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지향하는 민족애의 결합이었다.

 

그러기에 분단시대 그의 가족사 또한 절대 빈곤과 경찰의 감시 그리고 냉대로 점철된 시련의 연속이었다. 외동딸마저 자신들의 손으로 거둘 수 없어 여기 저기 친척 집에 맡겨야 했다. 제집 아닌 곳에서 자는 딸을 말없이 지켜보다 ‘자신 모습만큼이나 초라한 판자촌 무허가 하숙방’으로 달려가 “온 몸의 피를 말리고 점점이 살을 도려내며” 통곡과 몸부림으로 지새운 1970년 4월 18일 밤을 선생은 평생 잊지 못했다. 독립운동가에게 가난과 박해가 대물림되고 친일세력에게는 부와 영광이 이어지는 어처구니없는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선생의 그날 밤은 대한민국의 암울한 밤이기도 했다.

 

부민관 의거 동지들 또한 마찬가지 고통을 겪었다. 유만수 선생은 중랑천 다리 밑 판잣집에서 심각한 폐병을 앓았고, 강윤국 선생 또한 이십 년 이상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부민관 의거의 세 주인공 모두 떼거지가 되고 자식들은 고아가 될 운명, 그것이 독립운동의 결과였다. 누군가 이 사정을 알고 독립유공자 신청을 하라고 권유하자 왜놈 아래서 일본군 장교를 한 사람이 주는 포상은 받을 수 없다며 단호히 거부했다. 동지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선생은 두 동지의 생명과 그 가족의 최소한의 삶을 확보하기 위해 두 동지를 설득해 1977년 독립유공자로 등록했다. 그러나 자신은 끝내 포상을 신청하지 않았다. 그러다 1982년 타의에 의해 선생의 공적서가 신고되어, 그 해 8·15경축식장에서 부득이 포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를 두고 선생은 “민족과 선열 앞에 죄인이 되고 만 것”이라고 부끄러워 했다.

 

선생은 이 땅에서 독립운동가로 행세하는 이들은 세 가지 죄가 있다고 늘 말해 왔다. 남북이 분단되어 총부리를 겨누는 휴전상태인데, 끝까지 통일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우지 못했으니 그것이 첫 번째 죄요, 해방이 되었는데도 되려 친일세력이 권력을 잡았으니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 죄이며, 그런데도 독립운동가로 대접을 받고 있으니 이것이 세 번째 죄라고 통탄했다. 이래서야 죽어서 어찌 선배 선열들에게 얼굴을 들겠느냐고 한탄했다.

 

이후 선생은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제2의 독립운동’으로 정하고 실천했다. 1980년대에는 광복회 관련 활동을 했으나 광복회의 실상을 알고는 실망하여 1990년 후반 이후 그는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으로서 친일파 청산과 과거사 청산운동에 마지막 혼을 불태웠다.

 

그는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을 맡기 전부터 친일인명사전 편찬과 일제잔재 청산에 나선 민족문제연구소 식구들을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칠십 넘은 노구를 이끌고 수원에서 청량리까지 왔다. 그리고 상근자들에게 점심을 사주었다. 선생이 치른 점심값은 독립유공자 연금으로 받는 돈이었다. 그 돈을 차마 자신을 위해 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민족문제연구소의 활동은 제2의 독립운동이고 상근자들은 제2의 독립군이자 동지라며 자랑스러워했다. 그 즐거움을 위해 선생은 보통 두 시간이면 오는 거리를 지하철을 몇 번이나 내려 쉬며 십 년 이상 오갔던 것이다.

 

   “나의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선생은 “나는 3·1절과 광복절이 되면 도망 다니는 사람”이라고 말하곤 했다. 정부가 기념식 참석을 간곡하게 요청해도 그는 끝내 거부했다. 아직도 친일파가 판치는 세상에서 3·1절과 광복절은 기념일이 아니며, 자신에겐 독립투쟁의 하루 일뿐이라고 역설했다.

 

그러기에 선생은 3·1절이나 광복절이 오면 집회가 벌어지는 거리로 나섰다.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집회에 참가해서는 “우리가 제대로 투쟁해서 독립을 앞당겼더라면 이런 비극과 고통은 생기지 않았을 텐데…”라며 그들의 손을 꼭 잡았다.

 

선생은 죽을 때까지 역사교과서 속의 화석화된 애국지사가 아니라, 항상 현실 속에 발 딛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처절하게 고뇌하고 열정을 다해 실천하는 활동가로 일관했다. 항일과 반독재, 친일청산으로 이어지는 그의 투쟁은, 일신의 안녕은 물론 가족의 안위까지 위태롭게 했지만, 평생을 변함없이 진정한 자주독립국가와 조국통일을 위해 헌신한 이 시대 독립운동가의 표상이자 참 어른의 전범이었다. 그의 생전의 지론과 행동이 이를 당당하게 입증하고 있다.

 

“나에게 친일인명사전은 제2의 독립운동이며 민족사의 당면과제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머물지 않을 것이다. 친일인명사전은 일제 잔재 청산만이 아니라, 조국통일을 위한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곧 미래를, 후손을 위한 운동이다. 그러기에 나는 죽을 때까지 독립운동을 멈출 수 없다. 그러다 죽으면, 나는 선배선열들에게 보고할 것이다. 죽는 날까지 독립투쟁을 하다 왔노라고.”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2월 10일 고인에게 <국민훈장모란장>을 추서했다.

 

 

 


      다둥이카드소지자 민족문제연구소 편찬실
- 세상도, 사람도 늘 변화 · 발전함을 믿는다.
친일인명사전의 기적,역사관 건립으로 이어가겠습니다.
TEL 02-969-0226 / E-mail
historyac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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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2.24 14:02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박정희 혈서기사가 조작이라구요? - 종북놀음과 박정희 혈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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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조세열 사무총장

 

찌라시 수준의 인쇄공해물, 종북백과사전 


지난 19일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극우논객 조갑제 씨가 펴낸 종북백과사전을 거론하며 야권의 주요 지도자들을 싸잡아 종북 정치인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이틀 뒤에는 민주통합당의 박지원 원내대표가 친일인명사전을 인용하면서 “친일?종북의 원조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고 정면으로 반박해 종북논란이 바야흐로 2라운드로 접어들고 있다. 종북백과사전 대 친일인명사전이란 몹시 마땅찮은 구도를 앞에 두고, 우선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참여했던 한사람으로서 이러다 두 책이 혹시 같은 부류로 취급받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앞섰다.




▲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 지난 19일,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극우논객 조갑제 씨가 펴낸 종북백과사전을 거론하며 야권의 주요 지도자들을 싸잡아 종북 정치인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 오마이뉴스



2009년 11월 8일 친일인명사전이 전국민적 관심 속에 발간되자, 같은 달 26일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라는 정체불명의 급조 극우단체가 친북반국가인명사전을 만들겠다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은 김대중 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이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소동을 피우는 강경극우세력들에 의해 난장판이 되고 말았지만, 그 기민한 대응과 패러디의 기발함에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날 발표한 명단에 우리 사회의 존경받는 어른들이 다수 포함되었는데, 그 때 거기에 빠진 어떤 분들은 “내가 이렇게도 한 일이 없었는가”하고 자탄해마지 않았다는 우스개 아닌 우스개도 더러 들려왔다. 명단이 발표된 뒤 전혀 소식이 없어 한갓 해프닝으로 여기고 있었더니만, 살짝 이름을 바꾼 종북백과사전이란 살벌한 느낌의 책이 나온 것을 이번에 이한구 대표의 친절한 소개가 있고서야 알게 되었다.


짐작은 했지만 책을 직접 보니 한마디로 찌라시 수준의 인쇄공해물에 불과해 2만원이란 책값도 아깝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다소 내용이 궁금하더라도 절대 사볼 필요가 없는 허접 쓰레기라는 점을 거듭 밝혀둔다. 이 책의 참고자료들은 대부분 재심에서 무죄취지로 결론이 난 사건에 대한 안기부 국정원 검찰의 공안기록이거나 자신들이 발간한 책 아니면 인터넷 기사들이다. 이 따위 책에다 함부로 백과사전이란 명칭을 붙이다니 언어를 농단해도 분수가 있어야 한다. 한 때 치밀한 채증과 예리한 분석으로 정평이 있던 조갑제 씨가 판단력마저 종북 색출에 저당잡힌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종북이라면 어감상 친북보다 죄상이 한결 무거워 보이는데, 조 씨는 종북백과사전에 전직 국무총리 둘과 대선주자들을 포함 야당 국회의원 33명을 무더기로 집어넣는 쿠데타적 사변을 일으켰다. 1952년 이승만 정권 때 국회의원 40여 명이 통근버스에 탄 채 크레인으로 헌병대에 끌려간 부산정치파동 이후 국회의원들이 단체로 이런 봉변을 당한 일은 군사정권 때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내용이 진실이라면 나라의 명운이 가히 적화통일 직전의 백척간두에 서있다고 할 만하다. 검찰은 직무유기라는 비난을 듣기 전에 미적거리지 말고 조 씨를 소환하여 사실관계를 알아봐야 한다. 조사결과 관련자들이 혹 국가보안법에 저촉되었다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정하게 처벌해야 하며, 반대의 경우에는 유언비어유포죄나 어떠한 형태로든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아 그런데 박정희 정권이 긴급조치 때 만든 유언비어유포죄는 없어졌나 보네요. 뭐 다른 죄목 없나요.)


어느 나라에서나 극우인물들의 언행이 선동적이고 과격하다 하지만 상궤를 벗어나는 것도 정도가 있을 것이다. 특히 집권여당의 원내대표가 쪽박부터 깨는 이런 식의 행태를 보인다면 도대체 의회정치의 기본인 대화와 타협이 무슨 수로 가능하겠는가.



종북 공격이 잇따르고 있는 까닭



▲ 유신 40년 "식민의 유산, 유신의 그늘" 유신 40년이 되는 이 해, 유신의 망령이 우리의 머리 위를 배회하고 있다.민족문제연구소는 박정희체제와 박정희주의의 완전한 극복을 위해 '박정희 유신"의 모든 것을 담은 전시회를 진행 중이다. ⓒ 민족문제연구소



이렇게 상식을 벗어난 종북 공격이 잇따르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바로 ‘본원’이 박근혜 의원이기 때문이다. 말 수 적은 그가 단호하게 ‘자유’와 ‘국가관’ 검증을 언급했을 때 화살은 시위를 떠난 것이라 봐야한다. 이미 사당화한 새누리당 내외의 ‘종박세력’은 그 뜻을 충실히 받드는 외에 달리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많은 국민들이 유신시대를 떠올리면서 공포스런 데쟈부를 경험하고 있다.


유신 40년이 되는 이 해, 냉전시대로 끝없이 후진하는 대한민국의 정치현실을 지켜보면서 박정희체제와 박정희주의의 완전한 극복 없이는 민주주의란 헛말임을 실감하게 된다. 21세기 대명천지에 시대착오적인 매카시즘 논란이 어찌된 노릇인가. 종북 놀음의 재미가 쏠쏠하겠지만 반드시 대선에 유리할지도 의문이며, 후과에 대한 책임도 결코 적지는 않을 것임을 단언한다.


유신의 망령이 우리의 머리 위를 배회하고 있는 이 시점에, 친일인명사전은 편찬자들의 의도와 전혀 무관하게 역사전쟁이 아닌 이념전쟁의 전면에 놓이게 되었다. ‘박정희 친일?종북 원조론’은 사실 박정희 전대통령 추종세력에겐 역린을 건드린 것과 진배없는 불경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박정희주의자들은 특이하게도 종북 부분보다 친일에 더 격분하고 과민반응을 보여 왔다. 남로당원 경력은 동료들을 밀고한 것으로 대속하였다고 생각하는지 또는 가혹한 사상탄압으로 상쇄되었다고 보는 것인지는 그 속을 알 수 없다.


어쨌든 친일문제는 다퉈볼 여지가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래서 불똥은 이제 친일인명사전으로 옮겨붙었다. 각종 매체와 SNS를 통해 유포되고 있던 근거 없는 반론들이 자가발전을 통해 재구성되고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한결같은 목표는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는 데 있다.


먼저 그들이 보아도 치명적인 친일의 증거이면서 치욕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지원혈서는 무조건 조작이라고 떼를 쓴다. 다음으로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주체가 빨갱이라고 몰아붙인다. 그리고 모든 과정이 정치적 의도 아래 이루어졌다고 덮어씌운다. 모두 합리적인 반론이라기보다 막무가내식 들이대기에 가까운 주장이긴 하지만, 여론을 호도할 우려가 있어 부득이 한 마디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 중에서도 혈서조작설은 친일인명사전의 권위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고 있다. 특히 인터넷에는 조작설로 도배가 되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그레샴의 법칙이 그대로 작동되고 있다. 진실은 덮이고 억지 주장만 난무하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자료실 고양이 │ 민족문제연구소 자료실
못난 조상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친일인명사전의 기적,역사관 건립으로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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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edeyekiller 2013.03.29 12:47 address edit & del reply

    역사를 조작 폄훼하는 좌익조직 민좃문제연구소...

    바른 역사가 너들과 그 후대의 수급을 베리라..!!

    맑고 백지 처럼 맑고 깨끗한 어리고 젊은 영혼들을 붉은 공산주의 사상으로 물들게 하여

    인성과 사상과 인간 그 자체를 파괴시켜 악의 구렁텅이에 처 박는 인간말종 친종북놈들의

    사악한 역사조작, 반역적 행위에 그 당사자는 물론 그 후대까지 모조리 천벌을 내려주기를

    간구하며 이 글을 복사하여 올린다.

    이 사이트를 찾아온 사람들과, 조작된 역사 "100년전쟁"을 본 사람들은 이 종북 놈들이 처

    놓은 악의 그물에서 빠저 나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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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 두 번째 재판의 치명적인 약점


    5.18에 대한 젊은 층들의 관심이 뜨겁다. 젊은층이 게시한 최근의 쓸 만한 글들을 보면 5.18에 대한 진실 그대로다. 그런데 최근 언론 기자들마저 진실과 허위를 거꾸로 알면서 젊은 층들을 나무란다. 그래서 필자는 1995.5.17. 검찰의 최종보고서 즉 5.18사건을 두 번째로 재판한 데 대한 근거자료를 수록한 검찰보고서를 스캐닝 하여 곧 공개하고자 한다. 이것을 공개해야 진실을 제대로 알고 있는 분들이 자신감을 갖게 될 것이다.


    5.18사건을 처음 재판 한 시기는 1980년이다. 일단 같은 사건을 두 번째 재판하려면 재심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런데 1995년 말부터 1997.4.17.에 이르기까지 번갯불에 콩궈먹는 식으로 진행된 두 번째 5.18재판은 재심 재판이 아니라 급조된 사생아 ‘5.18특별법’에 의해 진행됐다.



    김영삼이 자기 살기 위해 역사 뒤집었다

    1995년 10월 19일 박계동이 노태우 비자금을 폭로해 온 사회가 뒤집혔다. 10월 28일경, 김대중이 북경에 가 있으면서 “나는 노태우로부터 20억 받았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사회가 또 한 번 뒤집혔다. 그리고 국민의 시선이 김영삼에 쏠렸다. “김대중이 20억을 받았으면 노태우 밥상머리에서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도대체 얼마를 받았느냐, 이실직고 해라” 씨-프린스호 사고, 삼풍백화점사고, 성수대교사고, 구포열차사고, 목포여객기추락사고 등이 이어져 귀신 붙은 사나이, 재수 없는 사나이로 멸시받던 김영삼이 궁지에 몰렸다.


    김영삼은 탈출구를 찾기 위해 국민의 시선을 노태우와 전두환에 돌렸다. “저 놈들 잡아 넣어라, 저 놈들 쿠데타 하고, 광주에서 학살한 놈들이다.” 이후 검찰, 재판부, 헌법재판소가 김영삼에 아부하여 법리를 왜곡했다. 5.18사건에 대한 두 번째 재판은 이런 더러운 약점이 있는 것이다.



    검찰보고서는 1980년이나 1995년이나 변한 게 없다. 단지 변한 것은 판사들의 법 해석이다. 1980년의 판사들은 시실과 법리를 제대로 해석했다. 그런데 1996-7년 의 민주화판사들은 사실과 법리를 인민군 입장에서 했다. 15개의 코미디 판결 중, 네 개만 뽑아 본다.



    1997년의 5.18재판 판결문은 인민군 판사들이 썼다


    1. 광주시위대는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결집된 준-헌법기관이다. 이런 준헌법기관을 신군부가 군을 도구로 이용하여 무력으로 진압한 행위는 내란이다.



    2. 광주시위는 민주화운동으로 이는 전국적으로 확산됐어야 했는데 신군부가 이를 조기 진압한 것은 분명한 내란이다. 내란 과정에서 살인행위가 저질러졌기 때문이 신군부는 내란목적 살인범들이다.



    3. 최규하는 바지다. 바지가 서명한 것은 모두 전두환 책임이다.


    4. 계엄령을 선포하느냐 마느냐는 전적으로 정치-군사적 판단에 속하며, 사법부의 재판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전두환 마음에는 이미 내란하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계엄령 확대선포 그 자체가 내란이다.







    북한책 베껴 쓴 ‘황석영 책’을 5.18바이블로 믿고 있는 한심한 국민들


    5.18에는 또 다른 약점이 있다. 당시 대학생들은 황석영이 풀빛출판사를 통해 1985년에 내놓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책을 5.18 바이블로 굳게 믿었다. 그런데 그 바이블은 북괴가 1982년에 내놓은 “주체에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과 1985년에 출간한 ‘광주의 분노’를 베낀 책이다. 지금의 40-50대들은 물론 그를 기초로 하여 기사들을 쓴 언론들에 의해 이 나라 국민은 북괴가 날조하여 유포시킨 모략의 역사를 정사로 알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 아닌가?



    반역자 황석영이 북에 가서 대남모략 영화 시나리오 썼다

    그런데 5.18의 우상 황석영이 윤이상과 함께 1989년부터 김일성에 불려가 김일성이 직접 제작한 대남모략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의 시나리오를 썼고, 윤이상은 배경음으로 ’님을 위한 행진곡‘을 깔은 역적들이다. 이 사실은 2011년 필자가 탈북자들의 책을 읽고 처음으로 통일부 자료로부터 발굴해 냈다.



    5.18은 북한이 만든 대남공작의 꽃

    5.18의 또 다른 치명적인 약점은 5.18을 북한에서 매년 전지역에서 여러 날 동안 기념하고 죽은 자들을 추모한다는 사실이다. 북한에서의 최고인 것에는 명예의 상징으로 5.18을 앞에 붙이도록 ‘5.18을 명예로 하사’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북한 책에도 있고, 우리 통일부가 발간하는 주간정세보고서에도 있다.



    5.18에 대한 두 개의 판결 중에서, 역사를 제대로 반영한 판결은 1980년 판결이고, 빨갱이입장에서 역사를 뒤집은 반역적 판결이 1997년 4.17에 종결된 판결이다.


    2013.3.28. 지만원
    http://www.systemclub.co.kr/

    • 일베충킬러 2014.06.12 08:57 address edit & del

      일베충이나 변희재같은 것들 볼때마다 김일성 개새끼와 북괴빨갱이새끼들이 너무나도 원망스럽다..

      김일성 개새끼와 북괴빨갱이새끼들이 6.25 일으키지만 않았어도 지금과 같은 종북프레임이 먹히지 않았을 것이며,

      구데기만도 못한 일베충이나 변희재같은 것들도 애초에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니까...일베충 병신새끼들...

  2. 오유인 2013.05.13 03:28 address edit & del reply

    이 글 시리즈 오유로 퍼갑니다.

    하아~~~근현대사라도 많은 분들이 재대로 알았으면 하네요 ㅠㅠ

박정희 혈서기사가 조작이라구요? - 종북놀음과 박정희 혈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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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조세열 사무총장


박정희 혈서기사 발굴의 일등공로자, 조갑제




▲ 일본국회도서관 소장 만주신문 마이크로 필름 ⓒ 민족문제연구소


▲ 일본국회도서관의 마이크로필름 판독기에 나온 만주신문의 혈서지원 기사 ⓒ 민족문제연구소


그들이 그렇게도 조작이라고 믿고 싶은 박정희 혈서가 실린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 원본은 현재 일본 국회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일반인은 마이크로필름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출력도 가능하다(『滿洲新聞』 康德 六年(昭和 十四年) 三月 三十一日, 日本 國會圖書館 所藏 마이크로필름). 이조차 일본이 박정희를 음해하기 위해 조작된 자료를 보관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정신분석학적 처방 외에 달리 방도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박정희 혈서 발굴의 일등 공로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조갑제 씨다. 그는 자신의 저작인 『박정희』(1992, 까치)에서 박정희가 군관학교에 지원하기 위해 혈서를 쓴 사실을 처음 언급하여 발굴추적의 물꼬를 텄다. 그러나 박정희 연구자들의 끈질긴 조사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증거자료는 찾을 수가 없었다. 민족문제연구소도 친일인명사전 집필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2009년 10월에 가서야 가까스로 관련 자료를 입수할 수 있었다. 증언만 있었을 뿐 확실한 증거가 발굴되지 않아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지 못할 뻔했던 엄청난 내용들이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 우리들은 예나 지금이나 “마지막 순간에 순국선열들의 보살핌이 있었음이 틀림없다”고 여기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당초 발굴한 혈서기사에 관한 보도자료를 따로 내지 않기로 의견을 모았었다. 혈서 자체도 충격이거니와 ‘조국(일본)을 위해 일사봉공(一死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하겠다’는 등 편지 내용이 워낙 엽기적이라 톱뉴스가 되고도 넘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정치쟁점화를 피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연구소가 방침을 바꿔 자료 공개를 결정하게 된 데는 박 전대통령의 아들 박지만 씨의 도발이 크게 작용했다. 그는 2009년 10월 28일 일차적으로 게재금지가처분신청을 낸 뒤, 11월 8일로 예정되어 있던 발간보고회 직전인 11월 4일 기습적으로 법원에 배포금지를 추가 신청했다. 사실상 친일인명사전을 금서로 만들려는 악의적인 시도였다. 거기에다 박정희 지지자들의 위협도 날이 갈수록 심해져 갔다. 연구소는 결정적인 증거자료 공개만이 유일한 대응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11월 5일 즉각 보도자료를 배포하게 된 것이다.



박정희가 일본군으로 복무한 적이 없다고요?


이밖에 박정희가 만주군 장교이지 일본군으로 복무한 적이 없다는 주장도 친일인명사전이 허위사실에 기초하고 있다는 모함 중 하나이다. 이에 대해서도 연구소는 확고한 반증을 가지고 있음을 밝혀둔다.(『舊時陸軍軍人(軍屬)屆』, 昭和 二十年 三月 一日.)



▲ 박정희가 일본군 예비역 소위임을 입증하는 공문서 ⓒ 민족문제연구소



만주국은 일제의 괴뢰국이며 만주군은 일본 관동군의 통제를 받았고 일본군 현역 장교가 직접 지휘하는 경우도 많았다. 뿐만 아니라 박정희는 일본 육사를 졸업한 엄연한 일본군 예비역 소위이며, 관동군에서 복무한 시기도 있었다.


또 박정희가 대적한 팔로군은 중공군이므로 공비토벌이지 항일세력 탄압이 아니라는 유치한 발상도 연구소를 공격하는 단골 메뉴로 등장하고 있다. 팔로군도 항일부대이며 중국 소련에 대한 적대행위는 당시로서는 연합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상식 수준의 이해도 하지 못하는 억설이라 치부하겠다. 특히 다수의 조선 청년들이 항일을 위해 팔로군에 복무하고 있었던 사정을 감안하면 이런 궤변은 더더욱 삼가야 마땅하다.


중위를 단순하게 하급장교 정도로 간주하는 ‘대범함’도 당시의 사정에 비추어 볼 때 지나치게 관대한 시각이다. 당시의 위관급 장교는 지금과 달리 군이 절대적 우위에 있던 파시즘 국가의 고등관으로서 군수나 경찰서장도 쩔쩔맬 정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출세욕에 불탄 박정희가 연령 제한에 걸리고도 혈서까지 써가며 거듭 군관을 지원했던 이유의 하나이다. 참고로 일제 35년간을 통틀어 자발적으로 일본제국의 장교된 자는 일본육사와 만주군관학교 출신을 포함 170여명에 지나지 않는다. 식민지 출신으로서는 드물게 간택받은 존재들이었던 셈이다.


무엇보다도 대일선전포고를 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 박정희는 바로 적국의 장교다. 비록 착수 전에 해방이 되긴 했지만 만약 광복군의 국내진공작전이 개시되었다면, 박정희는 그토록 꺼려했던 장준하처럼 사선을 넘어 광복군에 입대한 상당수의 일본군 출신 애국자들과 전장에서 만나는 운명이 되었을지도 알 수 없다.


박정희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대우와 존경을 받고 안정적인 직업이었던 교직을 버리고 군관의 길을 선택하였다. 강요에 의한 입대도 아니었으며 생계나 생존이 위협받는 불가피한 상황도 아니었다. 목적이 출세였든 영웅심의 발로였든 간에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부일협력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사실과 정황이 이를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이다.


논쟁에도 규칙이 있고 예의가 있다. 


▲ 친일인명사전 친일인명사전은 각 분야 교수 학자 180여명이 참여하여 3,000여종에 이르는 방대한 증거자료에 의거 객관적으로 집필한, 한국근현대 최대최고의 인물사전으로 평가받고 있는 역사적 학문적 성과물이다 ⓒ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의 구성원과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한 이들을 빨갱이로 모는 야비한 공격은 일찍부터 있어왔다. 자신들의 견해와 다르면 4대강 반대도 파업도 무상급식도 모두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고삐 풀린 극우세력의 방약무인함을 보면서 동시에 냉전의 끝자락을 붙잡고 유지해 온 그들의 기득권도 이제 소멸의 때가 왔음을 예감하게 된다. 도대체 합리성이라곤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집단들이기 때문이다.


친일인명사전은 각 분야 교수 학자 180여명이 참여하여 3,000여종에 이르는 방대한 증거자료에 의거 객관적으로 집필한, 한국근현대 최대최고의 인물사전으로 평가받고 있는 역사적 학문적 성과물이다. 지난 4월 13일 만주국 사무관을 지낸 박정희의 동서 홍순일의 후손이 제기한 서적복제배포금지소송이 대법원에서 기각됨으로써 3년간에 걸친 기나긴 소송도 끝이 났다. 사법부는 박정희를 포함한 5건의 관련 소송에서 모두 연구소 승소로 판결했다. 일관되게 친일인명사전의 공공성 객관성 엄밀성을 인정한 것이다.


친일인명사전은 민족 내부의 자성이 담긴 과거사에 대한 최소한의 학문적 정화과정의 결과물이다. 왜 친일인명사전을 정치의 이름으로 오염시키려 하는가.


민족문제연구소는 1991년 발족 때부터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목적사업으로 추진해 왔다. 당시 박근혜 의원은 정계에 입문하기도 전이었다.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20여 년간 시쳇말로 영양가 없는 작업을 해왔다는 언설이 가당하기나 한가. 도대체 무슨 정치적 목적이 있단 말인가. 이는 친일인명사전 편찬과정에서 나타난 압도적인 국민적 지지와 관계자들의 헌신을 모독하는 횡포일 뿐이다.


이미 객관적인 증거도 제시되었고 최종 판결까지 내려졌다. 논쟁에도 나름의 규칙이 있고 예의가 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내세울 것이 있으면 내세우자. 역사 앞에 성역은 없고 인물에 대한 비판에 금기가 있을 수 없다. 언제까지 박정희신화에 얽매여 그를 맹목적인 숭배의 대상으로 삼을 셈인가. 박정희를 극복하고 나아가지 못하는 한 한국사회에 미래는 없다. 장담하거니와 보수세력 그대들도 여기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주신문 기사 번역문


▲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 7면 전문 ⓒ 민족문제연구소

만주신문 기사 번역문


혈서(血書) 군관지원 - 반도의 젊은 훈도(訓導)로부터


29일 치안부(治安部)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訓導)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고 피로 쓴 반지(半紙)가 봉입(封入)된 등기로 송부되어 관계자(係員)를 깊이 감격시켰다. 동봉된 편지에는


(전략)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일반적인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송구하지만 무리가 있더라도 아무쪼록 국군(만주국군-편집자 주)에 채용시켜 주실 수 없겠습니까. (중략)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중략)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 : 편집자 주)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후략)


라고 펜으로 쓴 달필로 보이는 동군(同君)의 군관지원 편지는 이것으로 두 번째이지만 군관이 되기에는 군적에 있는 자로 한정되어 있고 군관학교에 들어가기에는 자격 연령 16세 이상 19세이기 때문에 23세로는 나이가 너무 많아 동군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중히 사절하게 되었다.


(『만주신문』 1939.3.31.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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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ogan uomo 2013.04.19 21:26 address edit & del reply

    사랑하라,한번도 상처받지 않은것처럼

  2. lunettes carrera 2013.04.28 08:00 address edit & del reply

    다른 남자 부르면서 울거면 나한테 이쁘지나 말던지, http://noq.botasugger.com/ ugg australia espa?a

  3. ghd baratas 2013.04.29 09:54 address edit & del reply

    하늘이 무너지고 바다가 말라가도 내 사랑은 변하지 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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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cheap toms 2013.04.30 22:04 address edit & del reply

    숨겨왔던 나의 수줍은 마음 모두 네게 줄게 예이예

  5. Louis Vuitton outlet 2013.05.14 20:14 address edit & del reply

    희미한 달빛이 샘물 위에 떠있으면, http://www.hecgloballearning.org.uk/temp/nikeairmax.php nike air max,나는 너를 생각한다.

  6. ㄹㄴㅇㅁㄹㅇ 2013.12.06 22:59 address edit & del reply

    박정희놈은 부관참시만이 답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써 얼굴을 들수가 없습니다.
    창피해서

  7. 슬픈땐 하늘을 보자 2015.03.19 23:09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역사는 한 개인이나 단체가 주장한다고 정사가 될수없습니다.

  8. 슬픈땐 하늘을 보자 2015.03.19 23:13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따라서 민문연의 주장은 일개 단체의 주장일뿐이지 정사가 아니란거죠.
    일본군사학교를 다녔다고 친일파다란 논리는 말도 안되구요.
    만주에서 독립군을 때려잡았다는것도 말도 안되죠.그당시 만주엔 광복군이 없었습니다.교사에서 직업군인으로 직업을 바꾼건 그냥 직업선택의 자유죠.

  9. 슬픈땐 하늘을 보자 2015.03.19 23:1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박정희가 친일파라면 젤 좋아할 사람들은 일본애들이죠.한국의 발전이 일본을 따르는 사람에 의해서 됬다는 논리가 성립되니

    • 종북좌파out 2016.02.27 20:01 address edit & del

      1.
      누가, 어떤 단체가 주장했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사실이 있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민문연은 자신들 주장의 근거를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는데, 당신은 그저 아무런 근거없이 정사가 아니다, 정사가 아니다, 소리만 지르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민문연이 역사를 편찬하나요? 정사가 왜 나옵니까?

      2.
      독립군 토벌 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일본 육사를 졸업, 일본군으로 복무했다는 것만으로 친일파입니다.

      3.
      예를 들어 보죠. 만일 나와 당신이 북괴 수괴 김정은에서 충성혈서를 쓰고 충성의 맹세를 한 후 평소와 다름없이 일상생활을 한다고 합시다. 빨갱이가 아니죠?
      국군을 공격한것도 아니고, 대한민국 국민을 해치거나 대한민국 정부의 재산에 손해를 끼치지 않았으니깐요. 그런데 그게 맞나요?
      북괴 수괴 김정은에게 충성혈서를 쓰고 충성의 맹세를 한 것만으로 빨갱이인것처럼, 일본 천황에서 충성하는 황군의 일원이 된 것만으로 친일파인겁니다.

      4.
      보통 이런 말을 하면 '그럼 지청천 장군도 친일파냐?'라고 하던데, 지청천 장군은 자랑스러운 대일본제국 황군으로 복무하기를 거부, 만주로 가서 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했습니다.
      그러니 친일파가 아닙니다. 박정희가 친일파가 아니라고 할 수 있으려면 지청천 장군과 같은 행보를 보였어야 합니다.

      5.
      하판락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직업선택의 자유'가 보장되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으로 태어나 일본경찰이 되어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고문했습니다. 피를 뽑아 뿌리고 팔다리를 부러뜨리고..

      6.
      개인의 노력, 개인의 자유 중요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열심히 노력해서 출세한 것 뿐인데 왜 친일이라는 낙인을 찍는가?
      그 노력의 방향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노덕술이 경찰 고위직으로 가기 위해서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습니까? 또 김구 선생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습니까? 둘다 자신의 능력을 가지고 노력을 했는데, 왜 둘 다 칭송하지 않나요? 왜 한사람은 온갖 비난을 듣는거죠? 직업선택의 자유에 따라 그저 경찰이 된 것 뿐이데 말이지요.

      7.
      직업선택의 자유를 말씀하시니 하는 말인데.. 기본권도 제한될 수 있다는 거 아시죠?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하는 건 불령선인으로 낙인이 찍히는 거였습니다.

      8.
      마찬가지 만일 지금 당신이 反대한민국적 행위를 하고 친북좌파 활동을 하면 , 그 행위와 활동이 하나의 직업과 같이 당신 개인의 생활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것이더라도 직업선택의 자유에 의해 보호받지 못합니다.
      무슨말인고 하니 직업선택의 자유는, 반민족적 행위까지도 옹호할 수 있는 전가의 보도가 아니라는 겁니다.

      9.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는 독립운동을 하려고 해도 할 수 없고, 친일행위(정확히는 반민족행위)를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연합군에 의해 조국이 광복을 맞은 후 대한민국이 건국도고 나서는, 더 이상 친일파도 없고, 독립운동가도 없습니다.

      10.
      그렇기에 비록 박정희가 친일의 과오는 있으나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까지 박정희가 친일행위를 한 적이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발전은 비록 친일의 과오는 있으나 대통령으로서 성실히 직무에 임했던 박정희에 의해 발전한 것이지..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도 일본을 따랐던 친일파 박정희에 의해 발전한게 아닙니다.

      11.
      설령 일본애들이 좋아한다고 칩시다. 그게 뭔상관입니까?
      예를 들어보죠. 현재 영국의 왕실은 독일 하노버 왕가입니다. 독일 사람들이 엄청 좋아하죠? 자랑스러운 독일 게르만족이 대영제국을 통치했다고 하면서?

      12.
      한 국가의 지도자의 혈통, 행적을 그 국가 전체와 연관짓는 것은 '지도자=국가'라는 북괴김일성왕조와 아주 유사한 국가관입니다. 우리가 빨갱이들이고, 여기가 빨갱이 국가입니까?
      친일파였던 박정희가 대한민국을 발전시켰다고 일본애들이 좋아한다? 그러라고 하세요. 그게 뭔 상관입니까? 친일파 박정희에 의해 대한민국이 발전했다고 이 대한민국이 다시 일본식민지가 되지 않습니다.

      13.
      그리고 당신의 논리대로라면 꼭 박정희가 아니더라도 대한민국 발전에 공이 있는 모든 친일파들은 친일파가 아니어야 합니다. 일본애들이 좋아할테니깐. 그죠? 간도특설대 출신의 친일파 백선엽 장군의 눈부신 활약(한국전쟁에서의)을 보며 舊일본황군 출신들이 얼마나 '반자이'를 외쳤겠습니까? 역시 우리 황군이다라면서..

      14.
      김일성은 독립운동을 했습니다(김일성 가짜설은 다 논파된 거짓입니다). 그리고 그 독립운동가가 북괴를 만들고 그 체제하에서 2천만 동포는 지금도 고통받고 있습니다. 누가 제일 좋아하나요? 일본애들이 제일 좋아하겠죠? 역시 쓰레기 불령선인이라고, 이래서 독립운동가 새끼들은 글러처먹었다고..

      15.
      우린 이제 김일성 때문에라도.. '역시 독립운동가 새끼들은 무능력하고 쓰레기 같은 칙쇼 조센징이다'라며, 김일성을 보며 좋아할 일본애들 때문에라도, 우리 위대한 항일영웅들의 역사 전부를 지워야 합니까?
      대한민국 건국원훈이지만 친일파들인 사람들을 보며 좋아할 일본애들 때문에 친일의 역사를 전부 지워야 하는 것처럼?

      16.
      일본의 그늘에서 벗어나세요. 왜 끊임없이 왜놈들의 시선을 의식해 국내의 역사까지 뒤집어야 합니까?

      last.
      박정희라는 한 인물에 대한 열렬한 존경심때문에 친일이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하거나 그 기준을 완화시키는 사람들.. 아주 많이 봤습니다. 박정희가 존경스럽긴 한데.. 친일파다? 이런 상황에선 보통 친일을 부정하더군요.
      어찌보면 한 개인에 대한 숭배 때문에 역사(정사ㅋㅋ)를 부정하는 것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한 개인에 대한 숭배때문에 사상과 가치관을 왜곡시키는 건 북괴 빨갱이들이 주로 하는 겁니다.

      아주 적은 양의 오염물질 때문에 더러워진 물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선, 그 오염원의 양보다 몇백배나 많은 양의 물이 필요한 법이지요. 당신의 글은 짧으나 저의 글은 너무 길군요. 그냥 읽지 마시길.. 나 혼자 떠든거니.

      이상 친일파를 극렬히 싫어하는 애국보수.

당신이 몰랐던 진짜 역사가 온다! 역사다큐 <백년전쟁> 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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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가 한국 근현대사 100년을 새로운 시각에서 증언하는 대서사 다큐멘터리 제작을 시작했습니다.

연구소는 1년여의 준비 끝에 그 첫걸음으로 오는 26일 저녁 7시30분 서울아트시네마(종로3가 낙원상가 4층)에서 시사회를 갖고 우선 이승만 1부와 스페셜 에디션 - 박정희 1부를 공개합니다.

 

이승만 1부 '이승만 X파일 : 당신이 알지 못했던 이승만의 모든 것'편(52분)은 일반 시민들이 전혀 알지 못했던 일제시기 이승만의 해외활동에 얽힌 비사를 담았습니다. 그는 과연 진정한 독립운동가였는가. 끊임없이 권력과 돈을 좇았던 ‘화려한 망명객’ 이승만의 불편한 진실을 고발합니다.

스페셜 에디션 - 박정희 1부 '프레이저 보고서 : 누가 한국경제를 성장시켰는가'편 1부(40분)는 ‘한강의 기적’으로 일컬어지는 한국의 경제성장은 과연 누구의 손으로 이루어졌는가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프레이저 보고서를 중심으로 경제개발의 이면을 조명하고, 노동자 농민의 처절한 희생 위에 군림하고 있는 박정희 신화의 허구를 파헤칩니다.

<백년전쟁>은 시리즈물로 본편 총 4부와 번외편으로 기획되어 있습니다. 본편은 이번에 공개되는 1부(이승만 X파일 : 당신이 알지 못했던 이승만의 모든 것)를 포함해, 해방정국에서 이승만 하야까지를 다룬 2부 '대한민국 탄생의 비밀'(가제), 박정희 시기를 다룬 3부 '돌아온 사무라이'(가제), 전두환부터 현재까지를 다룬 4부 '최후의 전쟁'(가제)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번외편은 '프레이저 보고서 : 누가 한국경제를 성장시켰는가' 1~2부가 기획되어 있습니다. 한국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역사인물을 선정하여 성역을 두지 않고 심층 해부할 것입니다.

연구소는 시사회를 시작으로 <백년전쟁>을 인터넷을 통해 공개해 누구나 무료로 자유롭게 시청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각 지역과 단체의 공동체 상영도 추진할 예정입니다. 이미 지난 10월 18일 LA를 시작으로 시카고(11월 3일), 워싱턴DC(11월 10일), 애틀란타(11월 17일) 등 미국에서 교포들을 대상으로 가편집본에 대한 시사회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역사가 위기에 처해있는 지금, 민족문제연구소가 다시 한 번 수구세력의 역사조작을 막기 위해 어렵지만 의미있는 도전에 나서려 합니다. ‘백년전쟁’ 대기획의 첫 결실을 내놓는 뜻 깊은 자리에 함께 하셔서 지혜와 힘을 보태주세요.

 

              민족문제연구소 근현대사 진실 찾기 프로젝트

         역사다큐 '백년전쟁' 시사회

 

    어화민족문제연구소시민역사관건립위원회
친일인명사전의 기적,역사관 건립으로 이어가겠습니다.
TEL 02-969-0226 / E-m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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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늘 2013.11.11 20:52 address edit & del reply

    거짓의 아비

    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3873&page=8

백선엽은 자신의 반민족 행위 스스로 고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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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민주통합당 김광진 의원이 백선엽을 '민족반역자'라고 발언한 데 대해 수구언론 극우단체들의 신상털기 마녀사냥이 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신명식 이사가 프레시안에 기고한 <"백선엽, 반민족 행위 스스로 고백했다"> 글을 소개합니다. 


민주통합당 김광진 의원을 두고 네티즌들이 설왕설래 하고 있다. 발단은 김 의원의 백선엽 비판 발언이다. 그가 지난 19일 국회 국방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국방부의 백선엽 씨 미화 뮤지컬 제작을 비판하자 <선일보>는 기자 칼럼을 통해 "지금 우리 국회에선 31세짜리 의원이 92세의 전쟁 영웅을 '민족반역자'라 부르며 모욕을 주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적었다. 당시 "잘못된 과(過)를 가지고 있는 이 민족 반역자가 대한민국 국군 지도자로 설 수 있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말한 김 의원은 졸지에 버릇 없는 국회의원이 됐다. 


물론 이 기자 칼럼에는 허술한 지점도 발견된다. 칼럼은 "백 장군은 일부에서 자신이 '독립군 토벌을 했다'고 주장하는 데 대해 2009년 인터뷰에서 '독립군을 구경도 해보지 못했는데 무슨 토벌을 하느냐'고 했다"고 지적했는데, 백 장군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가 직접 그의 손으로 독립군을 죽였다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속한 간도특설대가 독립군을 토벌했다고 하는 것이다. 실제 백 씨는 회고록을 통해 "우리(간도특설대)가 추격했던 게릴라(팔로군, 항일광복군 등)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백선엽 씨가 민족 반역자인지 아닌지 논쟁은 사라지고, 김 의원의 과거 트윗 발언이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김 의원이 "새해 소원은 뭔가요? 명박 급사(急死)"라는 글을 리트윗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그가 20대 때 한 '채찍 발언' 같은 것들이 기사화됐다. 그는 지금 '국가 원수 모독'을 즐기는 '변태 성욕자'처럼 돼 있다. 

공인이라면 자신의 언행에 대해 책임져야 하는 게 마땅하다. 농담 글이라도 성희롱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인식해야 한다. 새누리당 이준석 전 비대위원 역시 과거 트위터에 철거민을 비하하는 듯한 트윗을 한 것이 밝혀져 혹독한 신고식을 치룬 적이 있다. 박지원 원내대표도 김 의원에게 경고를 보내며 "송구하다"고 대신 사과했다. 
다만 최초로 김 의원이 제기했던 "백선엽은 민족 반역자인가 아닌가" 하는 부분은 여전히 논쟁거리다. KBS의 백선엽 미화 다큐가 파행을 겪고, 국방부의 백선엽 명예 원수 추대 시도가 무산된 것을 보면 그가 <조선일보> 지적대로 전 국민의 존경을 받는 "92세의 전쟁 영웅"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프레시안>은 '김광진 논란'의 최초 발원지인 '백선엽 논란'과 관련한 기고 글을 싣는다. 편집자주


백선엽, 1920년생이니 올해 92살이다.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대한민국 국군의 원로이다.

김광진, 1981년생이니 올해 31살이다. 민주당 청년비례대표로 의원이 됐는데, 국방부 국정감사에서 백선엽 미화 뮤지컬에 거액을 지원한 사실을 비판하면서, 백선엽을 민족반역자라고 지칭했다가 마녀사냥의 대상이 되었다. 이 때문에 의원이 되기 전에 트윗한 글까지 신상 털기를 당했다. 결국 '명박 급사'를 리트윗했다고 문재인 후보 선대위의 보직을 사퇴하고 공개사과까지 했다.

그런데도 막말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새누리당이 김 의원에 대한 징계안을 국회 윤리위에 제출했다.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시 입에 담기도 민망한 패륜적 망언을 리트윗했을 때의 반응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백선엽, 살아 있을 때 참회라도 하라"

백선엽, 그가 일제강점기 만주국의 특수부대인 간도특설대에서 군관으로 복무하면서 민족반역행위를 했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이명박 정부하에서 국가기구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선정한 반민족행위자에 포함되었으며 국회에 제출한 최종보고서에도 수록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백선엽은 해방 후에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지 않는 더 큰 잘못을 저질렀다. 그는 일본에서 출간된 저서에서 동족에게 총을 겨누었지만 그 때문에 독립이 늦어졌다고 볼 수도 없고, 자신이 일본과 싸웠다고 독립이 빨라질 것도 아니었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 백선엽 ⓒ민족문제연구소

백씨가 영웅으로 대접받고 싶다면 먼저 일제강점기의 반민족행위, 그리고 해방 후 이를 사죄하지 않은 것에 대해 뒤늦게라도 참회해야 한다. 아직 생존해 있기 때문에 기회는 남아 있다.

1938년 9월 독립군 '소탕'을 목표로 결성된 간도특설대는 전 부대원 740명 중에서 조선인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악명높은 대게릴라전 특수부대였다. 알려진 것만 해도 동북항일연군이나 팔로군과 108차례 전투를 벌여 172명을 살해하였으며, 수많은 민간인들을 상상하기 힘든 잔혹한 방법으로 살상 강간 약탈 고문했다.

만주국 중앙육군훈련처(봉천군관학교)를 졸업한 백씨는 1943년 4월 만주국 소위로 임관했으며, 곧 간도특설대에 배속된다. 일제가 패망할 때 만주국군 중위였는데 이는 판사 검사 군수와 동일한 고등관 7등의 고위직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백씨가 팔로군, 즉 공산주의자와 싸웠다고 강변을 한다. 그러나 간도특설대가 조선인으로 하여금 조선인을 제압한다는 의도 아래 조직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며 백 씨도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이를 인정하고 있다. 팔로군을 공격한 것도 당시 상황에서는 항일부대 나아가 연합군을 공격한 것으로 해석해야 마땅하다. 더욱이 민간인 동포들을 학살한 행위는 전쟁범죄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 백선엽 회고록 중에서 ⓒ민족문제연구소

"대한민국 정치사 오염시킨 정치 군인"

이렇게 사실관계가 명백함에도 군부의 원로나 보수층이 크게 반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식민지의 청년으로서 일제강점기에 일본 육군사관학교나 만주국 군관학교에 입학하여 정규 군사교육을 받고 일본군이나 만주군 장교로 임관한다는 것은 출세가 보장되는 길이었다. 일제강점기 전 기간을 통틀어 130명만이 이런 혜택을 누렸다. 일본 육사출신이 63명이고, 만주 군관학교 출신이 67명이다. 이들 중에서 독립운동 진영에 참여한 사람은 5명뿐이다.

이들은 소위로 임관하면 고등관 8등 대우를 받았고, 2~3년 후 중위로 진급하면 고등관 7등에 올랐다. 고등관은 기차를 타도 2등칸 이상을 탔으며, 고등관의 부인은 '옥상'이라 불렸다. 이들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정치사를 오염시킨 정치군인의 원조들이다.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나 행정과에 합격하면 시보생활을 몇 년 거친 다음에 고등관 7등의 군수나 판사에 임명됐다. 고등시험에 합격한 조선인이 400명쯤 됐으니 군수가 되는 것보다 장교가 되는 게 훨씬 어려웠다고 볼 수 있다.

해방 후 민족의 불행은 계속됐다. 일본 육사나 만주군관학교 출신 중에서 50명 이상이 '반공'의 기치를 든 덕분에 국군의 장군으로 변신했다. 심지어 신경군관학교 2기이며 만주국 중위 출신인 박정희 소장은 만주국 군맥을 동원해서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박정희 정권은 경상도의 외피를 쓴 만주 군인들의 정권이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59년 2월까지 육군 참모총장은 일본군 장교 또는 만주국군 장교 출신들이 독차지했다. 이 자리는 일본군 대령 출신 이응준이 초대 참모총장을 맡은 이래 일본군 중령 출신 신태영, 일본군 소령 출신 채병덕, 만주국군 헌병 대위 출신 정일권, 일본군 소령 출신 이종찬, 만주국군 중위로 간도특설대 군관 출신 백선엽, 이응준의 사위이자 일본군 대위 출신 이형근, 다시 백선엽이 이어받았다. 이상 7명 모두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랐다. 그 다음부터 1972년 10월유신으로 제3공화국이 끝날 때까지 육참총장 자리는 대학 재학 중 학병으로 현지 임관해서 일본군 장교로 복무한 자들이 독차지했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사정이 이러하니 이들과 직간접으로 연을 맺고 있는 자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백 씨의 역성을 들만도 하다. 게다가 색깔론이 선거에 유리하다는 판단까지 들고 보니 김 의원 화형식 같은 이성을 잃은 퍼포먼스까지 연출하고 있다.

이건 추론이지만 친일수구세력이 백씨에 대해 각별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을 수 있겠다. 백 씨가 육본 정보국장 근무시절 남로당 프락치 사건으로 죽게 된 박정희를 구명하고, 정보국에 문관으로 근무하게 했으며, 정보비에서 월급을 챙겨준 적이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명의 은인인 셈이다. 이래저래 챙겨야 할 까닭이 많아 보인다.

 

신명식 민족문제연구소 이사 

 

   어화민족문제연구소시민역사관건립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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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ac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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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hristian louboutin outlet 2013.04.28 12:20 address edit & del reply

    두번째 부분은 윤동주의 대표적

  2. 음... 2013.08.07 14:45 address edit & del reply

    x이나 까잡숴!

  3. 러브요 2016.02.03 19:48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해당 기사난 언론 링크 좀 알려주세요

<유신의 추억 그리고 인혁당> 전국순회 공동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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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선포40년 전국순회 공동전시>

 

유신의 추억 그리고 인혁당


전시개요

기 간 : 2012년 10월 ~ 11월 
장 소 : 10월 중 - 대구, 울산, 인천, 서울
..........11월 중 - 창원, 진주, 원주, 대전
주 최 : 민족문제연구소, 4·9통일평화재단
주 관 : 각 지역 시민단체


전시구성

(유신전) 유신으로 가는 길 / 조국근대화의 빛과 그림자 / 학교, 그 잔혹한 풍경 / 총력안보와 감시체제 / 금지의 시대 / 끝나지 않은 유신 패널 40매

(인혁전) “꽃이 되어 바람이 되어” - 8인 열사의 삶과 유품 패널 20매


전시제목 해설

‘유신의 추억’은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패러디해 왔다. 절대 추억일 수 없는 끔찍한 경험이지만,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과거라는 점에서 ‘유신’과 ‘연쇄살인’은 공통분모를 가진다. 불법적인 권력을 남용했던 가해자들의 추억은 피해자들에게 악몽이자 트라우마를 의미한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추억’은 역설적이고 중의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인혁당은 유신체제의 폭압성과 야만성을 증거하는 상징적 사건이다. 대표적인 공안조작사건으로서 인혁당사건은 국가권력에 의한 ‘사법살인’으로 연결되었다는 측면에서 잊어서는 아니 될 ‘유신의 추억’이라 할 수 있다.


전시순회 일정

전시지역

시기

장소

비고

고양

10/2~3

고양 호수공원 내 ‘미관광장’

고양평화박람회 부대행사

광주

10/5~28

가톨릭센터 3층

강연 및 토크

 

인천

10/5~7

부평역 등

울산

10/15~19

울산시내

춘천

10/22~28

춘천시내

서울

10/17~27

시청일대

대구

10/21~27

2·28공원 등

창원

11/1~13

3·15아트센터

진주

11/15~22

경상대 실내/실외

원주

11월 중

미정


전국순회 특별전을 열며

이 땅의 민주주의에 조종을 울린 ‘10월유신’ 선포 40년을 맞아 유신독재의 본질을 조명하는 특별전시 ‘유신의 추억 그리고 인혁당’ 전국순회전을 시작합니다. 이번 순회전시는 ‘민족중흥’과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란 미명 아래 민주주의와 인권을 철저하게 짓밟은 유신체제의 진면목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마련되었습니다.

민족의 염원인 통일문제까지 종신집권의 수단으로 악용한 박정희 정권은 안보를 명분으로 전국토를 거대한 병영으로 변모시켰습니다. 개인의 자유의지는 억압되고 창의성과 다양성은 획일주의 아래 말살되었습니다.

‘유신의 추억 그리고 인혁당’전은 그 끔찍했던 암흑시대, 전체주의 사회의 구체적 실상이 어떠하였는지, 통제와 규율 아래 놓인 일상사를 생생히 보여드리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4·9통일평화재단이 공동으로 추진하는 이번 전국순회 특별전시는 크게 ‘식민의 유산, 유신의 추억’전과 인혁당열사 추모전시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식민의 유산, 유신의 추억’전은 10월유신의 원류가 실은 일제 천황제 파시즘이었으며, 일본제국과 괴뢰 만주국의 각종 통치시스템과 동원기제를 차용한 ‘부끄러운 유산’이었다는 점을 증명하고, 나아가 친일의 역사가 어떻게 독재의 역사로 이어지는가를 낱낱이 고발합니다.

함께 열리는 인혁당열사 추모전 ‘꽃이 되어 바람이 되어’는 유신독재에 저항하다 ‘인혁당재건위’사건으로 희생된 8인 열사들을 추모하고 이 땅의 민주주의와 평화를 염원하는 전시입니다. ‘인혁당재건위’사건은 유신시대 대표적인 공안 사건으로, 선고 18시간 만에 이루어진 사형집행은 야만적인 독재정권이 자행한 ‘사법살인’이었습니다.

폭압적인 유신체제의 실상을 조명하는 이번 전시가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국가와 개인의 관계에 대해 되새겨 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유신을 체험한 세대에게는 정의를 향한 신념과 열정을 되살리는 자리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는 조작된 영웅의 신화를 깨는 한편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깨닫고 참여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 전시유치 문의 : 02) 969-0226 민족문제연구소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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