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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7.04 [연재]"식민의 유산 유신의 그늘" (5) 조국근대화의 빛과 그림자

[연재]"식민의 유산 유신의 그늘" (5) 조국근대화의 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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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와 "군사혁명 1주년 산업박람회"  





정당성이 취약할수록 선전은 더 요란하게 마련입니다. ⓒ한겨레


정당성이 취약할수록 선전은 더 요란하기 마련입니다. 어제오늘 이야기 만은 아닙니다. 일제시대도 그랬지요. 


 일제는 조선을 강점한지 5년만인 1915년 9월 11일 시정 5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라는 대규모 박람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했습니다. 요즘 한참 진행중이 여수 엑스포처럼 산업박람회지요. 


조선물산공진회


조선의 산업을 진작시킴과 동시에 식민지 경영의 성과를 과시하기 위한 정치적인 의미가 있었지요. '근대화'된 경성의 모습을 과시하면서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경성의 중심이고 조선의 정궁이었던 경복궁에서 말이지요. 이는 단순히 '경복궁에서 했다.' 의 의미가 아닙니다. 개최하면서 일제는 대원군이 복원한 경복궁의 전각들을 철거해 버립니다.그리고 그 터에 공진회를 위한 가건물들을 지었습니다. 50여일의 공진화가 끝난 후 나머지 가건물그대로 헐렸습니다. 



경복궁이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그리고 총독부 신청사 공사가 시작되었지요.(그 전에 총독부건물은 남산에 있었습니다.) 이미 경복궁 자리에 총독부 건물을 세우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겁니다. 여담입니다만 지금도 경복궁에 보이는 잔디가 다 예전에 건물들이 있던 자리입니다. 한국전통에서 잔디는 무덤에나 쓰이던 풀이었지요. 그리고 그 후 총독부는 몇 년 마다 박람회를 열어서 조선통치의 실적으로 자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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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쿠데타 1년, 경복궁에서 비슷한 행사가 열립니다.


그런데, 해방이후 경복궁에서 또 비슷한 행사가 열립니다. 이름하여 " 군사혁명 1주년 기념 산업박람회" 였지요. 1962년 4월 20일부터 47일간 열린 산업박람회는 경제개발이 본격화 되기도 전에 그 성과를 대대적으로 선전한 행사였습니다. 

군사혁명 1주년 기념 산업박람회장은 다름아닌 경복궁에서 개최되었습니다.




그래서, 박람회는 경제개발보다 소위 "혁명", 군사쿠데타의 정당성을 선정하는데 집중했습니다. 박람회의 건물 이름이 

"혁명기념관", "반공관", "5개년경제계획관", "재건국민관" 이라는 것을 봐도 확실히 보이는 것이지요. 


산업박람회장 사진, 저기 멀리 구 조선총독부 건물이 보이고 근정전, 경회루가 보입니다.




구호와 슬로건 뒤에 가려진 부패 공화국


1962년부터 경제자립과 경제성장을 목표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었습니다


. 기아와 빈곤, 보릿고개로 상징되던 최빈국 한국은 박정희 집권기에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며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많은 구호와 슬로건들이 나왔습니다. 구호의 종류는 각 분야마다 엄청나게 많치만 몇가지만 경제개발과 관련된 구호 몇 가지만 뽑아봐도 그 시대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부산 민주공원에 전시했던 패널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싸우며 건설하자 / 중단없는 전진의 해  / 올해는 총화 유신의 해 / 아껴서서 자립생활 저축해서 경제건설 / 총화유신 민족중흥 / 수출건설에서 조국근대화는 증산 / 증산이다 건설이다 65년은 일하는해 / 10월유신 100억불 수출 1000불 소득 / 수출은 국력의 총화 / 재건에 때가 없다 지금부터 시작하자 / 수출상품은 국력총화의 예술품 / 노사협조 다짐해서 자립경제 이룩하자 / 올해는 건설의 해 / 중단하는 자는 승리하지 못한다.  / 뭉쳐서 이룩하자 자립경제 자주국방 / 근면한 국민성은 번영을 기록한다



그러나 성장의 과실이 재벌에게 돌아가는 구조는 이미 박정희 정권초기부터 만들어졌고,  정경유착으로 인한 각종 비리와 부패의 뿌리역시 깊어졌습니다. 민주당의 부패를 비판하던 군사정부역시 부패하기 시작했습니다. 본격적인 시작은 정치참여를 앞두고 정치자금을 마련하는 가운데 벌어졌습니다.  새나라 자동차사건, 빠찡꼬사건, 증권파동, 워커힐사건 등 이른바 4대의혹 사건 이었지요. 군사정권이 쿠데타 당시 내세웠던 부정부패 일소는 점점 퇴색되어 자신들이 또다른 부정부패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간에는 구악뺨치는 신악 이라는 말이 돌았다고 합니다. 


증권파동

중앙정보부가 개입을한 주가조작 사건. 가격만 형성시켜놓고 실질적 매매는 이루어 지지않는 '불성'이라는 거래방법이 쓰였다고 한다. 


워커힐 사건

군사정권은 61년 성동구 광장동 부지를 수요하고 워커힐을 지었다. 일본으로 떠나는 주한미군의 달러를 잡기위해서였다. 하지만 중앙정보부가 공사자금 가운데 상당부분을 횡령하여 공화당 정치자금으로 사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새나라 자동차 사건

19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자동차 공업 보호법을 재정하여 향후 5년간 자동차 부품수입을 무관세로 했고, 새나라조립공장을 건설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완성된 일본산 소형 자동차를 관세없이 수입하여 업자에게 팔았고, 이 이익은 공화당 창당자금으로 사용되었다. 


빠찡꼬 사건

중앙정보부가 자유당, 민주당 때 금지되었던 빠찡꼬 기계를 500대나 수입하게 하고 영업허가를 내주는 대신에 돈을 챙신 사건이다. 



삼분이란 시멘트, 밀가루, 설탕 을 말합니다.


게다가 군정말기인 1963년에는 이른바 3분 폭리사건이 터집니다. 여기서 3분(3粉) 이란 시멘트, 밀가루, 설탕을 말합니다. 1963년은 태풍과 폭우로 쌀값이 폭등했고 밀가루에 대한 수요도 늘었습니다. 설탕도 수요가 급증했고, 시멘트는 품귀현상까지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 사건들에는 공동된 소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기업들이 정부로부터 지원받은 미국의 원조달러로 설탕, 밀가루 등을 수입하고 국내시장을 장악해 폭리를 취하고 정부는 기업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는 방식이었습니다.  설탕과 밀가루등의 가격이 갑자기 2,3배로 폭등해서 국민에게 엄청난 피해를 준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1970년대 내내 부동산투기 열풍이 불었습니다. 1970년대 후반 아파트 등 주택투기가 불붙었습니다. 복부인이란 말도 이때 생긴 신조어죠. 아파트 분양때 마다 투기행렬이 장사진을 이루었습니다. 1978년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분양과정에서 발생한 사회유력층의 불법, 부정행위는 대표적인 투기사건입니다. 


'조국근대화'는 부패와 비리로 시작한 것이지요. 




조국근대화의 두얼굴, 경부고속도로와 전태일


강준만교수의 한국 현대사산책을 보면 70년대는 전태일과 경부고속도로라는 상징으로 표현할수 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조금만 옮겨보죠





한강의 기적, 그 기적의 이면에 숨은 잔인한 인권유린... 

전태일은 가고 없다. 사람들은 전태일을 잊어버렸다. 남은건 경부고속도로다


경부고속도로의 중단없이 쭉 뻗은 길은 발전과 번영의 표상이었다. 모든게 '고속'이었다. 군사작전이었다. 오직 전짐남니 있을 뿐이었다. (중략)그러나 동시에 경부고속도로가 하나였던 것을 가로지르면서 만들어낸 경계는 새로운 갈등과 차별을 잉태시켰다. 농촌과 지방인구는 그 길에 흡수되어 서울과 도시에 내전져졌고 권력과 부의 집중과 전횡을 낳는 시스템이 고속도로처럼 빠른 속도로 구축되기 시작했다. (중략) 과연 무엇을 위한 조국근대화인가 하는 의문을 음미할 시간조차 없었으며 그게 용납되지도 않았다. 


갑작스럽게 도시에 던져진 사람들은 노동자와 빈민이 되어 '조국근대화'를 위해 싼 노동력을 제공해야만 했다. 싸도 너무 쌌다. 인격적인 모독까지 가해졌다. 저항은 절대 금기였다. 전태일의 분신자살이 그걸 웅변해 주었고, 이후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이 70년대 내내 계속된 그런 '억압과 착취'의 시스템을 상징적으로 폭로했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3 - 1970년대편, 인물과 사상사






상암동 박정희 기념관에 전시되어있는 여공들의 모습



박정희 기념관에는 미싱질을 하는 여공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박정희가 이끈 조국근대화를 이룬 것은 근로자들이라는 의미겠지요. 하지만, 당시 여공들은 어떤 취급을 당하면서 일했을까요? 동일방직사건을 보면 대강 답을 알 수 있습니다. 


권리의식이 높던 동일방직 노동자들은 1972년 한국 최초의 여성지부장을 선출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했습니다. 회사와 경찰은 계속 노조를 탄압하며 대의원 대회를 무산시켰지요. 1976년 7월 대의원 대회 때, 여성노동자들은 아무리 비열해도도 옷을 벗으면 손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옷을 벗고 경찰에 항의했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무자비하게 이들을 구타하고 연행해갔습니다.


동일방직노동자들의 비극은 이것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1978년에는 동일방직 오물투척사건이 일어났습니다. 1978년 2월 회사측의 협박을 받으면서도 동일방직노조가 대의원 선출 투표를 감행하려하자 회사 측 남성노동자들이 똥을 날라다가 여성조합원에게 퍼부었던 것입니다. 

경찰들은 구경만 하였고, 도움을 요청하는 여성노조원들에게는 냉소와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이 사건이 소위 ‘동일방직 똥물세례 사건’이다. 회사 측은 노동자 126명을 해고하였고 해고자 명단을 각 사업장에 돌려 재취업을 봉쇄하였습니다. 



소위 동일방직 똥물사건 사진입니다.



조국근대화의 역군이었고, 산업전사(戰士)로 불린 노동자들은 비참한 작업 조건 속에서 말 그대로 전사(戰死)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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