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병'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2.03.21 [동영상] 돌아오지 못한 남편의 청춘만장 (역사채널e)
  2. 2011.12.05 일본군 장교 출신 유재흥, 아버지 유승렬에 이어 대전 국립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 (1)

[동영상] 돌아오지 못한 남편의 청춘만장 (역사채널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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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일본, 조선을 가지고 놀다" 다음으로 역사채널e에서 다룬 주제는 청춘만장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소장중인 자료들을 바탕으로
3월 16일에 방송이 되었죠.




청춘만장, 장행기


주제가 된 지원병 출정깃발입니다. 장렬하게 떠난다는 의미로 장행기라고 합니다.  이
장행기에는 이런 글귀가 써 있습니다.

祝 陸軍兵志願者訓練所入所 宮本恩徽君, 國民總力 金堤郡 月村面 堤南部落聯盟

‘축 육군병 지원자 훈련소 입소 宮本恩徽君, 국민총력 김제군 월촌면 제남부락연맹’


김제군 월촌면 제남 부락연맹에서 지원병으로 차출되어 가는 청년들을 환송하기 위해 만들어 준 깃발인 것이지요. 환송을 위한 장행기, 하지만 조선사람들은 젊은 사람이 죽으러 가는 깃발과 같다고 해서 ‘청춘만장(靑春輓章)’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태평양전쟁에 끌려갔던 학병 수기에도 "청춘만장"이라는 제목이 쓰여 있습니다.



지원병으로 끌려간 새신랑, 그러나....


장행기에 써 있듯이, 宮本恩徽의 본명은 이은휘 입니다. 장행기의 주인공이지요. 宮本恩徽는 창씨명입니다. 1921년 9월 9일 전북 김제군 월촌면에서 태어났고 1940년 옆마을의 연인과 결혼했습니다. 스무살의 청년 이은휘가 일본군으로 강제동원된 건 1938년부터 실시된 "육군특별지원병령" 때문이었습니다.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1941년 지방공무원시험을 보기위해 면사무소에 갔다가 지원병으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말이 '지원'이지 사실상 강제였던 겁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시행된 육군특별지원병령은 많은 젊은이들을 지원이란 말 아래 끌고 갔습니다. 이은휘가 끌려갔던 1941년은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시기이면서, 지방 관청들이 경쟁적으로 지원병 수를 늘리기 위해 혈안이 되고 있던 시기였지요. 그토록 믿지 못하던 조선인들에게 총을 쥐어줄 만큼 급했던 일제는 몇년 지나지 않은 1943년에는 해군특별지원병령, 1944년 학도 특별지원병령을 거치며 징병제로 나아갑니다.


영혼마저 유폐되어 야스쿠니로


당시 임신 8개월의 아이를 가진 아내를 두고 이은휘는 1941년 6월 특별지원병훈련소에 입소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훈련생 때 휴가를 받고 집에 와 어린 아들을 품에 안고 부인과 눈물을 흘리던 것이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았습니다. 갓난 아기와 사랑스런 신혼의 아내를 두고 생이별을 해야 했던 이은휘. 특별지원병이 아니라 특별희생자였던 것이지요.

이후 전장에서 왼쪽 가슴에 총상을 입어 전사했다는 소식만 있었을 뿐, 유골도 유품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스무살의 남편을 보내야했던 정복례씨는 할머니가 될 때 까지 남편을 그리며 살다가 자신이 죽으면 남편 대신 이 깃발을 합장해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유수명부(留守名簿)에 따르면 이은휘는 남방군 제8방면군 제20사단에서 보병으로 근무하다 1944년 7월 11일 전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야스쿠니신사에 무단 합사되어 원하지도 않던 일본의 영령이 되어있지요. 영혼마저 유폐되어 있는 셈입니다. 뭐 살아있는 사람도 야스쿠니에 있으니 더 말할나위가 없겠지요...



이들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서


소장중인 많은 물품 하나하나마다 이런 사연들이 남아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일제시기, 이미 먼 옛날의 이야기 처럼 들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주변을 잘 둘러보면, 아직도 그 시대의 아픔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시간이 흐르면 그분들의 아픔은 어떻게 될까요?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그 시대를 살지 못했던 사람들은 그시대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 생각해 봅니다.


하나하나, 이분들이 가슴에 품고 있었던 이야기 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이런 이야기 들을 제대로 전하기에 아직 민족문제연구소 전시실은 좁기만 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시민의 역사관을 지으려는 이유도, 이런 분들의 이야기를 담기 위해서 입니다.


 

   
자료실 고양이 │ 민족문제연구소 자료실
못난 조상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친일인명사전의 기적,역사관 건립으로 이어가겠습니다.
TEL 02-969-0226 / E-mail
 historyac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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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장교 출신 유재흥, 아버지 유승렬에 이어 대전 국립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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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탑 비문 :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제3대 합참의장(1957~59년)과 제19대 국방장관(1971~73년)을 지낸 유재흥 예비역 육군 중장이 91살을 일기로 26일 별세했다. 군은 29일 오전 10시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정승조 합참의장을 장의위원장으로 하는 합참장(合參葬)을 치렀고, 이후 고인은 국립 대전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되었다.



》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 검색 결과

  


  원균을 능가하는 졸장, 북한군 최고의 명장 ……


》유재흥 전 국방장관

이와 같은 비아냥거림은 고 유재흥 장군의 6·25전쟁 중 전적 즉 자신이 지휘한 부대마다 패전하고, 심지어 그로인해 자신의 군단이 해체되기까지 했던 것을 두고 일컫는 말들이다. 그런데 29일 치러진 합참장에서 “당신은 휴전 때까지 한 번도 전장을 떠나 본 적이 없는 진정한 전투지휘관”이라며 그의 전적은 치하되었다. 더 나아가 그의 불굴의 용기와 숭고한 헌신, 투철한 군인정신은 후배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호국의 불씨로 남으리라 한다. 아무리 고인에 대해 너그러운 것이 우리네 풍습이라 해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친일은 집안 내력


유재흥은 '부자(父子) 친일 장교'로 유명하다. 그의 친아버지 유승렬(劉升烈, 1891~1958)은 1914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26기로 졸업해 나고야의 일본군 제3사단 보병 6연대에서 견습사관 과정을 거쳐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그리고 1920년대 중반까지 나고야에 머물던 중 1921년 8월 2남 유재흥을 낳았다. 유재흥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해 1941년 제55기로 졸업했고 이후 근위보병 제3연대 일본군 보병소위로 임관했다. 더불어 양자로 출계(出系)한 큰아버지 유익렬(劉益烈, 1886~?)은 일제 때 충청남도 청양군수·보령군수를 지냈으며, 유승렬의 딸이자 유재흥의 여형제는 일제 말기 경북 선산군수를 지낸 부완혁(夫琓爀, 1919~1984)과 결혼했다. 한 집안에서 본인을 비롯해 총 4명이 현재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는 것이다.



》경성육군지원병훈련소에 입소한 지원병 ⓒ 민족문제연구소


  학병지원은 조선을 위한 일


특히 유재흥은 일본군 보병소위 시절이던 1943년 11월 도쿄의 메이지대학(明治大學) 강당에서 열린 ‘특별지원병 궐기대회’에 연사로 참여했다. 연설에서 자신은 일본 육사를 나온 중위로서 아침저녁으로 천황을 지키고 있다고 소개하고, ‘지금 우리 조선인은 우리의 가치를 일본인에게 충분히 인식시킬 기회’이며 ‘이 시국에 일본 군대 장교로서 능력을 가진 조선인 학생들이 군에 들어가 밑에 거느린 일본 병정들을 가르쳐 주면서 임무를 완수하면 그 성과는 조선인을 위한 일이 될 것’이라고 군 입대를 종용했다.


이때 이광수, 최남선도 함께 한 ‘조선인 학병지원 촉구 연설’은 일본에 유학 중인 조선인 학생들까지도 학병 ‘지원’을 하도록 권유한다는 명목이었다. 그러나 이는 일제가 미국을 상대로 벌인 태평양전쟁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직접 조선인 청년을 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몰기 위한 전방위적 압박의 한 수단이었다. 


     『친일인명사전』 수록 유재흥 항목

     유재흥 劉載興│江本載興, 1921~2011

일본군 대위


1921년 8월 3일 일본 나고야(名古屋)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충청남도 공주다. 일본육사 제26기 졸업생으로서 일본군 대좌를 지낸 유승렬(劉升烈)의 차남이다.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보령군수를 지낸 큰아버지 유익렬(劉益烈)에게 양자로 출계(出系)했다. 다섯 살이 되던 해 부친이 대위로 승진해 함경북도 나남으로 부임지를 옮기면서 경원군으로 이사했다. 경원의 소학교를 다니다가 3학년 때 나남소학교로 전학했다. 1년 만인 1932년 부친이 용산(龍山) 제20사단 보병 제79연대 대위로 옮기자 경성 삼판심상소학교로 전학했다. 1932년 경성의 용산중학교를 입학했으나 3학년 때 부친이 평양 77연대로 전속(轉屬)되어 평안북도 일원의 신의주중학교, 신의주동중학교, 신의주상업학교, 의주농업학교, 정주 오산중학교의 배속 장교를 맡게 되자 신의주중학교로 전학했다.

1937년 신의주중학교 4학년 2학기에 평양 77연대에서 일본육사 예과에 응시해 합격한 후 1938년 12월 일본 육군예과사관학교를 입학했다. 신원보증인은 부친이 나고야 6연대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할 때 중대장을 지낸 이시카와(石川房三) 예비역 소장이다. 1939년 11월 예과사관학교를 마친 후 도쿄(東京) 부근에 자리 잡은 근위보병 제3연대에서 4개월의 대부근무(隊付勤務 : 부대실습)를 거친 후 1940년 4월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1941년 7월에 제55기로 졸업했다. 졸업 후 견습사관으로 다시 근위보병 제3연대 유수대(留守隊 : 동부 제6부대) 보병포 중대에 배치되었다가 며칠 뒤 지바(千葉) 소재 보병학교에 입교해 3개월 과정의 보병포 교육을 받고 근위보병 제3연대로 복귀해 일본군 보병소위로 임관했다. 당시 근위보병 제3연대장은 영친왕 이은(李垠)이었다.

1943년 11월 14일 상부의 지시로 도쿄의 메이지대학(明治大學) 강당에서 열린 ‘특별지원병 궐기대회’에서 이광수·최남선과 함께 조선인 학병지원을 촉구하는 연설을 했다. 자신은 일본 육사를 나온 중위로서 아침저녁으로 천황을 지키고 있다고 소개하고, ‘지금 우리 조선인은 우리의 가치를 일본인에게 충분히 인식시킬 기회’이며 ‘이 시국에 일본 군대 장교로서 능력을 가진 조선인 학생들이 군에 들어가 밑에 거느린 일본 병정들을 가르쳐 주면서 임무를 완수하면 그 성과는 조선인을 위한 일이 될 것’이라고 군 입대를 종용했다. 같은 해 보병 대위로 진급했고 박격대(迫擊隊) 대장을 맡았다.

1945년 3월 유수연대 보병포 중대장으로 근무하다가 본토 결전에 대비해 제206사단이 편성되면서 사단 중박격포연대 제2대대장으로 옮겼다. 새로 포병학교에 들어가 1개월간 중박격포 교육을 받고 부대 편성과 훈련을 마치고 규슈(九州) 구마모토(熊本) 아리아케(有明) 해안에 배치되었다가 패전을 맞이했다. 1945년 5월 육군대학에 응시했으나 일본이 항복함으로써 무산되었다. 교토에 있는 사단사령부에서 복원(復員) 절차를 밟고 육사 예과 과정의 대부실습 때 상관인 대본영(大本營)의 구메고로(久米五郞) 중령의 도움으로 도쿄에서 후쿠오카(福岡)까지 항공편으로, 후쿠오카에서 부산까지는 배편으로, 부산에서 서울까지는 기차를 이용해 9월 28일 귀국했다.

서울로 돌아온 후 부친과 일본 육사 동기생인 이응준(李應俊)의 추천으로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해 1946년 1월 졸업하고(군번 3번) 육군 대위로 임관했다. 이후 과도정부 군수국장과 제6여단장 등을 지냈으며, 1948년 12월 대령으로 진급했다. 1949년 1월 육군사관학교 부교장으로 임명받았으나 3월에 제주도지구 전투사령관에 임명되어 4·3사건을 전후해 2개월간 제주지역에서 ‘토벌작전’을 지휘했다. 1949년 5월 초 6여단 소속 8연대 제1대대장 표무원(表武源)과 제2대대장 강태무(姜太武)가 대대원들을 이끌고 각기 집단 월북한 사건으로(강·표사건) 제6여단장 김백일(金白一)이 해임되고 제6여단이 제6사단으로 승격되자 초대 사단장으로 부임했다. 이와 함께 준장으로 승진했다. 1950년 1월 태백산지구 전투사령관으로 공산유격대를 소멸하는 작전을 전개하다가 6·25 개전 보름 전 의정부 방면의 제7사단장으로 부임했다. 6ㆍ25전쟁에 제7사단장·제2군단장으로 참전했으며, 1950년 9월 육군 소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육군 참모차장, 제2군단장, 연합참모본부 총장, 제1군사령관을 역임한 뒤 1960년 7월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다. 1960년 8월부터 주태국 대사, 주스웨덴 대사, 주아이슬랜드 대사, 주이탈리아 대사를 지냈고, 1970년 9월 대통령비서실 안보국방담당 특별보좌관을 맡았다. 1971년 8월 제19대 국방부장관을 맡아 1973년 12월까지 재직했다. 1974년 대한석유공사 사장, 1980년 대한석유협회 초대 회장, 1991년 성우회(星友會) 회장을 역임했다. 을지·충무·금성·태극 무공훈장과 1등 수교훈장 등을 받았다. 2011년 11월 26일 사망했으며, 국립대전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되었다.


[참고문헌]

『京城日報』 1940.3.2 ; 滿鮮日報』 1940.3.5 ; 每日新報 1943.11.15, 1943.11.17 ; 朝鮮日報』 1949.5.21 ; 東亞日報』 1949.6.4 ; 三千里』 제12권 제4호(1940.4) ; 大韓民國人事錄』(1949.12) ; 忠淸人士集』(1957.5) ; 韓國名士大鑑 第1輯』�(1958.2) ; 1966年版 韓國·北朝鮮人名辭典』(1966.5) ; 現代韓國人名辭典(合同年鑑 67年版 別冊)』(1967.1) ; 陸軍士官學校(1969) ; 韓國出身 日本陸士·滿洲軍校同窓生名簿』(1975) ; 韓國戰秘史』(1977) ; 悲劇의 軍人들』(1982) ; 日本留學韓國人名錄』(1982.10) ; 創軍』(1984.2) ; 滿洲國軍誌』(1987) ; 大韓民國歷代三府要人總鑑』(1993.10) ; 激動의 歲月 : 劉載興回顧錄』(1994) ;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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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영섭 2012.12.21 23:29 address edit & del reply

    -_-;;; 4.3항쟁을 진압한놈...
    현리전투 대패의 장본인...아니 인류역사에 남을 대패의 장본인...

    저사람 인민군 장군아니었나요??

    참네 욕먹으면 오래산다더니....
    오래살거니와 자연사까지하는 호강에 국립묘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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