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쿠데타'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2.07.12 박정희 유신시대가 향수? 그 때가 그리운 분들을 위해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보겠습니다. [트윗으로 보는 "유신의 쌩얼" 중간 정리] (2)
  2. 2012.07.04 [연재]"식민의 유산 유신의 그늘" (5) 조국근대화의 빛과 그림자
  3. 2012.04.10 "역사전쟁"과 19대 국회의 과제 (2)

박정희 유신시대가 향수? 그 때가 그리운 분들을 위해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보겠습니다. [트윗으로 보는 "유신의 쌩얼" 중간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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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5.16을 "구국의 혁명"이라 칭했던 박근혜씨의 발언을 옹호하려는 새누리당 의원들이 발언이 연일 언론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무덤에서 처절하게 과오를 반성해야 할 유신의 망령이 화려하게 부활할 기세입니다. 이에 편승하여 권력을 취하고자하는 수 많은 "유신 전도사"들이이미 박근혜씨 주변과 전면에 포진되어 있는 형국입니다.

독재를 미화하려는 그들은, 이제 친일까지 미화하기 위해 온갖 꼼수를 부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 대표적인 역사테러가 바로 "국사교과서"입니다.친일파 서술이나 민주화 운동에 대한 서술은 대폭 축소된 반면 경제성장에 대한 찬양이 극대화 되었습니다. 근현대사 교육 시간 자체가 축소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종박'세력들의 "멘붕적 역사관"이 그대로 학생들에게 주입되지는 않을지 두렵고도 참담한 마음입니다.

 

군사쿠데타는 기존의 모든 가치관과 미덕을 부인하는 입니다. 거기에는 도덕과 윤리, 정의의 문제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총을 갖고 칼을 갖고 탱크를 가진 힘센 놈이 이긴다는 것입니다.

민족을 배반한 친일행위에도, 정의를 외치던 인사들과 무고한 시민들을 잡아다 탄압하고 고문했던 폭악한 반인륜적 행위에도, 노동자의 권리는 고사하고 인간의 권리 조차 누릴 수 없었던 열악한 노동탄압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자들은 이 시대가 그립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박정희 향수속에는 강도적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 페어플레이가 없이 자신들의 사적 이익이 온 사회를 지배 했던 비민주적인 이기심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다시금, 박정희의 업적을 찬양하고 숭앙하는 자들에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그 시절을 향수로 기억하고 싶은지 말입니다.

정치적 의사는 고사하고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그 시절, 막걸리 한잔 마시다 빨갱이로 몰려 고역을 당해야 했던 그 시절, 노래는 금지되고 헤어스타일, 치마길이까지 모두 통제 당했던 그 시절, 강요된 경제성장론으로 살인적인 노동에 저항하지 못하고 폐병이 들어 비참이 쫒겨나야만 했던 그 시절, 우리의 아들'딸이 다니던 학교에서조차 병영훈련을 받으며 땀흘려야 했던 그 시절.

박정희 유신시대...과연 향수라고 여기고 싶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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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트로]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그리고 1961년 5월 18일 민족일보 사건이 일어난다. 군사정변세력은 반공이데올로기에 기초해 군사독재체제를 수립했다. 언론에 대한 사전검열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진보언론이었던 민족일보는 간부들이 체포되며 폐간되었다. 민족일보사장이었던 조용수는 결국 사형까지 당했다. 유신정권의 폭압성을 보여주는 서막에 불과했다.

[트윗으로 보는 유신의 쌩얼1] 64년 3월,한일국교정상회담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이 경제협력자금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많은 시민들이 거리에 나왔다.이에 박정희정권은 계엄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했다


[트윗으로 보는 유신의 쌩얼 2] 65년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증가하기 시작한 일본인 관광객을 중심으로 시작된 '기생관광'은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정책에 따라 본격적으로 확산되기시작했다.이를 널리 장려하던 유신정권에게 이 여성들은 일종의 천연자원이었다


[트윗으로보는 유신의 쌩얼3] 1967년 동백림(동베를린) 사건! 박정희 정권은 3선개헌을 위해 부정선거로 개헌의석을 차지했고,이를 덮기 위해 동백림 사건을 조작.독일유학생과 교민 중 간첩으로 지명된 사람들은 한국으로 납치되어 구속되어 고문을 받았다


[트윗으로보는유신의쌩얼4] 69년 3선개헌 반대투쟁! 박정희정권은 정권연장을 위해 67년6월8일 부정선거를 자행하며 개헌의석을 확보했고,69년 3선개헌안을 날치기 처리했다.정권은 탄압의 강도를 높이며 개헌을 강행, 결국10월17일 3선개헌은 최종 통과되었다.


[트윗으로보는유신의쌩얼5] 1970년11월13일, 청년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책을 불태우고분신했다.조국근대화란 미명하에 놓여진 유신시절 노동자의 참혹한 현실이었다. 전태일의 죽음은 노동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관심과 한국사회 민주화의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트윗으로보는 유신의쌩얼 6] 1973년8월8일,10월유신 선포시 일본에 있던 김대중은 이에 저항했고, 정권은 김대중을 납치 바다에 빠뜨려 죽이려다 실패하고 서울로 압송했다. 이 사건으로 유신은 국제적 비난과 해외동포들의 유신반대운동에 부딪혔다

[트윗으로 보는 유신의쌩얼7] 1973년10월02일,유신독재 아래 모두가 숨죽일때 서울대에서 유신 이후 최초의 시위가 발생하여 전국으로 확대되자 초강경 정책으로 일관하던 박정권은 유화책으로 처벌을 백지화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의 시위는 그치지 않았다.

[트윗으로 보는 유신의쌩얼 8] 73년10월19일, 유신반대학생들을 지지한 서울대 법대 최종길교수에게 당국이 유럽간첩단사건의 협의를 발표하자 최교수는 결백을 증명하고자 자진 조사를 받았다.그는 3일후 변사체로 발견, 당국은 투신자살했다고 발표했다.

[트윗으로 보는 유신의쌩얼 9] 74년01월08일 긴급조치1,2호발표! 긴급조치는 유신헌법에 따라 대통령 권한의 특별조치이다.긴급조치는 대통령의 판단에 따라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시킬 수 있었으며 74~79년까지 총 9차례나 공포되었다

[트윗으로보는유신의쌩얼10] 74년01월26일 문인간첩단 사건.73년 10월부터 대학생과 재야인사들의 유신반대운동이 일자 문학계에서도 74년 1월 문인 61명의 개헌지지성명을 발표. 보안사령부는 이들을 고문해 조작하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조사했다

[트윗으로보는유신의쌩얼11] 74년4월3일,민청학련사건! 유신반대운동을한 대학생들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정부는 이들을 북한의 사주를 받아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며 긴급조치 제4호를 발표하여 1024명을 조사했고 203명을 구속했다

[트윗으로보는유신의쌩얼12] 74년4월25일,민청학련사건의 배후로 인혁당 관계자들을 지목 사건 조작. 사형 8명,무기징역 7명,징역20년 4명, 징역15년 4명 등을 선고했다. 8명은 대법 판결 18시간 만에 사형집행,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었다.

[트윗으로보는 유신의쌩얼13] 긴급조치로 언론이 제대로 보도를 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은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고 외부간섭배제,기자불법연행거부 등을 결의했다.정권의 압력으로 무더기 광고해약사태로 백지광고가 개제되었다

[트윗으로보는 유신의쌩얼14] 75년2월에 실시된 유신헌법의 신임투표에서는 유권자의 79.8%가 참가하여 73.1%의 찬성을 얻었다.유신헌법에대한 어떤 비판과 이의제기도 처벌되었던 당시 상황은 관권선거의 전형적 사례로 정권은 이후 더욱 강경해졌다

[트윗으로보는 유신의쌩얼15] 74년12월14일,유신정권에 의해서 조작되어 무고한 시민8명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던 '인혁당사건'에 고문조작설을 제기하며 전모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던 시노트 신부와 오글 목사가 박정희독재정권으로부터 강제추방되었다

[트윗으로보는 유신의쌩얼 16] 75년04월11일, 서울대 농대생 김상진이 유신체제와 긴급조치에 저항,학내의 자유성토대회에서 양심선언문을 읽고 할복자살했다.장례 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하였고 이는 민주진영의 지식인,특히 여러시인들의 감성을 일깨웠다.

[트윗으로보는유신의쌩얼17] 동일방직노동자들은 72년 한국최초의 여성지부장을 선출하며 권리를 주장했다.회사와 경찰은 노조를 탄압하며 대의원 대회를 무산시켰다. 76년 7월 여성노동자들은 옷마저 벗어가며 항의했지만 경찰은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연행해갔다

[트윗으로보는유신의쌩얼18] 1975년 08월 17일 장준하는 김대중과 재야세력을 규합하여 유신체제 반대운동을 벌이기로 합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준하는 제2차 100만인 개헌서명운동을 불과 3일을 남겨 두고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앞으로 민족문제연구소 공식 트위터를 통해 다시 연재될 "트윗으로 보는 유신의 쌩얼"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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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arrera lunettes 2013.04.24 03:15 address edit & del reply

    귀를 기울여봐 가슴이 뛰는 소리가 들리면 네가 사랑하는 그 사람 널 사랑하고 있는거야.

  2. nike free run 2 2013.04.25 16:45 address edit & del reply

    사람이란 자기가 생각하는 만큼 결코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다.Topics related arti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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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식민의 유산 유신의 그늘" (5) 조국근대화의 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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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와 "군사혁명 1주년 산업박람회"  





정당성이 취약할수록 선전은 더 요란하게 마련입니다. ⓒ한겨레


정당성이 취약할수록 선전은 더 요란하기 마련입니다. 어제오늘 이야기 만은 아닙니다. 일제시대도 그랬지요. 


 일제는 조선을 강점한지 5년만인 1915년 9월 11일 시정 5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라는 대규모 박람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했습니다. 요즘 한참 진행중이 여수 엑스포처럼 산업박람회지요. 


조선물산공진회


조선의 산업을 진작시킴과 동시에 식민지 경영의 성과를 과시하기 위한 정치적인 의미가 있었지요. '근대화'된 경성의 모습을 과시하면서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경성의 중심이고 조선의 정궁이었던 경복궁에서 말이지요. 이는 단순히 '경복궁에서 했다.' 의 의미가 아닙니다. 개최하면서 일제는 대원군이 복원한 경복궁의 전각들을 철거해 버립니다.그리고 그 터에 공진회를 위한 가건물들을 지었습니다. 50여일의 공진화가 끝난 후 나머지 가건물그대로 헐렸습니다. 



경복궁이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그리고 총독부 신청사 공사가 시작되었지요.(그 전에 총독부건물은 남산에 있었습니다.) 이미 경복궁 자리에 총독부 건물을 세우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겁니다. 여담입니다만 지금도 경복궁에 보이는 잔디가 다 예전에 건물들이 있던 자리입니다. 한국전통에서 잔디는 무덤에나 쓰이던 풀이었지요. 그리고 그 후 총독부는 몇 년 마다 박람회를 열어서 조선통치의 실적으로 자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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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쿠데타 1년, 경복궁에서 비슷한 행사가 열립니다.


그런데, 해방이후 경복궁에서 또 비슷한 행사가 열립니다. 이름하여 " 군사혁명 1주년 기념 산업박람회" 였지요. 1962년 4월 20일부터 47일간 열린 산업박람회는 경제개발이 본격화 되기도 전에 그 성과를 대대적으로 선전한 행사였습니다. 

군사혁명 1주년 기념 산업박람회장은 다름아닌 경복궁에서 개최되었습니다.




그래서, 박람회는 경제개발보다 소위 "혁명", 군사쿠데타의 정당성을 선정하는데 집중했습니다. 박람회의 건물 이름이 

"혁명기념관", "반공관", "5개년경제계획관", "재건국민관" 이라는 것을 봐도 확실히 보이는 것이지요. 


산업박람회장 사진, 저기 멀리 구 조선총독부 건물이 보이고 근정전, 경회루가 보입니다.




구호와 슬로건 뒤에 가려진 부패 공화국


1962년부터 경제자립과 경제성장을 목표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었습니다


. 기아와 빈곤, 보릿고개로 상징되던 최빈국 한국은 박정희 집권기에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며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많은 구호와 슬로건들이 나왔습니다. 구호의 종류는 각 분야마다 엄청나게 많치만 몇가지만 경제개발과 관련된 구호 몇 가지만 뽑아봐도 그 시대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부산 민주공원에 전시했던 패널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싸우며 건설하자 / 중단없는 전진의 해  / 올해는 총화 유신의 해 / 아껴서서 자립생활 저축해서 경제건설 / 총화유신 민족중흥 / 수출건설에서 조국근대화는 증산 / 증산이다 건설이다 65년은 일하는해 / 10월유신 100억불 수출 1000불 소득 / 수출은 국력의 총화 / 재건에 때가 없다 지금부터 시작하자 / 수출상품은 국력총화의 예술품 / 노사협조 다짐해서 자립경제 이룩하자 / 올해는 건설의 해 / 중단하는 자는 승리하지 못한다.  / 뭉쳐서 이룩하자 자립경제 자주국방 / 근면한 국민성은 번영을 기록한다



그러나 성장의 과실이 재벌에게 돌아가는 구조는 이미 박정희 정권초기부터 만들어졌고,  정경유착으로 인한 각종 비리와 부패의 뿌리역시 깊어졌습니다. 민주당의 부패를 비판하던 군사정부역시 부패하기 시작했습니다. 본격적인 시작은 정치참여를 앞두고 정치자금을 마련하는 가운데 벌어졌습니다.  새나라 자동차사건, 빠찡꼬사건, 증권파동, 워커힐사건 등 이른바 4대의혹 사건 이었지요. 군사정권이 쿠데타 당시 내세웠던 부정부패 일소는 점점 퇴색되어 자신들이 또다른 부정부패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간에는 구악뺨치는 신악 이라는 말이 돌았다고 합니다. 


증권파동

중앙정보부가 개입을한 주가조작 사건. 가격만 형성시켜놓고 실질적 매매는 이루어 지지않는 '불성'이라는 거래방법이 쓰였다고 한다. 


워커힐 사건

군사정권은 61년 성동구 광장동 부지를 수요하고 워커힐을 지었다. 일본으로 떠나는 주한미군의 달러를 잡기위해서였다. 하지만 중앙정보부가 공사자금 가운데 상당부분을 횡령하여 공화당 정치자금으로 사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새나라 자동차 사건

19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자동차 공업 보호법을 재정하여 향후 5년간 자동차 부품수입을 무관세로 했고, 새나라조립공장을 건설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완성된 일본산 소형 자동차를 관세없이 수입하여 업자에게 팔았고, 이 이익은 공화당 창당자금으로 사용되었다. 


빠찡꼬 사건

중앙정보부가 자유당, 민주당 때 금지되었던 빠찡꼬 기계를 500대나 수입하게 하고 영업허가를 내주는 대신에 돈을 챙신 사건이다. 



삼분이란 시멘트, 밀가루, 설탕 을 말합니다.


게다가 군정말기인 1963년에는 이른바 3분 폭리사건이 터집니다. 여기서 3분(3粉) 이란 시멘트, 밀가루, 설탕을 말합니다. 1963년은 태풍과 폭우로 쌀값이 폭등했고 밀가루에 대한 수요도 늘었습니다. 설탕도 수요가 급증했고, 시멘트는 품귀현상까지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 사건들에는 공동된 소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기업들이 정부로부터 지원받은 미국의 원조달러로 설탕, 밀가루 등을 수입하고 국내시장을 장악해 폭리를 취하고 정부는 기업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는 방식이었습니다.  설탕과 밀가루등의 가격이 갑자기 2,3배로 폭등해서 국민에게 엄청난 피해를 준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1970년대 내내 부동산투기 열풍이 불었습니다. 1970년대 후반 아파트 등 주택투기가 불붙었습니다. 복부인이란 말도 이때 생긴 신조어죠. 아파트 분양때 마다 투기행렬이 장사진을 이루었습니다. 1978년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분양과정에서 발생한 사회유력층의 불법, 부정행위는 대표적인 투기사건입니다. 


'조국근대화'는 부패와 비리로 시작한 것이지요. 




조국근대화의 두얼굴, 경부고속도로와 전태일


강준만교수의 한국 현대사산책을 보면 70년대는 전태일과 경부고속도로라는 상징으로 표현할수 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조금만 옮겨보죠





한강의 기적, 그 기적의 이면에 숨은 잔인한 인권유린... 

전태일은 가고 없다. 사람들은 전태일을 잊어버렸다. 남은건 경부고속도로다


경부고속도로의 중단없이 쭉 뻗은 길은 발전과 번영의 표상이었다. 모든게 '고속'이었다. 군사작전이었다. 오직 전짐남니 있을 뿐이었다. (중략)그러나 동시에 경부고속도로가 하나였던 것을 가로지르면서 만들어낸 경계는 새로운 갈등과 차별을 잉태시켰다. 농촌과 지방인구는 그 길에 흡수되어 서울과 도시에 내전져졌고 권력과 부의 집중과 전횡을 낳는 시스템이 고속도로처럼 빠른 속도로 구축되기 시작했다. (중략) 과연 무엇을 위한 조국근대화인가 하는 의문을 음미할 시간조차 없었으며 그게 용납되지도 않았다. 


갑작스럽게 도시에 던져진 사람들은 노동자와 빈민이 되어 '조국근대화'를 위해 싼 노동력을 제공해야만 했다. 싸도 너무 쌌다. 인격적인 모독까지 가해졌다. 저항은 절대 금기였다. 전태일의 분신자살이 그걸 웅변해 주었고, 이후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이 70년대 내내 계속된 그런 '억압과 착취'의 시스템을 상징적으로 폭로했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3 - 1970년대편, 인물과 사상사






상암동 박정희 기념관에 전시되어있는 여공들의 모습



박정희 기념관에는 미싱질을 하는 여공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박정희가 이끈 조국근대화를 이룬 것은 근로자들이라는 의미겠지요. 하지만, 당시 여공들은 어떤 취급을 당하면서 일했을까요? 동일방직사건을 보면 대강 답을 알 수 있습니다. 


권리의식이 높던 동일방직 노동자들은 1972년 한국 최초의 여성지부장을 선출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했습니다. 회사와 경찰은 계속 노조를 탄압하며 대의원 대회를 무산시켰지요. 1976년 7월 대의원 대회 때, 여성노동자들은 아무리 비열해도도 옷을 벗으면 손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옷을 벗고 경찰에 항의했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무자비하게 이들을 구타하고 연행해갔습니다.


동일방직노동자들의 비극은 이것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1978년에는 동일방직 오물투척사건이 일어났습니다. 1978년 2월 회사측의 협박을 받으면서도 동일방직노조가 대의원 선출 투표를 감행하려하자 회사 측 남성노동자들이 똥을 날라다가 여성조합원에게 퍼부었던 것입니다. 

경찰들은 구경만 하였고, 도움을 요청하는 여성노조원들에게는 냉소와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이 사건이 소위 ‘동일방직 똥물세례 사건’이다. 회사 측은 노동자 126명을 해고하였고 해고자 명단을 각 사업장에 돌려 재취업을 봉쇄하였습니다. 



소위 동일방직 똥물사건 사진입니다.



조국근대화의 역군이었고, 산업전사(戰士)로 불린 노동자들은 비참한 작업 조건 속에서 말 그대로 전사(戰死)하고 있었습니다. 







  

     
자료실 고양이 │ 민족문제연구소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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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전쟁"과 19대 국회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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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전쟁"과 19대 국회의 과제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 조세열


세월이 흘러가도 용서못할  대죄, 역사훼손


이명박 정부가 지난 4년간 저지른 잘못을 어떻게 다 일일이 거론할 수 있겠는가. 남북관계, 환경, 인권, 심지어 내세우던 경제까지 엉망이 아닌 분야를 찾기 힘들지만, 세월이 흘러가도 용서받지 못할 대죄 중의 하나가 역사훼손이 아닐까한다.

역대 독재정권 하에서도 정치권력의 역사변조가 지금과 같이 노골적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정통성이 없었던 만큼 속내야 어떻든 겉으로는 독립운동과 사월혁명의 정신을 존중하는 시늉이라도 했다. 그런데 지금의 집권세력은 정권 인수 단계에서부터 이데올로기 공세를 펴면서 거리낌 없이 역사 뒤집기에 나섰다.

이 정부 들어 과거사위원회 통폐합 추진으로부터 시작된 퇴행적 역사파괴는 건국절 제정 시도, 공영방송의 친일,독재 미화 다큐멘터리 방영, 이승만 박정희 백선엽 김백일 동상 건립, 박정희기념도서관 개관, 역사교과서 개악 등 민,관을 불문하고 전방위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 총결산이라 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식민지 시기와 산업화에 대한 편향적 자학적 관점의 극복’을 목표로 연말 개관을 앞두고 있다.


▲지난해 11월 14일, 교과부의 역사교과서 개악에 반발하여 연구소 등 422개 단체가 참여한 "역사정의실천연대" 발족식 모습



역사변조의 확대재생산


이러한 일련의 치밀한 역사변조는, 일본 극우세력의 한국판이라 할 수 있는 뉴라이트 세력이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고 조중동 등 수구언론과 어용관변 단체가 그 논리를 확산시키며, 정부가 이를 정책적으로 뒷받침하는 형태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이들이 비상식적인 역사전쟁을 도발한 배경에는 정권재창출이라는 현실적 목적 외에 나름의 이념적 위기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친일문제나 국가폭력 등 우리 근현대사의 숨겨진 진실이 규명되면서 그간 한국사회의 주류로 행세해왔던 보수세력의 반민족적 반민주적 속성이 여지없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냉전체제하에서 효험을 봤던 색깔론도 더 이상 먹혀들지 않는 현실 속에서 수세적인 국면을 타개할 근본적인 대책이 절박했던 사정도 작용했다.

그들의 주장은 식민지근대화론, 자유국가건설론, 개발독재 경제성장기여론 등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일본 우익의 논리를 그대로 차용하여 한국근현대사를 자학사관에서 벗어나 긍정의 시각으로 해석하자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그리하여 일제강점기는 근대화의 토대가 마련된 시기로, 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로, 박정희는 민족중흥의 지도자로 자리매김한다. 반면 대한민국 헌법에 명문화된 우리 사회의 굳건한 가치기준인 독립정신과 민주주의는 여지없이 능욕당하는 수난을 겪게 됐다. 독립운동을 과대포장된 테러리즘으로 민중민주항쟁은 좌파의 폭동으로 비하하는 망발을 서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지난 4월 6일 일제징용피해자 유족들이 기자회견을 갖고 '독도는 분쟁지역' 및 '친일파 재평가' 등의 친일 발언으로 논란이 된 새누리당 부산 해운대 기장을의 하태경 후보의 사죄와 후보직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뉴시스



10.26에서 멈춰버린 박근혜의 역사시계


그런데 우려스러운 일은 보수세력의 여망을 안고 차기 대권 주자의 행보를 가속화하고 있는 박근혜 씨의 역사관은 더욱 과거회귀적이며 폐쇄적이라는 점이다. 그는 5.16쿠데타를 ‘구국의 혁명’으로 10월유신을 불가피한 결단에서 나온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박정희를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한 일에 대해서는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위협적이고 감정적인 반응을 나타냈던 반면, 일본 우익의 사관을 방불케한다는 평을 받은 뉴라이트의 대안교과서에 대해서는 ‘시대적 쾌거’라고 칭송하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번 총선에서 역사인식의 문제로 이영조 박상일 후보에 대한 전략공천을 전격 철회한 것도 다분히 선거공학의 관점에서 이루어진 고육지책으로 해석된다. 그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은 공천을 주는 쪽과 받는 쪽의 역사인식에 다름이 없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박근혜 씨는 선거기간 내내 이번 총선이 과거를 부정하는 세력과 미래를 지향하는 세력의 대결이라고 누누이 강변했다. 그가 추호의 의심도 없이 긍정하는 과거는 아마 박정희 시대일 것으로 짐작되지만, 이와 같은 이분법은 그 전제부터 잘못되었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친일도 헌정파괴도 사법살인도 그 어떤 잘못도 부정할 수 없는 성역에 속하고 만다. 과거에 대한 성찰을 애써 외면하는 그의 역사 시계는 10.26에서 멈춰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것 같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이러한 역사인식을 고수하는 정치지도자를 한 축으로 전개될 19대 국회에 역사복원을 주문하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일이 될 가능성도 크다. 그러나 역사란 한 정권의 전유물이 될 수 없으며 한 정치인의 입맛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사안도 아니다. 곧 19대 국회의 지형이 드러나겠지만 어느 편이 다수를 차지하든 역사문제에 관한 한 당리당략을 떠나 민족의 미래를 내다보는 거시적 안목으로 접근해야 마땅할 것이다.


▲ 지난 2월 21월, 박정희 대통령 기념ㆍ도서관’ 개관식에 참석한 박근혜 위원장의 모습



역사서술을 객관화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절실하다.


역사와 관련된 19대 국회의 최우선 과제는 역사문제에 권력이 관여하지 못하도록 제도적 장치를 만드는 일이다. 최근 역사교과서 개편과정에서 벌어진 학계 외부의 부당한 압력은 ‘교육은 백년대계’라는 금언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전경련 상공회의소 국방부 경찰청 재향군인회 등 온갖 이익단체와 정부기관까지 나서 구체적인 요구사항을 들이대는 전대미문의 현상까지 일어난 것이 좋은 실례이다. 이런 사태를 방치한다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사와 교육의 대체가 흔들리는 악순환을 면치 못할 것이 자명해 보인다. 따라서 사실상의 사전검열을 방지하고 역사서술의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도록 국회가 법적 제도적 여건을 마련하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또한 현 정부 들어 현저히 왜곡되면서 중단된 과거사청산과 관련된 실질적인 후속조치를 단행해야 한다. 과거사 관련 특별법은 대부분 해당 위원회의 활동 종료 후 재단 또는 사료관을 설치하여 후속사업을 진행하도록 명시해 놓고 있다. 그런데 과거사청산이 미완의 상태에 있음에도 연구,조사,교육이나 피해자에 대한 배상,보상 등 국가 차원의 노력은 완전히 실종되고 말았다. 국가폭력의 피해자 등 국가가 책임져야 할 사안이 다수 밝혀졌음에도 이를 회피하고 있는 현실은 국가의 직무유기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국회 사무처가 공개한 19대 국회의원들이 착용할 배지



역사는 굴절될 것인가 바른 이정표가 될 것인가


3.1운동과 4월혁명으로 대변되는 헌법정신도 구두선에 그치고 방치할 것이 아니라, 독립정신과 민주적 시민의식을 고양시킬 수 있는 방안을 입법을 통해 마련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근현대사 교육의 강화와 국가시험 필수과목 지정, 독립유공자와 후손에 대한 예우 개선과 보훈 교육의 정립, 발굴보훈의 확대를 위한 전면적인 독립운동 인물정보 구축 등을 구체적인 사례로 들 수 있다.

한일간의 과거사문제도 차기 국회가 주목해야 할 분야이다. 한일간에는 여전히 ‘일본군위안부’문제 독도문제 등 과거사 관련 현안이 산적해 있다. '한미일'동맹을 의식한 한국정부의 소극적인 대처는 역사교과서 왜곡이나 독도 영유권 주장에서 나타나듯 일본의 도발을 점차 강화시키는 쪽으로 작용해 왔다. 이미 일회적인 대응이나 외교적 수사만으로는 일본을 제어할 수 없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정부가 적극적인 대처를 회피한다면 국회가 실질적인 정책수립과 대안모색에 나서야 하리라 본다.

이명박 정부 4년 만에 역사정의는 크게 후퇴하고 말았다. 복원하는 데만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들 것이다. 그러나 정신세계의 오염은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근본적이고 중차대한 문제다. 19대 국회가 역사바로세우기를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우리 역사가 이대로 굴절되고 말 것인가 아니면 미래세대의 바른 이정표가 될 것인가는 차기국회의 선택에 달려있다.


『독립정신』63호, 권두언(게재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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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afas de sol carrera 2013.04.27 15:19 address edit & del reply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은 거지, http://noq.scarpehoganlt.com/ sito ufficiale hogan, 뭐가 이렇게 어렵고 복잡하냐구

  2. supra skytop 2013.04.28 03:24 address edit & del reply

    노동은 생활의 꽃이요, 삶의 보람이요, 마음의 기쁨이다.Topics related arti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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